'보고 듣고 느끼고/이런생각 저런느낌'에 해당되는 글 183건

  1. 2010.07.22 분별력을 키우자
  2. 2010.07.14 경제가 어려우니 블로그도 어렵다 2
  3. 2010.06.28 월드컵 병역특례
  4. 2010.06.25 단점을 긍정적으로 보자 2
  5. 2010.06.18 편견의 함정을 뒤집어보자
  6. 2010.06.09 생각하기 나름 맘먹기 나름 2
  7. 2010.06.07 서울시장 선거결과 논란을 보며
  8. 2010.05.21 4000원이 일깨워준 이기적인 생각
  9. 2010.03.29 초계함 침몰 유감 6
  10. 2010.03.15 참되고 맑은 삶은 아름다운 뒷 모습을 남긴다
  11. 2010.03.11 [삼성을 생각한다]
  12. 2010.03.08 결과가 본질을 규정한다
  13. 2010.03.05 한 사람의 취업으로 본 사회적 통념 뛰어넘기
  14. 2010.02.28 삼성전자.. 그리고, SKT는 좀더 깊히 고객을 생각했어야 했다. 4
  15. 2010.02.19 새로운걸 추구하는 이유
  16. 2010.01.20 간직하고픈 글귀 - 美 해병이야기와 리더쉽 4
  17. 2010.01.14 회식구호로 본 심리의 양면성
  18. 2010.01.04 새해 초 많은 눈이 주는 의미 6
  19. 2009.07.15 눈 가리고 아웅도 지나치다 2
  20. 2009.04.20 [가문의 영광] 아쉬움이 가득한 종방
  21. 2009.04.17 경조... 마음가는대로 하면되지...
  22. 2009.04.09 산다는건 이런게 아닐까...
  23. 2009.03.27 청첩의 의미
  24. 2009.03.25 위대하고 아름다웠던 도전
  25. 2009.03.23 이 시대 한국사회의 교과서 - [가문의 영광] 2
  26. 2009.03.16 큰 정치인의 선택
  27. 2009.03.04 [좋은 이름]에 대한 우문현답
  28. 2009.02.26 내 몫에 당당하자
  29. 2009.02.23 김수한 추기경님께서 주신 것.
  30. 2009.02.20 광고유감

지난 월요일, 동호회 활동을 함께 했던 사람들 중 마음을 열고 정을 나누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었다.
이런저런 정담을 나누며 농담이 오가던 중 대학교수로 있는 후배가 이야기를 꺼냈다.
"대학교수를 애인으로 두면 좋은 점이 뭔지 아느냐?" 며 다섯가지를 꼽아나가는데,
이야기를 듣던 모두가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 후배가 꼽은 [대학교수가 애인으로 좋은 다섯가지]는,
첫째, 대학교수는 비교적 시간이 자유로워 원하는 시간을 맞추기가 용이하다.
둘째, 교수이므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아무래도 주워듣는 이야기가 있다.
세째, 일단 시작하면 50분은 한다.
네째, 10분간 쉬고 속강이 가능하다.
다섯째, 정 시간이 안나면 조교를 내신 보내기도 한다.

다섯가지 중 중간 이후는 성적인 늬앙스가 포함되어 있고, 그 자리에는 여성도 있었지만,
얼굴을 붉히거나 불쾌한 기색을 보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유쾌히 웃었을 뿐이다.

  
한 국회의원이 대학생들과 식사 중에 했다는 말로 인해 대한민국의 인터넷과 언론이 연일 뜨겁다.
국회의장배 대학생 토론대회의 심사위원이었던 그가 한 말 중에 문제가 된 부분은 대략 세가지다.
- 심사위원들은 토론내용보다 얼굴을 본다. 토론 조 편성시 못생긴 애 두명에 예쁜 애 하나를 끼면 이상적이다.
  그럼 그 애에게 집중이 잘되기 때문이다.
- (아나운서를 희망한다는 여학생에게) 아나운서를 하려면 다 줘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느냐?
- (청와대를 방문했던 여학생에게) 대통령이 너만 보더라. 남자는 다 똑같다.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
  사모님만 안계셨다면 네 (전화)번호를 땄을 것이다.

정말 누가 들어도 한심한 이야기다.
더구나 대통령까지 언급한 부분은...  이걸 뭐라 평해야 할지. 당장 네티즌들이 난리가 났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여대생 전화번호나 따는 사람으로 만들어놨으니..." 라는 답답하다는 표현부터,
"그 국회위원이 대통령과 시돈간이라던데, 그렇다면 평소 취향을 다 알고 있다는건가?" 라는 비아냥까지.
역대 국회의원 최고의 망언으로 규정지은 한나라당도 사안의 심각성 때문인지 언론보도 당일
바로 제명이라는 중징계를 결정했다 한다.

당사자는 기자회견을 통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며, 정치생명을 걸고 시시비비를 가리겠다고 했지만,
그 자리에 함께 했던 대학생들의 증언은 언론보도가 사실인 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상황이다.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성희롱이나 특정 계층에 대한 비하발언 등 언어폭력이 문제가 되는 경우,
일단 부정을 하고, 사실관계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면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 사석에서 나눈 이야기라고 한다.
위에 문제가 된 국회의원도 그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토론대회라는 공식행사가 끝나고,
편안하게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나온 농담이라고 하고 싶겠지.

그래서 [사석]이라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봤다.
사석(私席)은 단어 그대로 사사로운 자리다. 국어사전에도 '사적인 모임의 자리' 라고 정의하고 있다.
공식행사 후에 있은 식사는 사적인 자리가 아닌, 공식행사의 연장이다.
공식행사 후의 자리가 아니더라도 국회의원과 대학생의 모임 자체가 사적인 자리가 될 수 없다.
요즘 트위터가 유행하면서 트위터를 통해 각종 번개모임이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런 모임도 엄밀히 말해 사적인 모임이라고 하긴 어렵다.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이 서로 마음을 열 수 있는 친분관계가 형성되어 있어야 사사로운 자리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말을 함에 있어서도 격식을 갖추는게 예의라고 생각한다.

서두에 우리 모임에서 후배가 한 이야기를 언급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저 이야기를 평소 격의없이 지내는 모임에서 했기 때문에 모두가 유머로 받아들인 것이지,
만약 그 후배가 여학생이 함께 한 자리, 혹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회에서 강의 도입부에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의도로 저런 이야기를 했더라도, 당초 의도와 관계없이 충분히 비난의 소지가 있다.

그 국회의원의 말 중에 맞는 말도 있다.
일반적인 남자들 대부분이 예쁜 여자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여성들 역시 멋진 남성에게 호감이 갈 수 있다.  마음이 가는거야 감정이고 심리적인 것이니 탓할 수 없다.
문제는 느끼는 감정과 말로 표현하는건 다르다는거다. 느끼는 감정을 모두 표현할 수는 없다.

때와 장소를 가려 품고있는 마음을 밝히거나 행동하는 것 - 그게 이성이고, 사람의 인품을 평하는 척도가 된다.

또 하나, 내게 거슬리는건 그 국회의원의 말투다.
보도된대로라면, 그 국회의원은 대학생들에게 "너" 라는 호칭을 사용한거 같다.      
우리 부부는 여지껏 어디를 가더라도 아무리 어려보이는 종업원들에게 반말을 해본 적이 없다. 
"아가씨~ 미안하지만 야채좀 더 줄 수 있어요?" 이런 식이다. 구순을 바라보시는 우리 부모님도 그러신다.
그런데, 이제 갓 마흔을 넘은 초선의원이 벌써부터 그런 말투를 보인다면, 잘 나갈수록 더하지 않겠는가.
상대방에 대한 호칭이나 말투에는 그 사람을 대하는 인식이 깔려있게 마련이다. 


성적인 내용이 담겼다고 해서 모두 성희롱이 되지는 않는다.
한때 강남에 [코미디클럽]이라는 곳이 있었다. 개그맨들이 평소 방송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섹스를 소재로 한 개그만을 하는 곳이었는데, 상당히 농도짙은 내용이 많았음에도 고객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뭐.. 농도짙은 내용이 많아서 반응이 뜨거웠는지도 모르지만..)
일반 모임에서도 성을 소재로 한 이야기는 때로 분위기를 띄우는 유머로 호평을 받기도 한다.

하이조크가 되느냐, 성희롱이 되느냐는 모임의 성격, 대상, 그리고 분위기에 따라 달라진다.
산업훈련용어 중에 [래포]라는 용어가 있다. 공감대라고 이해하면 되는데, 함께 느낄 수 있다면 모든게 이해된다.   
문제는, 내가 느끼는걸 모두가 느끼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다. 그걸 구분하는게 분별력있는 이성이다.

그 국회의원에게는 분별력이 부족했다.  그리고, 우리도 교훈을 얻어야 한다.
다시는 그런 정치인이 민의의 대변자가 되지 않도록 우리도 분별력을 키워야 한다.
:

정부에서는 각종 경제지표를 들며 경기가 풀리고있다고 한다.
출구전략이라는 용어가 심심치않게 흘러나오고 있음에도, 
이상하게도 경기가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가 않는다.

얼마 전에는 기준금리가 올랐다.
여러가지 경제여건을 감안한 필요한 조치였을거라 생각하면서도 서민들의 마음은 무겁다.
부동산시장이 더 얼어붙은 것은 물론, 금융부담이 커지며 서민들은 지갑 열기가 더 어려워졌다. 
그러면서 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업종들도 덩달아 타격을 받고 있다.
서민들의 악순환 도미노현상이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몇가지 현상,
이것을 서민경제징후라고 해도 될런지 모르겠지만, 서민들이 공감하는 몇가지를 보자.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이 의례적으로 나누는 인사말을 보자.
"요즘 하는 일은 어때?" 라는 질문을 받으면, 보통 "그저 그래.." 혹은 "맨날 그렇지 뭐.."
이런 대답이 흔히 나오는데, 이 말도 사실 잘 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건 다 안다.
단지, 모든게 어차피 자기 몫이라는 생각에 자존심 상 어려운걸 직설적으로 보이기 싫은거다.
하지만, 요즘엔 그런 말 조차 안들린다. 요즘 듣는 이야기는 "어렵지 뭐.." 다.
자존심을 앞세울 만큼 마음이 편치않다는 얘기다.


예전부터 내려오는 얘기.
경기가 안좋을 때 여성들의 스커트가 짧아진다는 이야기. 
옷의 원가를 줄이기 위함인지, 혹은 요즘같이 더울 때 냉방비를 줄일 방법이 없어
조금이라도 몸에 걸리적거리는걸 줄이기 위함인지 몰라도, 요즘 여성들의 옷이 짧아졌다.
치마건 반바지건 모두 엄청스레 짧아진게 단순한 유행 때문일까? 


그리고, 여기 블로그에서 느껴지는 현상.
블로그를 운영하던 분들이 예전같지 않다. 
며칠 전 친구로 등록된 분들을 한번 둘러본 적이 있다. 문을 닫은 분들도 많고,
문을 닫지 않은 문들도 포스팅 활동이 예전 같지가 않은거 같다.
또한, 댓글들도 현저히 줄어들고 있는데, 그런 모든 것들이 무엇을 의미할까.

내 삶이 풍요로울 때, 이것저것 관심가는 것도 많고 경험하게 되는 일도 많아
다양한 이야기거리가 생기는 것이고, 내 마음이 여유로울 때 다른 사람의 글에도
관심을 보이게 되는 법인데, 그게 그렇지가 않으니 글 쓸 소재도 줄어들고,
댓글 달기도 귀찮아지는거라 생각한다.


요즘 나도 그렇다. 
삶이 단조로워지며 삶의 다양성이 줄어들고 있는 느낌이다.
전에는 이것저것 올리고싶은 이야기가 많았고, 단순한 이야기일수록 생각을 집중하려 노력했는데,
요새는 사고의 폭이 좁아지고 생각하기가 귀찮아짐을 느낀다.  마치 땜빵하는 기분이랄까.

때문에 요새는 나도 블로그를 놓고 싶은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
그럼 무척 홀가분할거 같다.  헌데, 그럼에도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뭔지...

아마도 내 블로그를 찾아주는 분들 때문이겠지.
그중에서도 아이들이 가장 큰 이유가 될거 같다.
힘들다고해서 쌓아가는 것을 놓아버리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싫어서.
다른 사람들에겐 별게 아닌 것이지만, 내게는 이 블로그가 내 삶을 쌓아가는 흔적이기 때문이다.    


경기가 좋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서로에게 관심을 표할 정도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면 좋겠다.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라는 표현을 종종 쓰는데,
후회는 없을지 몰라도, 최선을 다 한 다음에 남는건 아쉬움이다.

지난 토요일 밤 전국을 뜨겁게 달군 남아공 월드컵 16강전 한국과 우루과이의 경기가 그랬다.
이기기를 살포시 기대했지만 객관적 전력으로 볼 때 사실 그 기대는 승리에 대한 기원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태극전사들 예상을 뛰어넘어 정말 너무 잘 싸웠다.
먼저 실점 후 경기를 지배하여 동점골을 터트렸기에 후반 34분의 실점은 너무 아쉬웠다.

모든 선수들이 최선을 다했겠지만, 그날 이영표와 차두리의 움직임을 발군이었다.
사력을 다했다는 표현이 이럴 때 필요한 용어가 아니겠는가.
특히, 이영표는 정말 '저러다 죽는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장한 표정으로
전후방을 질주했는데, 아내 역시 이영표의 눈에서 섬뜩할 정도의 광채를 몇번 보았다고 한다. 





차라리 많이 밀리는 경기로 끝났더라면 '그래도 선방했다' 고 생각하고 말 것을,
너무 잘했기에 진한 안타까움이 남는건 선수들 포함한 모든 대한민국 국민이 같은 마음이었을게다. 


이렇게 온 국민을 열광시키고 한마음으로 엮어주던 대한민국의 월드컵은 끝났다.

그런데, 월드컵이 끝까지 대한민국을 하나로 묶은건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월드컵 때문에 점화된 쟁점이 하나 생겼는데,
바로 16강 진출 후 불거져나온 대표선수들의 병역특례문제다.
16강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쟁점의 동력이 약해진거 같지만...

여기서 잠깐 운동선수들의 병역특례 변천사를 보면, 
1973년 스포츠강국의 기치 아래 올림픽,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대회, 아시아선수권대회,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3위 이상을 하면 병역특례를 주었다. 그러다 경기력이 향상되면서 수혜자가 너무 많아지자 1990년에
올림픽은 금 은 동메달리스트, 아시안게임의 경우는 금메달리스트만 해당되는 것으로 강화됐는데,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이루자 월드컵 축구 16강도 특례대상이 되고,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야구가 세계 4강에 오르자, 덩달아 특례 대상에 포함됐다.
하지만, 타 종목과의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면서 2007년에 다시 1990년의 규정으로 되돌아갔다.

병역특례가 없었다면 지금의 박지성이 있었겠느냐가 특례지지론자의 논지다.
박지성이 병역의무를 이행해야 했다면 지금과 같은 기량을 갖춘 프리미어리거가 되기는 어려웠을테고,
그렇다면 이번의 월드컵 16강도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축구가 더 빠르게 도약하기 위해서는
우수한 기량을 갖춘 유망주들이 축구 선진국에서 세계적인 선수들과 함께 어울려야 하는데,
병역특례가 없으면 어렵다는 주장은 분명 틀린 논리가 아니다.

하지만, 그건 축구애호가들의 논리일 뿐 타 종목과의 형평성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당장 작년 WBC 준우승을 한 야구에서도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축구팬들은 축구 월드컵 16강과
야구 WBC 준우승은 가맹국 수와 세계 수준으로 볼 때 가치가 다르다고 하지만, 세계 수준과
한국의 수준을 비교하여 비인기종목을 비롯한 모든 종목의 순위 가치를 정한다는건 어려운 일이다.

월드컵 16강 진출에 병역혜택을 주었을 경우 생기는 또 하나의 문제.

현행 월드컵 본선 대진방식에 따르면 조별로 4개국이 리그전을 벌여 정해진 규정에 의해
상위 2개국이 16강전에 진출하게끔 되어있는데, 이는 경우에 따라 상당한 편차가 있을 수 있다.
즉, 특정 국가가 전패를 하고 나머지 세 나라가 물고물릴 경우 3개국이 2승1패가 되어 골득실에 따라
승점 6점으로 탈락할 수도 있는 반면, 반대로 특정국가가 전승을 하고, 나머지 3개국이 서로 비길 경우에는
2무1패로 승점 2점만으로도 골득실에 따라 16강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 월드컵에서 2무1패로 16강에 올라 병역특례를 받았는데, 그 다음 대회에서 2승을 올리고도
병역특례를 못받는다면 출전했던 선수 입장에서는 이 또한 얼마나 불합리하게 느껴지겠는가.
같은 월드컵 대표선수 사이에도 제도의 불합리에 의한 형평성 논란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


6월 한달 즐겁고 행복한 순간을 맞이했다고 하지만, 월드컵 대표팀의 본선 성적은 1승 1무 2패다. 
아시아 예선부터 긴 시간 애쓴 것은 맞지만, 본선 참가선수들이 올린 승수는 단 1승 뿐이다. 

온 국민들이 일치단결할 수 있는 민족적 자긍심을 주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도록 우수 선수들에게
기량향상을 위한 여건을 만들어주면 좋겠다는 취지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모두에게 납득할 수 있는 제도가 사전에 공지되고 시행되어야지, 
결과를 놓고 분위기에 편승하여 특정인에 의해 즉흥적인 것 처럼 언급되어서는 곤란하다.   
:

아내가 내게 해준 이야기가 있다.
"당신의 문제점이 뭔지 알아요?  항상 위기가 코 앞에 닥쳐야 의사결정을 내리는거.."

정확한 지적이다.
하긴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사람의 눈에 배우자의 문제점이 왜 안보이겠는가.


회사를 다닐 때 주위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이상하게 나는 꼭 코너에 몰려야 그때부터 피치가 오르거든.." 

그랬다. 
기획안을 만들 때도 머리 속에서 윤곽만 뱅뱅 돌다가도 마감기일이 임박하면
그때부터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태하거나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고, 
일찍부터 머리를 쓰는데도, 줄기만 그려질 뿐 구체적인 문안을 못잡다가도,
제출기일이 임박하면 희한하게도 줄줄줄줄 문안이 정리되어 나온다.
그러다보니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못된 습성이 생겼다. 

'그때가면 어떻게 되겠지...' 

아주 위험한 생각인데, 문제는 여지껏 이게 통해왔다는거다.  그리고,
이건 비단 사회생활을 하며 생긴 습관이 아니라, 훨씬 그 이전부터의 문제였다.
 
고3 1학기까지 팽팽 놀다가 여름방학이 끝나고서야 대학갈 생각을 하고는 대학엘 들어갔고,
졸업 후 군에 입대하는 ROTC를 했던 관계로 대학 내내 취업이라는걸 생각해 본 적이 없다가,
졸업 직전 별 생각없이 경험삼아 지원한 입사시험에 합격한게 20년 직장이 되고 말았다.

물론, 고등학교 때 부터 "어떻게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일부러 공부를 미룬건 아니다.
그때야 철이 덜 들었기 때문에 뒤늦게 깨인거라고 해야겠다.
나중에 돌아보니 이런 축적된 경험(?)까지 떠오르면서 [어떻게 되겠지]란 
낙관적인 사고가 굳어진게 아닌가 생각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 자신 이런 나의 사고가 바람직스럽지 않다는걸 안다. 
'이러다 된통 한번 당해봐야 내가 정신차리지..' 오죽하면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하겠나.


사람의 습관이란게 무서우면서도 이상한게,
스스로 문제점을 알면서도 고치지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렇다. 점점 굳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고쳐지지 않는 습성을 의식하면서 문제라고 스트레스를 받느니, 관점을 바꿔보자는거다.
타성에 젖은 듯 한 [어떻게 되겠지]란 습성을 [닥치면 되더라]는 자신감으로 생각키로 했다.

그래..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라서 정리가 안되고 있을 뿐,
해야 할 때가 오면 기민하고 꼼꼼하게 나의 뇌는 반응할거다.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 처럼.  그러니, 서두르지 말고 기다리자. 

이렇게 생각을 바꿀 수 있는건 [어떻게 되겠지]라는 의미가, 
여러 생각을 했음에도 명쾌하게 만족스러운 결론을 내리지 못했을 뿐,
정말 아무 생각도 없이 미루기만 했던게 아니라는 확실한 경험 때문이다.
때로는 우유부단했거나 생각하고싶지 않았던 경우도 물론 있기도 했겠지만..

어찌됐든, 당장 도출되지 않는 결론에 조급하게 집착하지 말고,
이런저런 경우에 대해 생각을 계속 하다보면 결정을 해야할 시점에 생각이 정리될 수도 있고, 
생각이 복잡할 경우 아예 잠시 잊고있다보면 의외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한다는 경험에서,
[어떻게 되겠지]를 내 나름의 문제해결방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꾸준히 생각한다는 전제하에. 





늘 어떻게 된다는건, 보이지않는 힘의 도움인지도 모른다.

:

재원이와 통화 중에 이런 말을 들었다.
"아빠.. 여기 애리조나州 이민법이 강화돼서 유학생이 알바를 하다 걸리면 큰일나.."
처음엔 "어~ 그래? 조심해라." 그러고 말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재원이에게 물었다.
"직장인이 대학 다니면 안되냐?  기업체에서 꼭 졸업생만 채용하란 법 없잖아."

유학비자를 가지고 취업을 하면 불법이지만, 기업체에서 필요한 인력이라 판단하여
취업비자를 받을 수 있다면, 취업 후 대학을 다녀도 되지않느냐는 얘기다. 
순서만 바뀌었을 뿐, 엎어치나 메치나 마찬가지라는 얘기.


우리는 가끔 편견에 빠져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편견은 자기만의 편견인 경우도 있고, 사회적 편견일 수도 있다.
얼굴이 둥근 사람은 성격이 좋을거 같고, 반면에 갸름한 사람은 날카로울거 같다든지,
요즘은 많이 옅어졌지만, 남성의 판단력이 여성보다 우월할거라는 생각 등이 예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그런 편견이 뒤집어보면 전혀 다른 느낌이 된다.

우스운 얘기지만, 여대생이 야간에 술집 종업원으로 일한다면, 일반적인 시선은 부정적이다.
여대생이 왜 술집엘 나가느냐.. 날라리 여대생 아니냐.. 등등 비난의 시선으로 본다.
하지만, 술집에 나가는 아가씨가 낮에 대학엘 다닌다고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얼마나 공부를 하고싶으면... 참 생활력이 강하네.. 등등 온정적인 시선으로 바뀐다.
낮에 공부하고, 밤에 술집에서 일하는건 똑같은데도 말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하나의 단면만 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인 줄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같은 것을 보고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것을 본 것처럼 이야기하고,
그게 결국 논쟁으로 발전하여 갈등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이 그림을 보고 색소폰부는 남자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있고, 여성을 먼저 보는 사람도 있다.
보통은, 설명을 하면 이해를 하게 되는데, 간혹 끝까지 다른 한면의 모습을 찾지못하는 사람이 있다.
재밌는건, 그런 사람들에게 반대로 보여주면 금방 "아~" 하고 이해를 한다는 것.

    

이렇게 그림을 좌우를 뒤집어 보여주면 바로 여자를 본다.
항상 왼쪽에 치우쳐 보는 습관 때문이다.  물론, 반대로 오른쪽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반면에, 검정음영이 강하게 각인되어 흰부분의 이미지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사람마다 각기 다른 시각이나 직관이 있게 마련인데, 이걸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직관만을  주입시키려는 경우 독선이 되는 것이다. 







전혀 다른 그림같은 두 그림은 위아래 방향만 뒤집어놓은 똑같은 그림이다.

하지만, 같은 그림을 마주보고 앉은 사람의 중간에 올려놓으면, 이렇듯
한사람은 나이 든 노인의 모습만, 그리고 맞은 편 사람은 젊은 청년의 모습만 기억에 남게 된다.


마주한다는게,
상대의 얼굴은 명확히 볼 수 있을지라도, 그렇다고 생각마저 명확히 읽을 수 있는건 아니다.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나, 처지를 이해할 줄 아는 배려심이 없다면,
내 생각만이라도 뒤집어보려는 노력을 하자.


요즘 말 많은 4대강 사업을 보면 참 답답하다.


:

아주 오래 전, 20대 후반에 들었던 강연이 생각난다.
적극적 사고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당시 강사가 몇가지 질문을 던지며 강의를 풀어나갔다.

- 여기 과일이 다섯 개 있습니다. 맛있는 과일부터 먹겠습니까, 맛없는 과일부터 먹겠습니까?

그 강사가 바람직한 모델로 제시한건 맛있는 과일부터 먹는거였다.
맛 있는 것부터 먹는 사람은, 항상 남아있는 것 중 맛 있는걸 골라 먹게 되니 늘 맛있다는 생각으로 과일을 먹게 되지만,
맛 없는 것부터 먹는 사람은, 늘 맛 없는걸 고르게 되니 맛 없는 것만 먹게 된다는거다.
요는, 전자는 항상 긍정적으로 사물을 보지만, 후자는 늘 부정적인 요소를 보게된다는 것.

또 하나의 질문은, 컵에 물이 반만 있을 때, 반 밖에 안남았다고 보느냐, 반이나 남았다고 보느냐  인데,
이 역시 반 밖에 안남았다는 생각은 소극적인 생각이고, 반이나 남았다고 생각하는건 적극적인 사고라는거다.

같은 현상에 대해서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늘 밝고 희망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게 강의의 요지였다.
그때는 그 말이 참 멋있게 들렸다. 
'맞아~ 모든건 생각하기 나름이야..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살자.'


그런데, 과연 그럴까??

모든건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는걸 살면서 느끼게 된다.  이런걸 삶의 경륜이라고 하나보다.
(내가 경륜이 있다는건 아니고...).  원통은 위에서 보면 원이지만, 정면에서 보면 곡면의 사각형인 것 처럼.

앞에 언급한 강사가 던진 예화를 뒤집어보자.

맛 있는 것부터 먹는 사람은 계속 맛있다는 생각으로 먹게 된다는 것은, 정신을 그렇게 세뇌시키는 것일 뿐,
사실은 남아있는 것 중에서 맛있는걸 먹는 것이다.  미각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전에 먹은거에 비해
점점 맛이 없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리고 남아있는걸 보면서 '저건 더 맛이 없을텐데..' 하며 점점 먹기가
싫어지지 않을까?  반대로, 맛 없는걸 먼저 먹는 사람은 먹을수록 점점 좋은 맛을 느끼며 자꾸 먹고싶어질테고. 

눈 앞에 보이는 이익을 쫒을 것인가,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미래를 볼 것인가? 
같은 사례를 이렇게 풀어도 훌륭한 예시가 된다.  물론, 아끼다 똥 된다는 우리 속담도 있으니,
실제로 뭘 먼저 먹느냐는 각자가 상황에 따라 알아서 판단할 일이다.

반잔의 물컵도 그렇다.
반이나 남았다고 생각하는게 긍정적인 사고로 볼 수도 있지만, 위기에 대한 대응능력이 늦다고 볼 수도 있고,
반대로, 반 밖에 안남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오히려 매사 사전 준비가 철저한 사람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학창시절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시험준비 하는걸 보면 각기 공부하는 순서가 다르다.
어려운 과목이나 범위가 많은 과목을 먼저 손대는 학생이 있는 반면, 쉬운 과목이나 범위가 적은 과목부터
끝내버리는 학생도 있다.  각자의 공부 스타일에 따라 다를 뿐, 어떤게 바람직한 방법이라 판단하긴 힘들다.

물건을 살 때도 사람마다 구매기준이 다르다.
브랜드를 우선하는 사람이 있고, 실용성에 우선하는 사람이 있다.
한 벌을 입더라고 고급 옷을 아껴 입는 사람이 있으면, 같은 가격으로 여러 벌을 구입해 다양하게 입는 사람도 있다.
열가지 장점이 있다면 한두가지 단점은 묵인하는 사람이 있고, 아무리 장점이 많아도 자기가 불편한 단점 하나 때문에
구매를 포기하기도 한다.  이건 사람을 기용할 때도 그렇다.
사람의 장점을 보고 쓰는 사람도 있지만, 단점을 보고 배제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가끔 이런 말들을 한다. "도대체 왜 저럴까..?  정말 이해가 안되네..."
나의 기준으로 나와 다른 기준을 가진 사람을 보면 이해가 안되는게 사람이다. 

역지사지라고 굳이 이해가 안되는걸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모든 사고나 행동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꼬맹이도 그렇더라.

금과옥조라고 다 좋고 올바른건 아니다.  모든건 생각하기 나름이고, 마음먹기 나름이다.





:

지방선거가 끝나고 인터넷엔 느닷없이 뜨거운 논쟁 하나가 불붙었다.
선거 전 20% 격차까지 뒤쳐졌던 여론조사결과와 달리 민주당 한명숙 후보가 예상 외로 선전하여
한나라당 오세훈 후보에게 불과 27000표에 조금 미달하는, 그야말로 석패를 당하자,
한 후보 지지자들로부터 진보신당 노회찬 후보에게 패배의 책임을 물은게 논쟁의 발단이 됐다.

즉, 경기도에서 같은 진보신당의 심상정 후보가 선거 막판 후보사퇴를 통해 국민참여당의 유시민 후보를
야권 단일후보로 하여 한나라당 김문수 후보와 1:1 대결구도를 만들었듯이, 노회찬 후보도 후보사퇴를 했다면
한명숙 후보의 당선이 가능했고, 그런 맥락에서 노회찬 후보의 책임이 크다는게 한 후보 지지자들의 논리다.

반면에, 노회찬 후보 지지자들의 생각은 다르다.
당초 노 후보 지지성향의 유권자들이 더 있었으나, 그 중 상당수가 사표방지를 생각하며
한 후보에게 투표를 했기 때문에 빠져나갈 표는 이미 빠져나갔으며, 오히려 그로인해
노 후보에 대한 지지도가 실제보다 저평가된 것도 억울한데, 패배의 책임까지 씌우는건
얼토당토않다는게 노 후보 지지층의 항변이다.

하지만, 한 후보 지지층은, 그런 논리를 어느 정도 인정한다 하더라도, 
만약 노 후보가 사퇴하여 야권통합을 이뤘더라면, 분명 결과는 달라졌을거라고 주장한다.



노회찬 후보의 득표수가 14만표를 상회했으니, 만약 노 후보가 사퇴를 했다면,
노 후보 지지층의 실망에 따른 기권표와 무효표를 감안하더라도, 오세훈 후보에게 뒤진 27000표 정도는
한명숙 후보로의 전환이 충분히 가능했을거라는 판단에 한 후보 지지층의 아쉬움은 더 컸을 것이다. 


투표행위는 지지대상과 지지유형에 따른 두가지 가치기준에 기인하여 이루어진다.
지지대상으로는 정당을 우선하는 경우와, 사람을 우선하는 경우로 구분이 되고,
지지유형은 적극적 지지와 견제로 나뉘어지는데, 지지하는 대상에 적극적으로 투표하는 것과,
반대하는 쪽을 이길 수 있는 대상에 투표하는, 즉, 저쪽만 아니라면 누가 되든 좋다는 논리다.

그런 기준으로 지난 서울시장 투표행위를 구분해보면 다음과 같은 유형이 나온다.

먼저, 오세훈 후보에게 투표한 사람의 유형이다.
- 오세훈 후보에 대한 지지보다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유형.
- 한나라당보다 오세훈 후보에게 끌리는 유형.
- 여당에 대한 지지도보다 야당에 대한 비토심리가 더 큰 유형.    

반대로, 한명숙 후보에게 투표한 사람의 유형도 비슷하다.
- 한명숙 후보보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유형.
- 민주당보다 한명숙 후보에 대해 호감을 갖는 유형.
- 야당에 대한 지지보다 여당에 대한 견제심리가 더 큰데, 기왕이면 경쟁력있는 후보를 밀어주자는 유형.

한명숙 후보 지지층이 노회찬 후보 지지층에게 아쉽게 생각하는건,
공동의 맞수에 대해 왜 이 세번째 논리를 생각하지 않았냐는거다.

하지만, 아쉬운 마음에 한번쯤 되물을 수는 있지만, 그 이유만으로 노회찬 후보 지지자들이
올바르지 못했다고 추궁하는건 그들의 주권선택에 대한 결례라고 생각한다.

노회찬 후보의 입장에서 판단해보면, 진보신당의 공동대표인 심상정 후보가 이미 경기도지사 후보사퇴를
선언한 마당에 노 후보마저 서울시장 후보사퇴를 한다면, 그건 공당의 존재의미가 무색해진다.
더구나, 오세훈 후보와 한명숙 후보간의 지지율에 큰 차이가 없었다면, 대의라는 명분이라도 있지만,
두 사람의 표를 합하더라도 오세훈 후보와 큰 격차를 보인다면 명분도 실리도 없는 행위일 수 있다.
공당의 대표로서는 쉽지않은 선택이다.

노회찬 후보의 말대로, 한명숙 후보 진영에서도 후보단일화에 대한 의사표시가 없었다면,
한 후보 진영에서도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했을 지도 모르고, 결국 그런 이른 패배의식(?)이
잡을 수 있었던 구명줄을 스스로 놓아버린건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이제 모든 사람들이 현실을 현실로 인정해야 한다.
패자는 판세를 면밀히 읽지 못하고 끝까지 최선의 수를 살리지 못했음을 반성해야 하고,
승자는 왜 당초 예상과는 달리 힘든 승부가 됐는지를 반성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세훈 후보의 "사실상 패배였다고 생각한다." 는 당선소감은 오히려 신선하다.

또 이번 선거결과로 기대되는게 있다.
지난 서울시는 시장과 시의회, 그리고, 구청장까지 일당 독식이었다. 때문에 견제라는건 없었다.
만약 이번에 한명숙 후보가 서울시장이 되었다면, 앞으로의 서울시도 거의 견제가 없을 뻔 했다.
하지만, 이제 서울시는 그렇게 돌아가진 않을 듯 싶다.

견제는 조화를 통한 상생을 낳을 수도 있고, 부조화로 인한 공멸로 갈 수도 있다.

어느 길로 나아가느냐... 
우리나라 정치행정의 새로운 모멘텀이 될 시기에
우리 유권자가 선택한 선량들이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들이길 기대해본다.  
:

지연이가 사용하던 휴대폰을 출국하기 전 휴대폰 중고매매사이트에 매물로 내놓았다.
케이스를 교체하는 등 기기 전체에 대한 A/S를 마쳐 나름 수령인에게 폐를 끼치지않으려 노력을 한거 같다.

지연이가 출국하기 전까지 구매에 대한 연락이 없어 연락처를 나로 변경해 놓았는데,
출국하는 날 부산에 산다는 여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하도 온라인거래에 대한 피해사례가 많아
안전거래를 했으면 한다는 제안에, 거래절차가 좀 귀찮아 내 블로그 주소를 알려주니,
믿고 보내겠다며 통장으로 선입금을 시킬테니 택배로 보내달란다.

문제는 택배비. 직거래가 아닌 이상 택배비 부담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거래경험이 많은 사람은 판매물을 올릴 때 아예 택배비 부담원칙을 미리 명기하곤 한다.

"지연이가 택배비 부담에 대해 명기 했나..?  어째야 하나..??"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더니,
집사람이 바로 한마디 한다. "어른인 당신이 부담해야지."

오랜 사회생활로 늘 계약의 원칙에만 매달려 생각하는게 무의식의 버릇이 된 나에게
집사람의 한마디는 정수리에 침을 맞은거 같은 느낌을 주었다.

쪼잔함..  그랬다.  왜 나는 대범하지 못하고 작은 거에 이리 연연할까...
스스로 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에 그 이야기를 들은 동생이 그런다.
"그건 쪼잔함의 문제가 아니고, 온라인거래의 하이라이트는 택배비를 누가 부담하느냐로 흥정하는건데,
 그 재미를 너무 일찍 포기하셨군요.^^"   거래 재미의 일환으로 생각하는 동생의 말도 일리는 있다.
그런데, 재미로 흥정을 즐기기에는 그 여학생의 목소리가 너무 앳됐다. 

휴대폰을 수령한 여학생이 문자가 왔다.
[휴대폰이 완전 새거라서 너무 맘에 듭니다. 택배비까지 부담해주셔서 고맙고요.]

4000원에 이렇게 흐뭇할 수가 있는데 그걸 고민하다니...  에이~ 속알머리하고는... 




사람들의 생각은 참 이기적이다.  모든걸 자기중심으로 자기 편한대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누구와 함께 식사를 했을 경우,

만약 둘이 라면을 먹어 식사비가 5000원이 나왔다면 상대방이 식대를 내더라도
방관할 수 있다.
얼마 안되는 금액이니 그 정도는 상대방이 내더라도 별로 부담될게 없다는 생각에서다.

그런데, 둘이 좀 비싼 음식을 먹어 비용이 50000원이 나왔다면, 상대방이 식대를 낼 때 방관하고 싶어진다.
금액이 좀 커서 내가 지불하기엔 다소 부담되는 금액이기 때문이다. 

얼마 안되면 남에게도 부담이 안된다는 생각에, 금액이 만만치 않으면 내가 부담스럽다는 생각에,
결국 동일한 행동결과를 보이게 되는게 사람들의 일반적인 행동양식이다. 
경제력의 차이에 따라 부담되는 금액의 기준은 다를 수 있지만,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얘기다.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뻔뻔할 자신이 없다면,
스스로 찜찜한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할텐데...
 

:

요즘 언론보도의 초점은 백령도에서 침몰한 해군 초계함에 대한 소식이다.
그런데, 침몰된 초계함에 대한 보도를 보며 몇가지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다.

생각나는대로 몇가지를 추스려보면,

우선, 어제 밤 TV를 보는 도중 TV하단에 자막이 흐른다.
해군에서 민간인 탐색전문가와 탐색장비 지원을 바란다는 내용이다.
그걸 보는 순간, 정말 기가 막혔다.  이건 정말 젊은 사람들 표현으로 어이상실이다.

대한민국 국방수준이 이 정도 밖에 안되나?? 
도대체 대한민국 해군은 평소에 얼마의 병력으로 어떤 훈련을 하고 있길래
초계함 한 척 침몰에 민간인에게 구원의 손길을 요구하는건가.
그렇다면 전시에서는 아무 대책이 없다는거 아닌가. 
초계함 침몰의 심각성을 무시하는게 아니라 그만큼 군의 현실이 한심해서 하는 소리다.
이건 도대체 군이 국민의 안전을 보호하는건지, 국민이 군의 안전을 보호하는건지 알 수가 없다.

하긴 우리나라는 외환 위기에서도 국민이 금 모으기로 위기를 이겨냈고,
서해안 기름유출 사고 시에도 국민이 기름을 걷어냈다.
이렇게 큰 일만 터지면 국민이 나서 문제를 해결하는게,
그 옛날 국란 때 마다 의병들이 나선 전통에 의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문제는 그렇게 국란 때 마다 나서는 사람들이 대부분 민초라는 사실이다.

뉴스를 들어보면 이번 사태가 벌어지고나서 청와대 지하벙커에서는 하루에도 몇번씩 
대통령 주재의 국가안보회의가 열린다고 한다. 그런데, 트위터에 이런 내용이 올랐다.

지금 안보 회의 구성원이 이런 모양. 이명박 (면제) 총리 정운찬 (면제) 국정원장(면제)
여당 원내대표(면제) 보좌관 강만수 (면제) 재경장관 (면제) 국토해양장관 (면제)
환경장관 (면제) 법무장관 (면제) 대통령 실장 (면제) 국방차관(면제)

정부 주요 고위직, 그것도 국가안보를 논하는 자리의 구성원 중 자그마치 11명이 군 면제란다.
여든이 넘으신 어머니도 그러신다. "면제동호회인가 보다." 고.
집사람도 그런다. "아예 군대 갔다온 사람은 처음부터 뺐나.."
처음부터 군필자를 일부러 빼지야 않았겠지만, 그렇다면 사실 더 심각한 문제다.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수 있는 계층에서 랜덤하게 고위직을 발탁했는데, 이렇게 면제자가 많다는건
대한민국의 지도층이 노블리스 오블리제와는 거리가 멀다는거 아닌가. 

민간인 탐색장비 지원을 기대한다는 것도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군 현대화]라는 말은 귀가 따갑게 듣는 말이다.  그리고 매년 막대한 국방예산이 투입된다.
물론, 군장비라는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비용으로 해결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걸 안다.
빡빡한 예산에 용처는 또 얼마나 많겠는가.  그렇더라도 탐색장비를 민간인에게 의존한다는건
도무지 이해가 가지않는다. 정말 그 정도 수준이라면 묻고싶다.

국가안보와 4대강 중 어떤게 우선인가?
차라리 4대강사업 예산으로 의무적으로 군에 가야하는 우리 젊은이들이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며 
소중한 생명을 잃지않도록 군 안전대책에 먼저 투입하는게 맞는게 아닌가?
그리고, 이런 현실에서 대통령 전용기 운운할 수 있는가? 



안보대책회의도 그렇다.
뉴스를 보면 아직 사고의 원인 등 아무 단초도 찾지못하고 있는데,
도대체 그 안에서 하루종일 무슨 얘기들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실 이번 사고가 안보장관회의 안건이 되는건지도 모르겠다.

초계함이 침몰됐다. 북한은 의외로 조용하다. 뛰어난 정보력을 보유한 미국이나 일본도 조용하다.
만약 북한에 의한 국가안보와 관련된 사항이라는 징후가 티끌만치라도 포착되었다면 미국이나 일본이
저리 침착하게 있을리가 없다. 우선 지리적으로 가까운 일본부터 비상이 걸리고 난리가 났을거다.
그렇다면 일단은 우리나라에 국한된 돌발사고라고 보고 침착하게 대응하고 조치하는게 옳다.

그런데, 왜 전 공무원에 비상을 거는지 모르겠다.
뉴스화면에 나타나는 청와대 지하벙커의 회의 모습을 보면 마치 준전시상황인듯 하다.
또 새로운 사실이 전혀 없는 뉴스특보가 시간마다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 


참으로 불행한 사고다. 
가족들의 비통함을 모르는게 아니기에, 그분들의 마음을 가벼이 생각하는게 아니다.
그러기에 더 진중하고 신속하게 사후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당국이나 언론이 본질보다 모양만 놓고 떠들어 대는거 같아 안타깝고 씁쓸하다.

최근 집권층 인사들의 연이은 말 실수와 구설수로 지방선거를 앞둔 정부 여당이 뒤숭숭하다.
혹여라도 이번 참사가 그런 것들과 연계되어 다루어지지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국민을 위한다는 정치인들의 진심을 알 수 없기에 하는 소리다.
:

법정스님이 돌아가셨다.

작년 김수한 추기경님의 선종과 함께 법정 스님의 입적은
종교의 유무와 종파를 떠나 많은 이들을 슬프게 한다.

서로 다른 종교를 이해하고 인정하시는 모습을 보여온 두 분의 공통점은 상당히 많지만,
핵심은 허례와 소유에 대해 무심하신 진솔한 평상심이 아닐까.
두 분은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혼탁한 시대 정신의 길잡이셨다. 


법정 스님을 대표하는 단어 [무소유].
스님께서는 이렇게 어렵지않은 잔잔한 말로 잔잔한 감동을 건네주신 분이다.

법정 스님께서는 돌아가시면서 자신의 저서를 더 이상 출간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한다.
다비식 후 사리를 별도로 추리지 말고 유골과 함께 파쇄하라는 말씀과 더불어 음미해보면,
사바에 당신이 다녀가신 흔적을 남기고싶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흔적을 남기는 것 조차 소유라고 생각하신건지...


꼭 상업적인 의도가 아니더라도, 추모의 의미를 갖는 법정 스님 저서 기획전이
있겠거니 생각하고 지난 주말 강남교보문고를 들렀다.

그 분의 저서가 몇 권 있긴 하지만, [아름다은 마무리]라는 저서를 구입하기 위함이었는데,
예상 외로 서점에 그런 분위기는 없었다.  하지만, 이유가 있음을 아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거의 모든 책이 이미 남아있지가 않다.
각 저서마다 타 영업점 재고 확인를 해도 마찬가지다.

스님의 저서를 출간한 출판사들도 깊은 고민에 빠져있다고 한다.
스님의 유지를 받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분의 향기로운 삶과 생각을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때문에...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이유에서라도 출판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출판이 안된다면 희귀성 때문이라도 해적판이 나돌텐데, 정상적인 방법으로 출판을 하여
그 수익은 좋은 의도로 쓰이면 되지않겠는가.

이렇게 조기에 그 분의 저서가 품절되는 현상이 희귀성을 의식한 사재기라고 생각치 않는다.
그만큼 존경받는 삶을 사셨기 때문에 그 분의 정신을 간직하고픈 마음 때문이리라.  

   
서른하나의 나이에 요절한 여류시인 전혜린의 詩句가 생각난다.
"떠나는 뒷 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싶다."

참되고 진솔한 삶은 아름다운 뒷 모습을 남긴다는걸 다시금 깨닫는다.
:

2007년 가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사건(?)이 일어났다.
검사출신으로 삼성그룹의 법무팀장을 지냈던 김용철 변호사가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도움을 받아 양심고백이라는 방식으로
삼성그룹의 비리에 대해 입을 연 것이다.

정권말기에 삼성특검이 도입될 정도로 엄청난 파괴력을 가졌던 이 사건은,
그러나, 외형상 김용철 변호사와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완패(?)로 정리가 됐다.
그리고, 김용철 변호사나 삼성에 대한 그 많던 말들도 시간의 경과와 함께 잠잠해졌다.
한국 사회와 그 구성원을 이루는 많은 사람들은 대체로 그 결과에 이의가 없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세인의 관심에서 잊혀지며 세월 속에 묻혀가는가 싶었는데,
어느 날, 광고나 소문도 없이 한 권의 책이 서점 진열대에 놓여졌다.





양심고백을 했던 주인공 김용철 변호사가 2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 책을 낸 것이다.

안그래도 그 이후의 일이 궁금했다.
삼성의 모습이야 비록 겉핥기지만 언론을 통해 비춰지고 있지만,
김용철 변호사와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은 그 후 어떤 생각을 갖고있었는지...

책은 생각보다 두툼했고, 책 값도 평균적인 가격보다 비싼 편이다.
두께만큼 원가가 많이 들었기 때문인지, 아님, 이 정도 가격이라도
구매욕구를 자극할거라 생각했기 때문인지 그것까진 알 길이 없다.


처음 눈길을 끈 것은 제목 바로 밑의 [변호사 김용철 씀]이라는 문구.
표지의 저자명은 이름만 표기하고 내지에 저자 약력에 대해 언급하는게 대개의 경우인데,
굳이 [변호사 김용철] 이라고 표지에 밝힌 속 뜻이 있을 법 하다.
그만큼 책의 내용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이 아닐런지. 
사실관계에 대한 법적 책임에 대해 자신있으니 내 말을 믿어달라는...


몇 차례에 걸쳐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이라는 기자회견이 이어지던 당시
세간에는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는데, 여론의 흐름은 "김용철은 배신자" 였다.
세인들은 김용철 변호사에 대해, 양심고백의 내용이 부분적으로 옳다고 치더라도,
온갖 호사를 누리며 자신이 몸 담았던 조직을 배신하고 과거의 동료를 헐뜯는 행위는 
파렴치한 것으로 낙인 찍어가고 있었다.
   
김용철 변호사와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 제기한 삼성과 일부 검찰의 비리에 대한  
삼성특검의 조사 결과와, 이어진 사법부의 판결은 그런 세인들의 생각을 대의로 만들어 주었고,
"이 시대 법과 정의는 재벌권력 앞에 실종됐다" 는 김용철 변호사와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외침은,
있을 수 있는 옥의 티를 침소봉대하여 남을 과하게 무고하다 실패한 사람들의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았다.


[삼성을 생각한다]에는 '정말인가?' 할 정도의 충격적인 내용이 많다.
20년간 높은 도덕성을 요구받으며 삼성에서 생활을 했던 나이기에 그 충격이 더 했는지도 모른다.

이 책에 담겨있는 내용의 진위여부를 논할 생각은 없다.
진위를 판가름할 그 어떤 근거도 나에게 있지않기 때문이다.

다만 한가지, [배신]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많은 사람들은 김용철 변호사에게 배신을 했다고 비난했다.
김용철 변호사는 책 말미에 배신이라고 일컬어진 본인 행동의 정당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배신의 대상이 된 집단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과 처한 여건에 따라 배신의 의미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변론과 같았다. 

그 부분은 김용철 변호사의 자기 주장이라고 치더라도, 그렇다면 그 외 집단의 배신은 없었는가?
언론과 법과, 지성인이라 일컫는 많은 사람들을 포함한 여론은 정의를 배신하지 않았는지 묻고싶다.
정의라는게 너무 추상적이라면, 혼미한 시대에 언론과 법에 의해 사회질서의 방향성을 찾고자 하는
국민들을 배신한 일은 없는지 묻고싶다.


삼성의 창업자이신 호암 이병철 회장 탄생 100주기 기념행사에서 호암의 경영철학 중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건희 회장은
"모든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다" 며  "거짓말 없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고 답했다고 한다. 
아울러, 한국 경제가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 "솔선수범이 필요하다." 고 언급했다고 한다. 

한국사회에 가장 영향력있는 리더로서,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에게 닮고싶은 기업인 중의 한사람으로서, 
부끄럽지않은 허언이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아울러, 자부심과 함께 젊음을 삼성에서 보냈던 사람으로서,
삼성에서 열심히 일하는 후배들이 부끄럽지않은 삼성이었으면 한다.
그리고, 그런 삼성인들에게 부끄럽지않은 삼성이었으면 좋겠다.   
: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예상을 뛰어넘어 3개의 금메달을 거머지고
전 세계에 코리아 돌풍을 일으킨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팀의 김관규 감독.

그는 기자회견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의 지도법이 다른 지도자들에 비해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요즘 신세대 선수들의 특성을 살려 가급적 질타보다는 도닥거려가며
스스로 하고자 하게끔 기를 살려주려 노력했을 뿐이다.
같은 훈련이라도 지루함을 느끼지않게 다양한 방법을 추구했다.





프로야구 SK와이번스의 김성근 감독은스파르타식 지옥훈련으로 정평이 나있는 지도자다. 
그는 강한 담금질을 통해 팀을 2007, 2008년 2년 연속 한국프로야구의 정상에 우뚝 세워놓았다.

야구전문기자 박동희는 말한다. 
전력 누수가 큰 2010년 SK와이번스가 믿을 구석은 감독 밖에 없다고.

그리고, 김성근 감독은 말한다.
계속되는 반복훈련을 통한 개인 기량과 조직력 향상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고.  





모두가 고사하던 베이징 하계올림픽 야구대표팀 감독을 맡아
대한민국 구기사상 첫 금메달의 쾌거를 일궈낸 두산베어스의 김경문 감독.  
부임 초기 약체로 평가돼던 두산베어스를, 매년 예상치 못한 신인들을 발굴하고
기회를 주어 스타로 키워가며 젊고 강한 팀으로 변모시켰다.

감독이 부상당하지 않는 한 두산베어스는 끊임없이 상위권에 진출할거라는 찬사를 받는
그에게는 [뚝심과 믿음], 그리고, [똥고집과 대안부재]라는 상반된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만약에,
밴쿠버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에서 좋지못한 결과가 나왔다면, 김관규 감독은
입방아 찧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에게 "선수들에게 휘둘리는 유약한 지도자" 라는
평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만약에,
혹독한 훈련의 대명사인 SK와이번스가 선수들의 무기력한 플레이로 하위권에 머물렀다면,
사람들은 스파르타식으로 선수들을 조련하는 김성근 감독에게 이랬을거다.
"변하는 젊은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구습에만 얽매여 있는 지도자" 라고.


베이징 올림픽에서 이승엽과 한기주는 초반부터 유난히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만약에, 심한 부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등판 기회를 얻었던 한기주 투수가 어느 한 순간이라도
자기 역할을 해줬더라면 김경문 감독은 확실하게 [뚝심과 믿음]의 감독이 됐을 것이다.
반면에, 역시 계속되는 부진 속에서도 계속 4번타자로 기용된 이승엽 선수가 준결승전과 결승전에서도
끝까지 부진했다면, 그래서 게임을 놓쳤더라면 김경문 감독은 똥고집만 있고 대안이 없는 감독이 됐을 것이다.
믿음을 가지고 뚝심있게 지켜본 두 선수 중 한기주는 끝까지 슬럼프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일본전과 쿠바전에서 연이어 터진 이승엽의 홈런 두방으로 김경문 감독은 오명을 벗을 수 있었다.


김관규 감독, 김성근 감독, 김경문 감독, 단지 이 세 사람의 지도자 뿐만이 아니라
모든 지도자들은 대부분 자기나름의 지도철학이 있다.
그리고, 요즘의 지도자들이 변화하는 세태의 흐름을 읽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그런 구태의연한 사고와 가치관으로는 지도자로 존립하기 어려운 시대다.

지도자들은 자기가 맡고있는 팀의 환경과 선수들의 특성에 따라 여러가지 방법 중
가장 적합하고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방안을 모색하여 실천할 것이다.
하지만, 성적이라는 결과로 지도능력을 평가받는다.

김관규 감독은 어느 팀을 맡더라도 같은 가치관으로 비슷한 방법을 적용할 것이다.
김성근 감독도, 김경문 감독도 방법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철학과 가치관이 바뀌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선수들이 똑같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선수 능력의 차이일 수도 있고, 지도자의 지도범위를 벗어난 여건의 차이일 수도 있다.


본질이 변하지 않음에도, 결과에 따라 본질이 규정되는게 현실이다.
결과보다 중요한게 과정이라는 말은 너무 순진한 패자의 변명으로 들리는 표현이 되어버렸다.
안타깝지만, 현실이 그렇다.

:

미국에 사는 매부가 새로 취업을 했다는 소식이 왔다.
취업한게 뭐 그리 특별한 일인가 싶을 수 있지만, 이게 우리나라 관점에선 좀 특별한 일이다.

- 매부가 들어간 회사는 [Google]이다.
- 매부의 나이는 59세다.
- 매부의 입사는 스카웃 개념이 아닌 지원 후 면접과정을 거쳤다.
- 매부는 대학교수로 재직 중 이었다.


이쯤 되면 우리의 관점에서는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먼저, 나이 육십이 다 된 사람을 채용하는 구글의 오픈된 인사시스템.
우리나라 같으면 최우선 정리대상일텐데, 구글은 그 나이의 사람도 자격이 된다 싶으면 직원으로 채용한다.

또 하나는, 대학교수가 육십이 다 되어서 기업체에 취업을 한다는 마인드.
스카웃이나 자문교수라면 몰라도 안정적인 신분의 교수직을 버리고
만년의 나이에 기업체에 취업을 한다는게 우리 사회의 통념으로는 미친 짓이다.

매부는 의사결정단계에서 동생과 상의를 했다는데, 여동생의 의견도 흥미롭다.
"내 생각에도 당신은 구글에서 일하는게 당신에게 더 좋을거 같다." 고 했다는 것.
이 역시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아내들의 생각과는 다르지않나 싶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우리나라 아내들의 경우 대다수가
"왜 그 나이에 언제 그만두게될지 모르는 직장에 들어가려 하느냐.." 고 말리지 않을까..
특히,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고 신분이 보장되는 교수라는 타이틀을 버리는게 아쉬울 것이다.


예전에 TV에서 인생의 진로를 바꾼 두 사람의 이야기를 본 기억이 난다.

한 사람은, 변호사로 미국에 유학을 갔다가 우연히 보게된 탭댄스에 필이 꽂혀
법률공부를 집어치우고 탭댄스를 배우게 됐고, 귀국하여 예술대학 무용과 교수가 됐지만,
부친은 그 힘든 사법시험까지 통과해 변호사가 된 아들이 춤쟁이가 됐다고 아들과 대화도 안한다는 이야기.

또 한사람은, 의사가 역시 유학을 가서는 요리에 빠져 주방장이 된 이야긴데,
그때 함께 TV를 보던 집사람의 한마디에 함께 크게 웃은 기억이 난다.  집사람 왈,
"본인이야 자기가 좋아하는걸 한다 치더라도 저 사람 와이프는 정말 황당하겠다.
 자기는 결혼할 때는 분명 의사와 결혼했는데, 어느 날 주방장 부인이 돼버렸으니..."
그때 나도 맞장구를 치며 그랬다. "그렇겠네.. 처음부터 주방장이었으면 결혼 안했을지도 모르잖아."


일반적인 개념으로 선망받는 직종에 있는 사람이 사회적 통념을 깨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게 그리 쉬운 결정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주관을 가지고 그런 독특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요즘 세대들의 가치관은 그런 부분에서 많이 변화하고 있음을 느낀다.
나 역시 그런 삶의 모습이 좋고, 우리 아이들도 통념적인 길보다는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하다.

그런데...
개인의 가치관은 개인만 바꾸면 되지만, 집단의 관습이나 사회적 통념은 그리 쉽게 바뀌지않는다는게 문제다.

교수가 나이 육십에 기업체에 취업하는건 본인이 결정할 수 있지만,
나이 육십의 신입사원을 뽑아주는 기업체가 없다면 개인의 결정은 의미가 없어진다.

나이 등의 부수적인 조건보다 개인의 창의성과 능력만으로 판단하여 필요한 사람을 받아들이는
이런 오픈된 마인드가 구글을 [가장 일하고 싶은]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든건 아닐까.



조건이 많을수록 변화가 어렵고,
변화에 뒤질수록 진화가 어렵고,
진화가 안되면 적응이 안되어 결국 멸종에 이른다는게 역사의 교훈이다.


특별한 일이 아닌거 같은 한 사람의 취업이 여러가지를 생각케 한다.

:

옴니아2 OS WM6.5 업그레이드가 개시됐다는 동생의 연락을 받고 토요일 밤 11시부터 PC앞에 진을 쳤다.
폭주하는 유저들 때문인지 삼성모바일닷컴의 업그레이드 서버 접속이 쉽지않다.
무려 두시간 반여의 사투(?) 속에 드디어 접속 성공.

설레임 속에 다운로드를 받고 다음 단계인 업그레이드 진행 중에 진척율 게이지가 멈춘다.
다운로드에 10분 정도 소요된다는 안내 메시지를 들여다보고 있은지 30분도 더 지나고...
이럴 때 조치를 어찌해야 하는지, 스마트폰 카페 선임자들의 고견을 뒤져보니 똥침을 한방 놓으란다.
그래.. 이럴 때 가끔 똥침이 유효하긴 하지..

케이블 단자 바로 옆에 있는 작은 구멍에 힘들게 똥침을 한방 꽂고 나니 단말기의 화면이 이렇게 바뀐다.



그런데...  이때부터 문제가 생겼다.

삼성모바일닷컴의 업그레이드 서버에서 단말기 인식을 전혀 못할 뿐 아니라,
옴이아2의 저 화면이 사라지질 않는다.

연거픈 똥침을 통한 거듭되는 리셋에도 꼼짝을 안할 뿐 더러,
소위 공장 초기화라고 일컫는 단말기 완전 초기화를 시켜도 처녀귀신처럼 떨어져나갈 생각을 안한다.
모든 버튼이 작동이 안되어 배터리를 분리시켰다가 전원을 켜면 지체없이 저 화면이 나오면서 다시 올스톱.

새벽 5시까지 씨름을 하다 포기했는데, 나만 그런게 아닌 모양이다.



스마트폰 카페에 나와 같은 증세로 고통을 받는 유저들의 하소연이 이어진다.


이쯤에서 삼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삼성이 어떤 기업인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선행적인 기업이라고 인정받는 삼성이다.
삼성의 서비스 마인드는 대한민국의 A/S 시스템을 선도한다는거 아닌가.
사람들이 비슷한 성능이라면 삼성제품을 선택하는 것도 우월하다고 인식되는 A/S 때문이다.

삼성이 옴니아2 OS WM6.5의 업그레이드 방침을 발표한건 지난 22일 쯤이다.
그때 삼성은 2월말에 업그레이드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업그레이드가 시작된게 연휴가 시작되는 토요일인 27일.

연휴 첫날이었기 때문에 유저들은 삼성서비스센터를 이용하지 못하고
각자 PC를 통한 업그레이드를 진행해야만 했다.
하루라도 빨리 개선된 성능을 즐기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하지만, 늘 이런 일에는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시스템 상의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고, 이해가 부족한 유저 개인의 미스가 생길 수도 있다.
그리고 그로인해 나나 저 위 많은 사람들의 경우와 같이 단말기에 문제가 생겨 휴대폰의 기능을 상실할 수도 있다.
경험상 그런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을 예상치 못했다면 그건 말이 안된다.

그렇다면 삼성이 연휴 시작인 토요일에 업그레이드를 시작해서는 안되는거였다.
월말에 한다고 했으면 적어도 목요일 쯤 시작을 해서 문제가 생긴 유저들이 금요일엔 A/S를 받을 수 있게끔 하던가,
그게 여의치 못했으면 차라리 연휴가 끝난 3월 2일 부터 업그레이드 실시했어야 했다. 

삼성에서는 고객에게 발표했던 일정을 지키기 위함이었다고 얘기할지 모른다.
그리고 이상없이 업그레이드를 잘 하는 사람들이 많음에도 안된다면 그건 개인의 문제라며,
오히려 연휴기간 중 유저들이 충분히 이용할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다고 내세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위에 언급한대로 적어도 연휴 하루 이틀 전에는 했어야 했다.


이런 역설적인 가정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삼성은 그간의 경험상 업그레이드 과정에서 본인들이 미처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를 배제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가 생겼을 때 대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업그레이드 과정에서 오류가 생겼을 경우, 오류의 원인과 해결방안을 찾아야 하는데,
그런 대응방안이 모색되기 전에 유저들이 A/S센터를 찾게 되면 난감한 상황이 생길 수 있다.

그러니 연휴 시작과 동시에 업그레이드를 시작하면 얼리어댑터 기질이 강한 우리 유저들은
너도 나도 정신없이 자발적인 업그레이드를 실시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면 
여러 스마트폰 카페에 오류에 대한 증상과 해결방안을 묻는 하소연들이 올라올테니, 
그걸 모니터링 하여 연휴기간 중 해결책을 찾아 3월 2일부터 A/S를 실시하면 된다는...

삼성에서는 말도 안되는 가정이라고 하겠지만, 오죽이나 답답하면 이런 생각이 들까.

통신사인 SKT에게도 아쉬운건 마찬가지다. 진정 고객의 입장을 생각했다면
삼성과 보다 밀도있게 협의를 하여 좀더 효율적인 방안을 촉구했어야 했다. 


그나저나 나는 그나마 휴대폰이 두 대니 답답함이 좀 덜 하지만, 
휴대폰 하나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먹통이 된 휴대폰을 들고 연휴 기간 동안 어쩌냐... 
:

미국에 있는 재원이가 할아버지 할머니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전화다.
두 분이 인터넷을 하시지 못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재원이와 할아버지 할머니는 서로의 목소리만 들려줄 뿐
사진 등 지내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을 뿐 더러 즉시적인 의사소통도 어렵다.

재원이와 나는 버스 안에서도 필요하다면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여줄 수 있다.  


내가 스마트폰이나 트위터 등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내가 사는 시대, 그리고, 다음 세대와 소통을 하기 위해서다.

변화와 진화에 조금만 관심을 놓쳐도 급변하는 환경을 따라가고 이해하기가 힘든게 요즘이다.
나이가 들수록 모든걸 따라가기가 점점 어려워지는데, 그나마 이슈가 되는 것 만이라도
따라갈 데 까지 따라가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이런걸 모른다고 해서 생활하는데 지장이 있지는 않다.
하지만, 평균수명은 길어지는데, 벌써부터 놓치고 다니면 10년,
그리고 그 후의 세상에서 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마치 우리 부모 세대가 컴맹이라 우리와 소통이 안 되듯, 우리도 그리 될 것이다.
변화의 가속도를 감안하면 지금 우리 부모세대보다 더 극심한 소외감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사회는 점점 [다변화]된다.
가족들은 서울과 지방이 아닌 세계 곳곳으로 나뉘어 살게 될지도 모르고,
파발 - 편지 - 전화 - 메일 - 스마트폰으로 이어지는 의사소통수단도 갈수록 진화될 것이다.
무엇이 어떤 방법으로 우리 곁으로 다가올지 전혀 상상이 안된다.

내 손자 손녀들은 어떤 방법으로 의사소통을 하게 될까?
그 아이들이 다루는걸 내가 이해하고 같이 사용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겁이 난다.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가지 못하면 단절이다.
사회와 단절되고, 사회 구성원과도 단절된다.

의욕있는 한 시대를 보내셨던 우리 윗세대 분들이 경로당에 모여 그들만의 대화만으로 
사회에서 멀어지듯, 변화가 귀찮아지면 우리도 그리 된다.

같이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은 동시대의 이슈를 같이 공유하는 길 밖에 없다.
그러자면 흐름을 같이 타야 한다.



누군가의 아이폰에 이런 애플리케이션이 깔려있는걸 봤다.



급히 찍느라 초점이 안 맞았는데,
아이폰 화면 상단에 매일미사, 카톨릭성경, 카톨릭성가, 카톨릭성인 이라는 아이콘이 있다.




매일미사를 터치하면 왼쪽 화면이 나오는데, 친절하게 Today 라고 알려준다. 
터치를 하면 오른쪽 화면과 같이 오늘 미사 절차에 따른 기도문을 보여준다.




카톨릭성경 아이콘을 터치하여 볼 수 있는 화면들이다.




마찬가지로 카톨릭성가를 터치하면 원하는 성가의 가사와 악보는 물론 성가를 들을 수도 있다.


누군가가 이 아이폰을 들고 미사를 본다면,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린 채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것이다.
'미사시간에 휴대폰이나 들여다보고 있으니...'

아마 신부님과 수녀님도 같은 생각을 하시고, 성격 급하신 신부님은 점잖게 한말씀 하실지 모른다.
"미사시간에 휴대폰은 집어 넣으세요. 피치못할 전화라면 밖에 나가서 하시죠." 

하지만, 이 사람은 열심히 미사를 드리는 중이다. 그것도 아주 효율적으로..  
무거운 성경책이나 성가집을 들고다니지 않으면서도 수시로 기도문을 외우고 성경을 필독하며,
성인에 대해 알아볼지도 모른다.


세상은 이렇게 남들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바뀌고 있다.

너무 앞서나가도 튀는 행동으로 남의 오해를 살 수 있다.
하지만, 알지 못하면 남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살게 된다.

내가 새로운 것에 억지로라도 관심을 가지려하는 이유다.

:

미군의 해외 파병이야기나 군대를 소재로한 미국영화를 보다보면
미국의 최정예부대 얘기가 나올 때 빠지지않는 부대가 해병대다.
 
우리나라도 해병대는 군기의 상징이고, 최정예를 자부한다.
때문에, 요즘 젊은이들의 해병대 지원율이 4:1을 넘는다거나,
해병대를 가기위해 해병대 지원 삼수를 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
아직 이 나라의 젊음이 싱싱하다는 기쁜 만족감이 든다.


미 해병의 리더십 원칙에 관한 책
< Business Leadership the Marine Corps Way> 에 이런 내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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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은 절대로 'M Word'를 사용하지 않는가?]


해병이 언어 사용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예를 들면, 라디오 통신 중에 "반복한다(repeat)" 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잘못하면 "퇴각한다(retreat)" 라는 말로 오인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말한다 (I say again)" 라고 한다.
좀 촌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애매하지는 않다.
 

해병이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 또 다른 말이 있다,
그것은 "관리한다(manage)" 라는 말이다.
이 말은 입에 담으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에 아예 M Word라고 통칭한다.
 
그 이유는?
해병은 리드(lead)하도록 훈련 받은 것이지,
관리(manage)하도록 훈련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해병의 입장에서 본 관리와 리드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소위 경영자(manager)들은 이 차이를 잘 인식해야 할 것이다.

관리자들은 사람들을 압박하고 강요하지만,
리더들은 스스로 모범을 보임으로써 사람들을 이끈다.

관리자들은 부하들에게 일을 끝내라고 명령하지만,
리더들은 일을 끝내도록 격려한다.

관리자들은 엉덩이 밑에 불을 놓지만,
리더들은 배를 따스하게 해 준다.

직접 참견하는(Hands on) 관리자들은 복종심을 키우고,
간접적으로 돌보는(Hands off) 리더는 독립심과 능력을 키운다.

관리자는 자신이 특별한 클럽에 속한다고 생각하는데,
리더는 부하 직원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관리자는 부하 직원의 성공에 따른 공을 받지만,
리더는 스포트라이트를 피하고, 그 공을 받아야 할 사람을 빛내준다.

일이 잘못되었을 때,
관리자는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라고 묻고
리더는 내가 책임을 진다.고 말한다.

관리자는 시간외 근무를 하고,
리더는 항상 일한다.
 
관리자는 항상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켜야 하지만,
리더는 멀리서도 감명을 준다. 심지어 무덤에서 조차.
 

이제 왜 해병은 M Word 를 사용하지 않는지 이해하겠는가?
기업의 경영자들은 관리와 리드의 차이점을 이해하고,
관리자가 아니라 리더가 되기 위한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

"성행위 ~~~" 

지난 연말 한 술집.
아마 직장의 송년 회식자리인듯 한데, 한 사람이 일
어나 선창을 하자,
함께 한 젊은 여성들까지 웃으며 큰 소리로
"성행위~~" 라고 복창을 한다. 

이건 또 뭔소리...???
슬그머니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 집단의 일원에게 의미를 물어보았다.
[성공과 행복을 위하여]라는 해석이 돌아온다.  아하~~  그런 심오한 뜻이...

어디선가는 [시발조또]라는 건배구호를 본 적이 있다.
점잔빼는 사람이 하기에는 발음과 억양이 좀 어색한 이 구호의 의미는
[시대의 발전과 조국의 또다른 도약을 위하여].  



(모든 사람이 그렇다고 단언할 순 없지만) 많은 사람들의 내면에는 양면성이란게 있는거 같다.
사회에서 규정하는 모든 도덕적 규범에서 벗어나 인위적으로 억제된 본능을 마음대로 분출하고픈 원초적 욕망과,
남들에게 추앙받고 존경받는 도덕적으로 결함없는 인격체로 돋보이고 싶은 자아실현 욕구.

가끔 언론을 통해 알려지는 소위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비도덕적 행위를 바라보면서,
'저럴 수가..' 하며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론 '저도 사람인데...' 하면서,
그동안의 기대를 쉽게 접는 것도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이런 양면성 때문인지 모른다.

재밌는건, 자아실현 욕구와 본능에 대한 억제력은 비례하지만, 본능을 푸는 행위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   
자아실현 욕구가 낮은 사람은 원초적 본능에 대한 억제력이 낮고, 본능대로 행함에 있어 남의 눈치를 보지않는 반면,
자아실현 욕구가 강한 사람일수록 본능의 억제력은 강하지만, 그만큼 본능적 행위에 대해서는 비밀스럽다.

사실 그런 현상은 당연한 것이다.
일반인은 남에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쉽게 하고싶은걸 할 수 있지만, 알려진 사람은 
하고싶은 많은 부분을 참아야하고, 참아야하는만큼 하더라도 최대한 노출을 꺼려야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일지 몰라도,
개인이나 사회나 평균수준의 건전성 유지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분출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에 따라 인격의 완성도나 성숙도는 다르겠지만,  성인이 아닌 이상 완전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2001년 유럽배낭여행시 3주간 작심하고 욕을 마음껏 하고 다닌 적이 있다.
넥타이를 매고 정장을 하고는 남을 의식하며 언행에 조심해온 20여년을 벗어나,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 입에서 나오는대로 정제되지않은 원색적인 욕을 마음껏 하다보니,
오히려 정신을 세탁한 기분이 들었다.  일종의 카타르시스라고 할까...


사람들이 다양한, 그러면서도 다소 묘한 늬앙스의 건배구호를 만들어내는 것도,
그런 양면성과 분출욕구의 발로가 아닌가 한다.
일상적인 자리에서 표현하기 객쩍은 구호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크게 외침으로써
흐트러지고픈 본능을 말로나마 미약하게라도 해소하면서, 그럴듯한 의미가 담긴
유머로 포장하여 체면은 지키고자 하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술 한잔을 걸치고 크게 웃으며 "시발조또" 를 외친다.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




일어나니 온 천지가 눈이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내려다보이는 광평대군 묘역이 하얗게 덮혔다.

광평대군 묘역은 사실상 묘지임에도 무덤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음습함이 없다.
문중에서 관리를 잘 하기 때문에 마치 정원같다.

거실에 앉아 커피 한잔과 함께 창 밖으로 눈을 돌리면
봄에는 빨간 꽃으로 물들고, 여름에는 짙은 초록의 청량감을 준다.
그리고, 겨울에는 이렇게 멋진 설경을 감상할 수 있다.


전국의 도로망이 새벽부터 내린 많은 눈으로 엉망이 됐다고 한다.
특히 서울은 9년만의 폭설로 새해 첫 출근에 나선 직장인들이 엄청나게 고생을 했을거 같다.
직장인 뿐 아니라, 버스나 택시 기사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겪었을 것이다.

나도 지하철을 이용해 출근을 하면서 잠시 생각을 돌려서 해봤다.
어차피 벌어진 상황이니 관점을 달리해보자.
폭설이라는 부담스러운 용어대신 함박눈이라고 생각하자.


새해 첫 출근길 함박눈이 정말 소담스럽게 내렸다.
어렸을 적 동요 가사처럼 하늘나라 선녀님들이 하얀 눈을 자꾸자꾸 뿌려주신다.

새해에는 모두가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모든 사회가 깨끗해지기를 바라는 듯
하얀 눈이 정말 탐스럽게 내려주었다.

이렇게 많은 눈의 또 다른 의미는
새해 벽두만큼은 있는 자와 없는 자가 두드러짐 없이 서로 함께 어울려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자.
대중교통을 함께 이용하며 은연 중의 스킨쉽으로 좀더 서로에게 친밀해지라는...

눈길에서 미끄러움으로 고생하는 자가용을 보면서,
어려운 환경일수록 있는 티를 내지말라는 교훈을 생각했다면 내가 얄미운 생각을 한걸까..
:
검찰총장 내정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에 대해 말이 많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면 인사청문회에 대해 말이 많은게 아니라, 청문 대상자에 대해 말이 많다.

사실 요즘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다.
정치권의 하는 행태가 많은 사람들이 느끼듯 실망스러운 면이 많다 못해 지긋지긋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국세청장 인사청문회에 대해서도 주위에서 이러쿵 저러쿵 하는 소리를 들으며 애써 외면했다.
들으면 괜히 짜증나고, 내가 어쩔 수도 없는 일로 열 받을테니까.

그런데, 우연히 인터넷에서 검찰총장 후보자에 대해 도배가 된걸 보니 눈이 안 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하나하나 들여다 본 결과는...  너무 짜증 나..


청렴결백의 상징이, 그것도 청백리의 표상인 우두머리 급의 인사가 25억 상당의 아파트를 15억을 빌려 구입했다.
재산 신고시 82평형 아파트를 65평형이라고 신고했다.  전용면적이란다.
아파트 평수를 말할 때 전용면적으로 표현하는 대한민국 사람도 있다는걸 처음 알았다.
정말 소도 웃을 일이다.

15억을 빌려준 사람은 10년 전 소개로 알게된 사람이란다.
식사나 술자리도 한적이 없다고 한다.  그 분도 참 대단한 분이다.
10년 전에 알게되어 특별한 친분관계도 없는 사람에게 15억을 빌려주며 차용증은 8억짜리만 받았다.
뭐 7억은 두달 뒤엔가 줄꺼기 때문이라는구만.

돈을 빌리고 빌려준 사람들이 부부동반 여행을 두번인가 같은 비행기로 같은 장소에 갔었다지...
그것도 같이 골프채를 챙겨서. 
검찰총장 내정자는 같은 비행기를 탔는지는 모르겠지만 동행한 것은 아니란다.

돈을 빌려준 분의 부인과 검찰총장 내정자의 부인이 같은 날 공항면세점 같은 매장에서
고가의 명품 핸드백을 샀단다.  이것도 한번이 아니라는거 같던데...
각자 샀을까?  아님, 채무자 부인이 채권자 부인에게 돈 독촉하지 마시라고 회유책으로 사줬을까??
어쩌면, 반대로 채권자 부인이 채무자 부인을 달래려고 사줬을지도 모른다.
요즘은 돈 빌린 자가 더 큰소리친다 하지 않는가.  돌려줄 돈 없으니 배 째~~

뭐드라..  부인이 타고 다닌다는 제너시스 승용차도 말이 많던데.. 
다른 사람이 사용하던 리스차를 얼마 전 승계했다던가.  월 리스료가 170만원 이라지..
승계하기 전부터 그 아파트의 주차스티커가 발부됐었다는데,
친구 아들이 자주 찾아와 소유차량으로 아파트 관리실에 등재시켰기 때문이란다. 
이렇게 배려심 많은 분이 검찰총수가 되면 딱딱한 검찰의 이미지가 좀 개선되려나. 
아참..  그 차에 연간 3000만원 이상 쇼핑을 하는 VVIP 고객에게만 발부하는
유명 백화점의 주차스티커도 붙어있었다던가..

아들이 강남의 마음에 드는 학교에 배정을 못 받자,
여의도로 이사했다가 몇달 만에 다시 강남으로 와 다른 학교로 배정을 받았단다.
그리고 이런건 위장전입이란다.  뭐.. 해봤어야 위장전입의 요건이 뭔지 알지...
이 부분은 내정자도 군소리없이 시인을 했단다. 이럴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이라는데,
이런 불리한 진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을텐데 왜 시인을 했을까?
그렇다면 누가 이 분 고발하면 정말 그렇게 형을 사는거야?? 

검사장의 연봉 규모를 처음 알았다.  8000만원 정도.
매월 대출이자가 800만원 정도란다. 
자동차 리스비가 포함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더라도 1년 이자만 9600만원.
어떻게 생활이 되느냐 물으니 아들과, 딸인지 며느리가 벌어서 도와주기 때문에 어렵지 않단다.
요즘 보기 힘든 부모 자식 관계다.
대부분 어떻게든 부모가 자식에게 하나라도 더 남겨주려 갖은 방법을 다 쓰는데, 이 집안은 반대다.

이상한건 부모의 적자를 메워준다는 아들의 연봉보다 아들이 쓰는 카드사용액이 몇년간 계속 더 많다는거.
아마 이자 갚고나면 남는게 없는 부모님의 필요한건 몽땅 아들의 카드로 해결해 드렸나 보다.
그러고도 아들의 통장 잔고는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니, 역시 의지할만한 아들임에 틀림없다.
기쓰고 위장전입시켜 좋은 학교 보내는 이유가 다 이런 능력을 키우기 위함인듯.
우리 재원인 언제 이렇게 되려나..

검찰총장 내정자는 인복을 타고난 분이다.
대충 알고지내는 분이 15억을 빌려주고, 자식이 집안의 부족한 경제력을 다 채워주고,
게다가 주민세도 못 낼 정도로 어려운 동생마저 형에게 5억을 빌려줬다니. 이자도 없이.
형제간이니 그럴 수 있단다.  그렇지 뭐..  어차피 형이 돈 없는거 다 아는데.


내정자는 故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포괄적 뇌물죄 적용을 주장했던 사람이다.
포괄적 뇌물의 정의가 뭔지 머지않아 사례를 통해 이해할 수 있을거 같다.         



더 짜증나는건 여당인 한나라당의 평가다.

커다란 도덕적 결함을 찾기 어렵단다. 청와대 역시 심각한 결격사유라고 생각하진 않는단다.
도대체 국민을 이끌어나가는 정부 여당이 생각하는 도덕, 윤리의 가치관이 뭔지 모르겠다.
관리, 그것도 사정기관의 수장에 대한 저 많은 것들이 커다란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면
대체 이 나라에서는 뭔 짓을 해야 지탄받을 수준이 된다는 건지.

오히려 무지몽매한 백성이 대충 넘어가더라도 지도층에서 더 엄격하게 평가하여
국민을 계도시켜야 하는게 아닌가.

별 문제는 없어보이지만 여론의 추이를 본다는 말도 들린다.
별 문제가 없으면 밀고나가면 되지, 여론의 추이는 왜 본다는게야.
이 정부가 언제부터 여론에 귀 기울였다고.  찜찜한게 있긴 있는 모양이다.

대통령이 취임 초기 그랬다.  작은 결함이 있더라도 능력이 있으면 된다고.
그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함없는 사람이 어딨겠나.
작은 허물 때문에 게인이 가지고 있는 커다란 능력이 사장된다는건 어찌보면 자원의 낭비일 수 있다.
허물이 있는 사람에게 능력을 발휘해 공과를 냄으로써 그 허물을 벗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정도와 자리에 따라 다름을 알아야 한다.
허물의 정도에 따라 인정받을 수 없는게 있고, 어떤 자리냐에 따라 작은 허물도 피해야되는 자리가 있다.
지도층과 임명권자, 그리고 본인 스스로도 그 정도는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집권당 대표라는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단다.
"다소 결격사유가 있더라도 직무수행에 문제는 없지않나 하는 소박한 생각을 해본다."


우리도 역시 제발 저런 분들이 우리 앞에서 안보였으면 하는 소박한 생각을 해본다.

:
애정을 갖고 챙겨보던 주말드라마 [가문의 영광]이 끝났다.
이 드라마에 대해서는 먼저 이야기한 적이 있기 때문에 특별히 다시 논할건 없다.  
(http://www.kangha.kr/2789  참조)

이 드라마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마지막 회에 하만기회장이 모든 가족들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담겨있다.
[가문의 영광]이 전하고자 했던 키워드는 [사람을 귀히 여겨라]가 아닌가 싶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라.
스스로를 귀히 여겨라.
자신을 귀히 여기지 못하는 사람은 남도 귀히 여기지 못한다.

[가문의 영광]에서 유독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귀히 여긴다]다.
작가와 감독이 전하고자 했던 [모든 사람을 귀히 여기자]는 
지표가 없어 방황하는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가치관이라고 생각한다.


하나하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가장 본받고싶은 (드라마 속의) 어른 하만기회장님.
살아가며 삶의 지표로 삼고싶은 분이시다.
그분이 가족 모두에게 남긴 마지막 말씀을 - 마지막에 뭔가 있을거 같아 녹화를 해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명깊은 -
늘 새기면서 살고싶다. 



하만기회장님을 구수하면서도 멋지게 표현해주신 신구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너무나도 훈훈한 1년을 보내게해준 작가 감독 및 모든 출연자,
그리고 그동안 이 아름다운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애쓰셨던 스탭진을 포함한 모든 분들께도
깊은 고마움을 느낍니다.


갑자기 삶의 나침반을 잃어버린 것 같은 공허함이 느껴진다.
:

- ** 상가에 갈거야?
> 난 어제 다녀왔어.

- 그래..?  ... 얼마를 해야돼냐...??
> 넌 **하고 평소 자주 접하는 사이는 아니잖아.  그럼 5만원만 하면되지 뭐..

- 그러면 될까..  근데.. 또 좀 그래서...
> 야~ 요즘 경조사 시즌이다. 
   개인별 친분에 따라 형편되는대로 해야지, 어떻게 하나같이 다 똑같이 챙겨...
   물론 여유가 있으면 두루두루 넉넉하게 챙기면 좋겠지만, 그게 안되면 할 수 없잖아.
   마음가는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 안들게 챙기려면 마음 덜 가는 사람에게 신경 덜 쓸 수 밖에...
   5만원 하자니 하고도 좀 미안한거 같고, 10만원 하기는 부담스러우면 아예 안가는 방법도 있지.
   연락 못 받을 수도 있지 뭐.  더구나 **가 너 안왔다고 챙기는 관계도 아니라면.    

- 그렇지??  알았어. 5만원만 하지 뭐.


얼마전 친구와 나눈 대화다.

나이가 들면서 살아오며 맺은 인연들과 관련된 경조사가 점점 많아진다.
그리고  경조사의 종류에 따른 빈도도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는 아무래도 친구 동료들의 결혼식과 자녀들의 돌잔치가 주를 이룬다.
30대 중반이 넘어가면서는 후배들의 결혼식이 많아지고, 문상갈 일이 늘어난다.

그런데, 40대가 되면 그 폭이 급격히 넓어진다. 
특히, 사회생활을 어떤 곳에서 하느냐에 따라 차가 커진다.
회사 안밖의 교류가 활발한 대기업에 다니는 경우
사회경력이 쌓인만큼 데리고있던 직원들의 수도 늘어나고, 모셨던 상사의 수도 늘어나고,
거기에 사회활동을 하면서 알게된 인맥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데,
여기에 기존의 동창이나 친구들은 기본으로 깔리는 수요다.

이렇게 챙겨야할 대상이 다양해진만큼 경조사의 종류도 총동원된다.
본인결혼에 자녀결혼, 아이 돌에 부모님 수연, 그리고 상(喪) - 이것도 부모는 물론 장인 장모상 - 까지.
경조사의 종류별 빈도수로만 보면 어쩌면 이 시기가 챙겨야할 경조사의 절정인지도 모른다.

직장생활을 마치고 50대로 접어드니 일단 종류는 좀 줄어드는거 같다.
특히 직장을 그만두니 후배들의 결혼식은 이제 없다.
후배들 뿐만이 아니라 신규 인맥의 창출도 거의 없고, 돌잔치나 부모님 수연 등도 거의 없다.
대신 부모상과 처가상이 느는데, 앞으로는 자녀결혼이 이제 주종목(?)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보면 앞으로 경조사의 빈도는 줄어들거 같은데,
하지만 빈도의 감소에 비례해 비용부담까지 주는건 아닌게 문제다.

나이가 문제인 것이다.
나이가 주는 문제는 두가지다.

하나는, 나이가 들면서 체면이라는 골치꺼리가 생긴다.
여기에는 화폐가치 변동에 따른 경조비금액도 한몫한다.
우리 나이에 3만원 경조비는 이미 경조비로서의 가치(?)를 잃은지 오래고, 5만원도 애매하다.
왠만한 경조사에 10만원 미만은 경조비를 내면서도 왠지 어색해지는 이상한 현실이 되어버렸다.

이런 현상이 더 큰 부담으로 와닿는 이유는 나이가 주는 두번째 문제 때문이다.
한국의 일반적인 사회구조상 50대 중반이면 소득기반을 상실하게 된다.
사업이나 자영업을 하던 사람이 아닌 직장인은 50대 중반이면 대부분 이직을 하게되는데,
그 이후 그 나이에 뚜렷한 소득기반을 만들기가 쉽지않은게 현실이다.
반면에 피하기 힘든 마지막 지출을 생각해야 한다.  자녀들의 교육비와 결혼비용 등이다.

이런 상황에서 수시로 발생하는 경조비는 개인의 형편에 따라 엄청난 부담일 수 있다.


경조비의 부담때문에 마음이 가는 사람의 경조사에 함께 하지 못한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
경조비라는 개념이 큰 일을 치루는 이웃의 부담을 십시일반 조금씩 덜어준다는
상부상조의 개념에서 시작되었을텐데, 지금은 그런 아름다운 의미는 사라지고
체면치례, 신분과시, 심지어는 뇌물증여의 수단으로 까지 변질된거 같아 안타깝다.

여유가 많은 사람이 형식적으로 내는 10만원과,
여유가 없는 사람이 꼭 챙겨야한다고 생각하고 마련한 3만원 중
어느게 더 축복의 가치가 있을까?

그런데, 결혼식장이 일류호텔이라는 말에 3만원을 마련한 사람은 결혼식에 가질 못했다.
차마 밥값도 안되는 걸 내는게 민망해서였다는 한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씁쓸했던 적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주위에 많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경조비에 대한 부담 때문에 축하하고 기리는 자리에 차마 함께 하지 못한다는건 참 슬픈 일이다.



가까운 후배와 경조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들려준 얘기가 있다.

경조비 금액..??  난 그런거 별로 신경 안써.  
내 경제형편에 맞춰 내 마음 가는대로 해.
어떻게 그냥 알고지내는 모든 사람한테 똑같이 신경을 써? 

10만원 해야할 사람이면 10만원 하고, 5만원 해야할 사람이면 5만원만 하면 되고,
5만원 하기가 찝찝한거 같은데 10만원은 아닌거 같다 싶으면 아예 가질 않고.
이것도 저것도 마음이 편치 않으면 아예 안하면 되잖아.
내 마음이 편치 않고 갈등을 할 정도의 대상이라면 내 마음 속 깊히 있는 사람은 아니니까.

오랫동안 서로 소식도 없다가 갑자기 청첩이 오는 경우도 있잖아.
그런 경우에도 마음가는대로 해. 똑같이 소식이 없었지만 마음이 가는 사람은 꼭 찾아가고
얄미운 사람은 안가고.  그건 자기 맘이 알잖아.
그동안 서로 연락끊고 살아온 사람에게 체면 생각하며 고민할게 뭐있어.
그동안 보지않고 살았으면 앞으로도 안보고 서로 잘 살텐데.
반면에 그동안은 연락이 안됐지만 예전에 받은 정이 있다고 생각되거나
앞으로라도 연락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런 기회에 다시 연을 이으면 되는거고.

가끔은 이런 적도 있었어.
결혼식이나 상가에 경조금없이 다녀온 적도 있어.
특별히 가까운 것도 아니고 꼭 가봐야할 대상도 아닌데, 가만있자니 왠지 마음이 허해지는 경우가 있더라구.
나도 스스로 이해하기 좀 힘든 묘한 감정인데, 하여간 그럴때 그냥 다녀온 적이 있지.
나중에 그 사람이 장부 챙기면서 나를 욕하면 그건 그 사람 맘이니 할 수 없는거고.

내가 이렇게 마음가는대로 편하게 생각할 수 있는 근거가 뭔지 알아?
나는 아직 부모님 모두 살아계시잖아.  그리고 아이들도 아직 결혼 안했고.
그러니까 우스운 얘기지만 나는 후불이니까 맘대로 하는거야.
내가 5만원 낸게 적었다싶으면 나중에 지도 5만원만 내면 되는거고,
내가 그냥 간게 서운하면 너도 나중에 그냥 맨손으로 오면 된다는거지.  안와도 되고.
내가 먼저 한 짓이 있으니 상대방이 같은 행동을 해도 내가 서운하지도 않을거고.
그렇게 생각하면 맘 편해.

내 마음가는대로 5만원만 할 데는 5만원만 하고, 가고싶지않은 곳은 안가고,
그렇게 의미없이 체면치레 때문에 형식적으로 내는 그런 돈 모아서 
꼭 내가 마음을 두텁게 전해야 할 대상에겐 조금 과할 정도로 마음을 표했었고. 

그보다 더 먼저 필요한건,
전단지 뿌리듯 청첩장 살포하는거... 이거 하지말아야지.  엄청난 민폐거든.
안보내면 서운하다는 사람 있지?  과연 그럴까??
반 이상은 오히려 속으로 고맙게 생각할걸.

진짜 서운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청첩장 보내기 전에 이미 혼사가 있다는걸 알 정도로 가까운 사이일거야.
예를들어, 내가 너 모르게 감쪽같이 아이들 결혼시킬 수 있겠어?
서로 평상시 얘기하다보면 다 알게되는건데.

그리고 정말 서운할 정도로 가까운 사람이라면 나중에라도 아이들 뭐라도 해주라고 마음의 표시를 한다.
나같으면 그럴거 같아.  네 아이들 결혼했다는 얘기를 뒤늦게 알게된다면 나중에라도 어떤 형태로든
마음을 전할거 같은데... 

:
여유로운 사람은 여유롭지 못한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 저렇게 사는지...  왜 저렇게 지지리궁상을 떠는지...
그들의 처절한 삶을 보는 것이 짜증스럽다.

여유롭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은 다 여유로워 보인다.
남들에겐 내게 없는게 다 있는거 같고...  늘 나만 이렇게 사는거 같고...
남들의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을 보는 것이 짜증스럽다.


내 눈에는 안스러워 보이는 사람이지만 즐거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자신보다 나은 남을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삶 중에서 좋은 부분을 간직하며 산다.
  
내가 보기에 부러울게없는 사람이지만 행복하지않은 사람이 있다.
그들은 늘 웃어야 하지만, 환경으로 포장되어 드러나지 않는 고민 때문에 더 힘든 일상을 보낸다.


모든 사람에게 완벽한 삶이란 없다.
어럽게 생각되는 사람에게도 작은 행복이 있을 수 있고
넉넉하게 보이는 사람에게도 큰 고민이 있을 수 있다.

누구나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동경하고 그런 삶을 열망하지만
누구도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진정한 삶의 모습을 볼 수는 없다.

때문에 대부분의 삶은 이래보인다.
나보다 못한 사람은 다 불행해 보이고, 나보다 나은 사람은 다 행복해 보이는...



[없는 자의 행복]과 [있는 자의 불행].

하나를 선택하라면 어느 것이 더 의미있을까?
[없는 자의 행복]을 선택하자니 없는게 너무 불편할거 같다.
[있는 자의 불행]을 선택하려니 불행이란 것이 너무 부담스럽다.

그런데,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게 있다.
누구나 그 범위 안에서 생각에 따라 삶의 다양한 가치를 찾을 수 있다는거. 



산다는건 이런게  아닐까...

자기 삶의 긍정적인 요소를 찾는 것.

:
"***이사님이 선배님 집주소를 알아봐줄 수 없느냐고 물어보던대요."

몇달 전 같은 직장에 있던 후배가 전화를 해 알려준다.     
"왠일인지 모르겠어요."

왠일은 무슨 왠일...  뻔히 보이는구만.
2001년에 회사를 나온 뒤 한번도 서로 연락이 없던 사람이다.
그만큼 개인적인 친분이 깊지않았던 관계다.  그저 같은 회사에서 알고지내던 정도.
그런 사람이 갑자기 내 주변사람에게 내 연락처를 묻더란다.  전화번호도 아닌 집주소를.

그리고 보름쯤 지났을까...  집으로 한통의 청첩장이 날아들었다.


엊그제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말 그대로 오랫만이다.  마지막 목소리 들은지 한 4년 됐을까.. 
날짜 시간  장소 다 명기된, 역시 말 그대로 문자청첩이다.
그런데 왜 굳이 주소가 또 필요한지 모르겠다.
내가 가고자하면 이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찾아갈텐데 형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오히려 이런 문자 후에 전화를 넣어주는게 훨씬 반갑고 좋을거 같은데.


집사람이 오래 전부터 아이들의 결혼에 대해 내게 한 이야기가 있다.
지연이는 딸이기 때문에 우리 맘대로 할 수 없겠지만,
재원이 결혼만큼은 청첩장도 돌리지않고 축의금도 받지않고 치르고싶다고.

내가 유일하게 주례를 선 결혼식때 신랑 신부 양쪽에서 가족과 친구 포함 50명씩만 선별초대하여
정말 가족같은 분위기에서 단란하게 치렀는데, 그 분위기가 너무 좋았단다.

우리 아이들 결혼식 때도 무분별하게 청첩장을 살포(?)하여 괜히 여러사람들 고민하게 하지말고,
정말 평소 아이들도 잘 알고  또 우리 아이들에게 정을 느끼는 가까운 사람들만 초대하여
축의금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진심어린 축복을 받는 그런 자리로 만들고 싶단다.

그러면서 내게 묻는다.  "당신도 괜찮지??  왜?  본전생각 날거 같아??"
그러면서 아이의 결혼을 상품화하고 싶지않단다.
 
가까운 친구에게 그 말을 전하니 웃으며 그런다.
"당연히 본전생각 나지...  그동안 뿌린 돈이 얼말텐데..."

그럼 그나마 본전을 줄이는 방법이 뭐야??
여지껏은 무를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치고, 앞으로라도 일체의 결혼식에 불참을 할까... ^&^~~

사실 요즘 결혼이라는 의식이 너무 상업적이지않나 싶을 때가 있다.
결혼식의 절차도 물론 그렇지만, 청첩을 하는 과정이나 받는 입장도 그렇다.
받았으니 돌려야하고, 왔으니 가봐야하고, 또 결혼식 장소에 따라 금액이 신경쓰이고,
무엇보다 현재 나의 경제적 여건보다 사회적 추세, 남들과의 비교, 또 내가 받았던 축의금액을 신경써야한다.
그중에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건, 축의금 액수에 따라 전하는 마음과 정의 무게가 평가받는거같은 느낌.
그래서 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정말 축하해주고 싶은 자리에 차마 얼굴을 못내미는 경우도 있다.

때문에 아이들을 꼭 보고싶어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진정한  축복을 받고싶은게 집사람의 마음이다.     


근데, 집사람의 말 중에 궁금한 대목...
그런건 신랑측 의견이 절대적인가??   그렇다면 그것도 이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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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웠던 18일간의 축제가 끝났다.
마지막 한줌의 아쉬움이 잔잔히 남는 축제였지만,
분명 우리에게 벅찬 감동과 기쁨과 열광을 안겨준 기간이었다.

어쩌면 예선 1라운드인 아시아예선에서 탈락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불안감을 안고 출범했던
World Baseball Classic 대한민국 야구대표팀은 예상을 뛰어넘는 준우승의 성과를 얻어냈다.

"국가가 있어 야구가 있는 것이고, 팬들이 있기 때문에 선수와 코치와 감독이 있는 것" 이라며
모두가 기피하는 자리를 떠맡아, "나라를 대표한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할 것" 이라고
선수들을 이끈 김인식 감독과 그의 선수들이 일궈낸 값진 성과다.


2006년 1회 WBC대회 때 우리나라는 6승1패라는 참가국 중 최고의 성적을 거두고도 
5승3패를 거둔 일본의 우승을 멍하니 바라봐야만 했다.  이상한 대진방식 때문이다.
이번에 끝난 2회 대회에서 대한민국은 6승3패의 전적으로 준우승을 했으며, 일본은 7승2패를 거두며 우승했다.

전적으로만 보면 우승과 준우승의 모양세가 1회 대회보다는 제대로 갖춰진듯 하다.
재미있는건 한국의 3패는 모조리 일본에게 진 것이며, 일본의 2패는 모두 한국에 패한 것이다.

또 하나 희한한건 대회참가 16개국 중,
우승을 한 일본이 아홉 경기동안 상대한 나라는 한국 중국 쿠바 미국의 4개국 밖에 안된다는 것.
그나마 준우승을 한 우리나라는 일본 대만 중국 멕시코 베네수웰라 등 5개국을 상대했었다.
각국의 참다운 실력을 겨누기보다 마케팅을 통한 흥행에 주안점을 둔 주최측의 농간(?) 때문이다.


뭐.. 어찌됐든 대회는 끝이 났다.
처음에는 한국의 선전이라고 흥미롭게 평하던 세계 야구계의 대한민국에 대한 시선은
대회가 치뤄지면서 대한민국의 승리가 쌓여갈 때 마다 [흥미로움 - 경이로움 - 당연함]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런 대한민국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김인식 감독의 용병술과 작전에 감탄하고, 젊고 자질있는 선수들에 관심을 갖고 주목하기 시작한다.
야구 종주국이며 가장 큰 야구시장인 미국의 메이저리그가 선수이적에 대한 한국의 제도를 문의하고,
아무래도 우리보다 판이 크고 넓은 일본에서도 몇몇 선수들에게 바로 반응을 보인다.

당사자인 대표선수에게도, 그리고 야구로 큰 꿈을 이루고자 하는 어린 유망주에게도,
또 야구를 좋아하는 팬들에게도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더딜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필요한게 멍석이다. 바로 야구 인프라다.
야구장을 비롯해 열악한 시설과 트레이닝 장소, 야구장의 의료체계, 그리고, 1군과 2군의 운영시스템 등
손봐야할게 많을 것이다.


작년 우리는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값진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불과 7개월만에 WBC 준우승이라는 또 하나의 소중한 기쁨을 만끽했다.

우리 대한민국의 선수들은 아홉경기를 치루며 실수를 하기도 했다.
그중에는 아쉬운 장면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몇곱절 많은 환희의 순간들을 우리 선수들은 우리에게 안겨주었다. 

실수를 했다고 탓하지말자.
그들은 승리를 만드는 야구기계들이 아니고,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야구선수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승리를 담보하는 야구기계라면 우리는 그들에게 열광할 이유가 없다.
어제 치명적인 실수를 하여 장탄식을 내뱉게 했던 선수가 오늘은 기가막힌 허슬플레이로 우리를 열광케한다.
하지만 실수든 파인플레이든 그 선수에게는 똑같이 최선을 다한 결과일 뿐이다.

프로야구 선수나 감독은 야구가 직업이며, 개개인이 개인사업자나 같다.
누구든 자기사업을 말아먹으려는 사람은 없다.  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늘 최선을 다한다.  결과가 다를 뿐이다.  그것은 개인차다.
노력만으로는 상쇄되지않는 능력에 따른 차이는 어쩔 수가 없다.
우리는 그 차이를 인정해야 하며, 능력의 차이를 좁히려 최선을 다하는 노력과 자세에 박수를 보내는게 당연하다.

대한민국은 일본에 졌다.
극적으로 연장전까지 끌고간 승부였기에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건 사실이다.
종이 한장이건 몇장이건 어쩔 수 없는 개개인의 기량차이, 게다가 엷은 선수층으로 
처음부터 내용에서 밀리는 승부를 끝까지 박빙으로 끌고간 것이 대단하다.
자칫 큰 점수차로 질뻔했던 경기를 우리 선수들은 엄청난 집념과 정신력으로 극복해 나갔다.
그래서 더 아쉬운게 사실이다. 스코어가 벌어졌다면 덜 아쉬웠을 것이다.

마지막의 아쉬움.  그게 현실의 벽이며 한계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극복해야할 과제 혹은 목표로 주어진 미세한듯하면서 커다란 간극이다.


18일간 우리에게 환희와 기쁨을 안겨준 대한민국 야구대표팀.
모든 것이 어렵고 힘든 시기에 당신들로 인해 정말 즐겁고 행복했던 기간이었습니다.

당신들은 세계야구에 대한민국을 심었으며,
스스로에게는 또 하나 나아가야할 곳에 대한 목표와 동기를 심었습니다.
아울러, 우리 모두에게 자부심을 심어주었습니다.

18일동안 당신들이 보여준 동작과 웃음과 눈물은 
하나 하나 우리에게 전율이었고 긍지였으며 미래에 대한 다짐이었습니다. 

당신들이 있어 자랑스럽습니다.
그래서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이제 열흘 후 시작되는 2009년 프로야구 페넌트레이스를 통해
새롭게 진화할 당신들을 보게될 설레임이 벅차게 요동칩니다. 





나까지마...  이건 플레이는 좀 심하지...
이용규 도루할 때도 헬멧이 부숴질 정도로 다리를 심하게 갖다대고 허리를 강타하듯 터치하더만.
아무리 이름이 [나 까지마]지만, 이러면 팬들에게 까일 수 밖에 없을걸... 




[거꾸로 생각하는 프리즘] 야구팬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의미없는 가정...

9회말 마지막 공격 2사 1, 2루 상황.
대한민국 타자 중 대회기록이 가장 좋은 공격의 핵 3번타자 김현수와 4번타자 김태균을
대주자 이종욱과 이택근으로 교체했다는건 김인식 감독이 연장전보다 9회에서 승부를 결정짓겠다는 의지의 표시.

타자는 대회기간 중 타격감이 좋고, 전 타석에서 안타를 친 이범호.
일본의 투수 다르빗슈로서도 긴장되는 상황이다.
당연히 투구동작도 신중해질 수 밖에 없는 순간.

이때 허를 찌르는 더블스틸이라는 초강력 승부수를 띄워봤으면 어땠을까...
2루주자가 이종욱이었고, 1점이면 동점이 되는 그런 상황에서 3루 송구가 빠지는 상황까지도 감안한다면
조지마 포수의 3루 송구도 어지간한 자신감과 배짱이 없으면 쉽지않았을텐데... 
강민호와 조지마의 경력이나 능력이 다르기 때문에 단순 비교는 의미가 없지만,  
연장 10회초 2사 2루에 있던 이치로의 3루도루 때 우리 포수 강민호가 던지지 못한 것도 그런 이유였을터.

더블스틸을 시도하여 성공했다면 이범호의 안타 때 모두 홈으로 들어와 4 : 3 극적인 역전승.
아마 그랬다면 김인식 감독의 강심장에 세계가 다시한번 경악했을걸...

물론, 이건 즐거운 상상에 지나지않는다.
더블스틸이 실패했다면 절망적인 아쉬움에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을테니까.
하필이면 최고의 타자들인 김현수와 김태균이 발빠른 이종욱과 이택근으로 바뀌어서 해본 생각이다.

근데, 정말 한번 해봤다면 어찌됐을까...??? 
결과가 무척 흥미롭고 궁금한 가정이다.

:
최근 TV드라마에 대해 말들이 많다.
한동안 지나치게 선정적인 화면과 내용이 문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것은 이미 얘기꺼리가 안되고
소재나 테마가 일상의 범위, 그리고 사회규범이나 상식의 윤리를 벗어난 소위 막장 드라마가 판을 치고 있어
우려의 소리가 높다.  가장 대표적으로 욕을 먹는 드라마가 [아내의 유혹]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또 하나 신기한 것은 욕을 먹으면서도 시청율은 높다는거다.
비판하는 사람과 선호하는 사람의 계층이 극단적으로 나뉘어있는게 아니라면, 우리의 심리도 야누스적인 부분이 많은가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같은 방속국의 드라마 중 정말 감동받으며, 칭찬하고 추천하고픈 드라마가 있다.
주말드라마인 [가문의 영광].
드라마를 즐겨 보지않는 지연이마저 꼭 챙겨보는 [가문의 영광]을 볼 때 마다 
이 드라마는 우리 사회, 우리 가정의 교과서라는 생각이 든다. 






멸문한 가문을 일으켜세운 하만기회장의 하씨宗家와 명문가로의 위장이 지상최대의 목표인 졸부 이천갑회장의 가정이
중심축이 되는 이 드라마는, 모텔에서 외도를 하던 시동생이 복도에서 젊은 남자와 함께 있는 하씨종가의 맏며느리인 형수와
조우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이후 두 집안을 배경으로 드라마를 끌고가는 소재가 끊임없이 생성된다.

겨우 가문을 일으켜세워 가문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하씨종가는 하만기회장의 기대와는 달리 
자손들의 엉뚱한 행실로 바람잘 날이 없다. 

어렸을 때 정혼을 하여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종가집 맏며느리가 된 손주며느리는 애정없이 결혼한 연하 남편과의
의미없는 결혼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위장외도를 하여 가문을 더럽힌데 대해 책임을 진다는 명분으로 이혼을 청하고,
둘째손주며느리는 남편의 거듭되는 바람기를 참을 수 없어 이혼을 하는 바람에
이미 상처한 외아들을 포함해 아들과 손자들이 모두 홀몸이 되는데,

이후 아들은 같은 회사의 대학후배를 임신시켜 결혼을 하고, 두 손자들도 가문의 명예를 중시하는 종가집의 개념으로는
맞아들이기 어려운 상대들과 각각 재혼을 한다.  손녀 또한 가치관이 다른 졸부의 아들과 결혼을 하게되고,
아들보다 나이어린 여동생은 젊을 적 연인에게 결혼 사기를 당한다.

졸부 이천갑회장은 수단방법을 가리지않고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쇠락한 명문가의 족보를 사들이려하고
비열한 M&A 등을 통해 사회적 명예를 추구한다.

드라마는 하씨종가 내부의 간단치않은 가정사와, 삶의 방식이 다른 종가와 졸부집안이 부딪히며 생기는 갈등을
풀어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내가 이 드라마에 흠뻑 빠지게된 이유는 이런 여러가지 갈등요인을 풀어가는
방식 때문이다.
          

벌써 50회를 목전에 두고있는 [가문의 영광]이 다른 드라마에 비해 지루함없이 주말이 기다려지는 것은,
이야기 전개의 핵이 되는 갈등의 부여와 해결방법이 기존의 드라마와는 색다르기 때문이다.
보통의 드라마가 전체적인 큰 줄기의 갈등요인을 설정하고 그것을 풀어가는 과정에 다시 2차 갈등요인을 던지는 형태라면,
[가문의 영광]은 줄기를 이루는 큰 갈등없이 적절하게 부분적인 갈등을 끊임없이 제시하되, 짧게 짧게 해결을 해나간다.
이야기를 비비 꼬거나 질질 끌지않고, 자연스럽고 억지없이 간결하게 풀어나가기 때문에 보는 입장에서 짜증스럽지가 않다.
마치 같은 제목으로 한달에 한두편의 옴니버스를 보는듯한 느낌이랄까.  

[가문의 영광]을 높히 평가하는 이유는,
이 드라마에서 갈등들을 풀어나가는 해법으로 보여주는 키워드가 [합리]와 [존중]이기 때문이다.
드라마에 나오는 개개인의 캐릭터를 보면 대부분이 발생한 상황을 자기만의 주관이 아닌 객관적으로 보려하고,
나의 입장을 내세우기보다 상대방 입장을 이해하려 애쓴다.
      
특히, 여기서 눈길을 끄는 역할이 하만기회장(신구)과 아들 하석호사장(서인석)이 재혼한 맏며느리 이영인(나영희),
그리고, 이천갑회장(연규진)이다.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전통양식으로 치루는 종가집 종손인 하만기회장은 사고칠건 다 치는 가족들을 대함에 있어,
한번도 가문의 명예를 들먹이며 자손들의 행보를 가로막는 법이 없다.
전통적인 기준을 중시하면서도 그 틀 속에서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아집이 없다.
나이어린 여동생을 위한 혼자만의 어려운 결정을 가슴에 묻고 다니며,
아들과 손자들의 행실을 망신이라고 탓하거나 나무라지않고 이해하려 애쓰고,
이혼을 청하는 손자며느리들을 체면이나 위신을 위해 억지만류하기 보다 장래까지 살피는 넉넉한 마음으로 보내주고,
형식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자유분방한 새며느리의 생활습관을 이해하여 개방적인 제안도 수용할줄 안다.
권위와 고집만을 내세워 자손들을 불편하게 하기보다, 자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한 집안의 어른으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집안의 문제들을 수습하는 지혜인지를 보여준다.

하씨종가에 중도에 들어온 맏며느리 이영인은 상당히 쿨한 성격으로 형식과 가문을 중시여기는 전통적 집안과는
도저히 아울릴 것 같지 않지만, 자신의 자유분방한 성격과 종가의 전통문화 사이에 나름대로의 기준을 설정하며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나간다.  특히, 전처의 자식들에 대한 불편부당한 처신과 가족에 대한 애정으로
자신이 살아온 방식과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자연스럽게 자리매김한다.

졸부 이찬갑회장은 드라마 초반 냉혹한 금전만능주의자로 나오지만, 차츰 삶에 대한 가치관이 바뀌면서
자신보다 변화속도가 더딘 까탈스런 아내의 자존심을 살려주며 아내의 변화를 이끌어나가고 있다.

이러한 행동들을 이끄는 힘이 시대와 사회의 흐름과 변화를 이해하고 인정할줄 아는 합리적인 수용성
나와 다른 환경 속에서 나와 다른 습성을 가지고 생활해온 상대의 다름을 존중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드라마는 보여주려한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실천하기 위한 방안으로 드라마가 제시하는 것이 있다.
바로 [고운 말]이다.      

[가문의 영광] 대사를 듣다보면 절로 감탄하게 되는 예쁘고 고운 말들이 너무 많다.
이런 표현들은 특히 하씨종가의 손녀 하단아(윤정희)와 종손 하수영(전노민), 그리고 하단아를 연모했던 학생
정현규(이현진)을 통해 많이 표출되는데, 상대를 감싸고 어루만지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가득 느껴지는
아름다운 말들이 보고 듣는 이의 감성을 풍요롭게 만든다.

생각이 다른 상대와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는 화법,
그리고 의중이 다른 윗어른이 마음 상하지않게끔 자신의 생각을 예의를 갖춰 전하는 표현법들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한마디로 [가문의 영광]은 우리가 살아가며 교본으로 삼아야할 교과서가 아닌가 싶다. 
드라마를 볼 때 마다 이런 주옥같은 표현들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작가에게 경이로움과 고마움을 느끼게된다.    



집안의 어른으로서 힘든 결정을 내릴때 마다 외로움과 힘든 마음을 돌아가신 부친의 영정 앞에 앉아 달래며  
권위를 버리는 권위로 묵묵히 가족의 든든한 버팀목과 그늘임을 보여주는 신구의 깊은 내면 연기,

종손으로서의 부족함을 느끼며 늘 부친에게 미안해하면서도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않으려 애쓰는
소박한 마음의 아버지를 보여주는 서인석의 가감없는 소탈한 연기,

자신은 졸부라는 호칭을 받지만 자식들에게 만큼은 명예로운 집안을 몰려주고싶어하는,
그러면서도 자신의 본질을 굳이 숨기려하지않는 연규진의 정이 가는 맛깔스런 연기, 

그리고, 동화속에서나 존재할 것 같은 예쁜 사랑을 나누는 전노빈과 신다은의 담백한 연기와
가수 마야의 좌충우돌 털털한 연기도 보는 재미가 있지만,    

곁가지로 말하고싶은 것은 하태영役 김성민.
멜로에만 어울릴 것 같았던 김성민의 연기는 대단하다.
뭔가가 빠진듯 덜렁대면서 다혈질이고, 그러면서도 잔정이 매우 많은 하태영은 상당히 귀엽고 매력적인 캐릭터인데,
김성민은 그 캐릭터를 마음이 짠한 눈망울의 진지한 표정과 웃음이 절로 나는 코믹한 행동으로 멋지게 표현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주말 저녁을 편하게 보낼 수 있게 해주는 이런 좋은 드라마가 있어 참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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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마.. 했다.
그런 선택을 할거라곤 생각지않았다.
커다란 꿈을 가졌었고 아직도 그 꿈을 완전히 버리지않은 것 같았기에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4.29보선에서 전주에 출마를 결심한 것으로 전해지는 정동영 前민주당 대통령후보의 이야기다.

대선에서 실패한 뒤 그는 이어진 총선에서 자신의 정치입문지이자 고향인 전주를 떠나 서울에 출사표를 던졌다.
여기까지는 정치인으로서 인정할 수 있는 정치적 수순이었다.
그런데 총선에서 역시 맞불을 편 한나라당 정몽준후보에게도 패해 낙선을 한 후 미국으로 몸을 피한 그가
이번 재보선에 다시 출사표를 던진 것이다.

정치인이 정치를 계속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정치적 돌파구를 모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이야 누구나 늘 거창하게 내걸지만 결국은 정치가 그들의 직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인으로서의 정점인 대선후보, 그것도 군소정당이나 무소속도 아닌 유력정당의 대선후보라면 달라야한다.
국회의원으로 만족하는 정치인을 직업중의 샐러리맨에 비유한다면 대선후보를 지낸 정치인은 사업가가 되어야한다

샐러리맨이라면 굳이 힘든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냥 쉽게 가면 된다.
샐러리맨을 폄하하는게 아니라 결과에 따른 선택이 아무래도 오너보다는 편할 수 있다는 얘기다.
때문에 샐러리맨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보다는 결과물이 다소 작더라도 안정성에 비중을 두게 된다.

하지만 오너의 경우는 다르다.
물론 오너도 개인의 성향에 따라 선택이 다르겠지만, 평상시에는 안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상황를 반전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높은 위험성에 과감히 도전을 한다.
큰 승부를 걸 수 있는 것이 큰 그릇의 덕목이기 때문이다.
큰 승부를 걸지 못하는 오너는 큰 사업을 할 수 없다.
그리고 그 큰 승부는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다. 그래서 큰 그릇은 하늘이 내린다고 한다.


방송앵커로 인기가 있었던 정동영氏는 전국 최다득표로 각광을 받으며 정치에 입문했다.
그리고 빠른 판단력과 적절한 처세로 화려하게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져나갔다.
정치인으로서 그가 보여준 판단과 변신에 대해서는 논하고싶지않다.
그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 또 그를 지지하는 입장과 반대하는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을 떠나, 어쨌든 그가 한 국가의 대통령후보까지 됐다는건 어떤 형태로든 능력이 입증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그가 이번 재보선에서 지난 총선의 지역구로 선택한 동작乙을 떠나 다시 전주로 돌아간다고 선언했다.
고향에서 새출발을 하겠다고 출사표를 던졌다.  분열이 아닌 덧셈의 정치를 하겠다고는 것이 출마의 辯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의 전주 출마를 놓고 벌써부터 민주당에서는 말이 많다.
민주당 내부 뿐만이 아니라 민주당을 지지하는 계층들도 인터넷에서 찬반이 엇갈린다.
덧셈의 정치를 하고자 한 선택이 시작도 전에 뺄셈과 나누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난 총선 유세과정에서 지역민들에게 "동작乙에 뼈를 묻겠다" 고 수없이 공언했다.
동작동 국립묘지의 위치가 동작甲인지 동작乙인지도 모르겠고, 정치인의 국립묘지 안장기준이 뭔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동작乙에 뼈가 묻힐거같지는 않다. 

아니, 어쩜 자신의 그 말조차 기억못할거 같으니 그 말은 빼더라도, 적어도 덧셈의 공식은 알아야할거 같다.
전주는 누가 출마를 해도 민주당 몫이라는건 대한민국 유권자라면 누구나 안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그가 정말 덧셈의 정치를 하려면 민주당이 어려운 지역에서 민주당 의석 하나를 더할 노력을 해야하지 않을까.
그럴 때 사람들은 결과와 무관하게 그의 충정을 이해하고 박수를 보낼 것이다.

전주를 선택한 그의 결정은 가장 안전한 선택인 동시에 가장 불안한 선택이다.
전주는 국회의원으로서 재기하기 위한 그에게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선택이다.
하지만, 큰 정치인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상당히 위험한 선택이기도 하다.
누가 그에게서 강하고 굳건한 승부사의 면모를 느낄 것인가.

그는 이번에도 실패하면 자칫 정치인으로서 잊혀질지도 모른다는 조급함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노무현 前대통령과 대비된다. 대통령으로서의 성공이라든가 자질을 논하기 전에 그 과정이 그렇다.
노무현 前대통령은 늘 세상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움직였다.
정치인으로서 쉬운 길보다는 누구도 이해하기 힘든 작은 가능성에 도전했다.
실패의 확률이 더 크다는걸 그라고 몰랐겠는가. 
그럼에도 그가 좁은 길을 선택한 것은, 그게 실은 밑지는게 아니라 최소한 본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모두가 어렵다고 생각한 것은 실패한들 창피할 것도 없다. 
이기면 영웅이 되지만, 지더라도 승부사의 이미지를 남기게 된다.
사람들은 승부에 초월해보이는 승부사에 차츰 호감을 갖게 되고, 한번쯤은 그와 함께 승부를 걸어보고 싶어한다.
그게 사람들의 묘한 심리이며, 그걸 알며 기다리는 시간이 그릇의 크기와 비례한다.


백제의 장수 계백은 지는 싸움임을 알고도 황산벌에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정동영氏가 민주당, 나아가 한국정치의 밀알이 되고자한다면 전주에 씨를 뿌리는게 맞다.
하지만, 결코 [밀알]만으로 만족할 생각이 아니라면 그는 짧은 수 보다 먼 수를 바라보면서
지는 싸움에 과감히 승부를 걸어보아야 할 것이다.
:

몇년전 역술을 하시는 분을 만나 나눴던 이야기 한토막.


나 : 선생님 혹시 성명학도 공부를 하셨습니까?
그 : 뭐때문에 그러시죠?

나 : 흔히들 이름도 좋은 이름과 나쁜 이름이 있다지않습니까?
      좋은 이름은 부를수록 계속 좋은 기운이 쌓이게 되지만, 나쁜 이름은 부를 때 마다 복을 깎아내린다고...
그 : 말씀하시죠..

나 : 네.. 요즘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서 보통 필명이라는걸 사용하는데,
      저 역시 '물 흐르듯 순리대로 살자'는 의미로 江河라고 만들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사용하다보니 이제는 제 본명보다 이 필명으로 불리우는 경우가 더 많아지더군요.
      그러다보니 이 江河라는 필명이 제게 맞는 이름인지 궁금해서요.

그러자 그 분은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듯 하더니 말을 잇는다.

그 : 여기 감자하고 고구마가 있다고 생각합시다.
      감자를 들여다보며 "넌 지금부터 고구마다. 고구마야...  고구마.., 고구마... 고구마..."
      이렇게 백날을 고구마라고 불러본들 감자의 본질이 변하겠습니까?
      감자는 감자일 뿐이죠.
      혹시 김봉수나 백운학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김봉수...  백운학...
나도 익히 들어본 이름이다.  그들이 누구인가?
한때 대한민국의 난다긴다하는 정계,관계,재계 인사치고 그들을 찾지않는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명성을 떨치던 역술과 작명의 거장들이 아닌가. 
소위 복비나 작명료만 해도 엄청났다는데, 한가닥한다는 집에서 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지으러 찾아오기도 하지만,
해가 바뀌거나 각종 조직의 인사철이 되면 찾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 줄을 서야 할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던 분들이다.

나 : 그 분들 명성은 저도 들어봤습니다.
그 : 만나보셨습니까?

나 : 아닙니다. 제가 학생시절에 명성을 날리셨으니 저와는 세대가 다르기에...  단지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엷은 미소가 언뜻 스치는가 하더니 건조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그 : 고관대작들이 손(孫)을 보면 좋은 이름을 받기위해 다들 찾곤했던 분들이죠.
      사람들이 생각하는 좋은 이름이 뭡니까?  출세하고 명예얻고 재물을 취할 수 있는 이름일텐데..
      그럼, 그렇게 최고로 인정받은 그 분들의 자손들은 다 잘됐을까요?
      그 정도 되는 사람들이 자기 자손 이름 작명에 얼마나 신경을 썼을텐데,
      그 자손들은 다 대학도 잘 들어가고 결혼생활도 순탄하고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됐을까요?

그러네... 그들 중에서도 대학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을테고, 잘 안풀리는 사람도 있었을테고..
흥미로운 지적에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그 : 문제는 이름이 아니고, 그 사람이 가지고있는 운(運)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運이 들어올 때가 있고 運이 나갈 때가 있습니다.
      運이 들어올 때는 뭘 해도 잘되고 運이 나갈 때는 뭘해도 안됩니다.
      그러니까 運이 들어올 때 기회를 잘 살리고 運이 나갈 때 손실을 최소화하는게 중요하죠.
      
      예를들어, 김우중氏 보세요. 한때 김우중氏가 대한민국 재계를 주름잡을 때 많은 작명가들이
      김우중氏의 이름을 풀어 사주와 엄청나게 잘맞는 정말 좋은 이름이라고 칭송했습니다.
      이름덕을 본다고들 했죠.  하지만, 지금 김우중氏의 처지가 어떻습니까??  이름 때문이라면 계속 잘 나가야지요.
      결국 김우중氏도 운이 들어올 때 그 운을 잘 살려 명성을 얻은 것이고, 운이 나가기 시작하니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이름이란 남이 부르기 편하고 본인이 들어 즐거우면 좋은 이름입니다.
      선생님처럼 본인이 의미를 담아 그 마음으로 생활할 수 있으면 그게 좋은 이름이지요.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오며 [좋은 이름]이란게 정말 있긴 있는건지 다시한번 생각해봤다.
있다면 어떤 것이 [좋은 이름]인지, [좋은 이름]의 정의가 무엇인지도 궁금했다.
그리고, [좋은 이름]이 삶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건지도.

[유관순]이라는 이름은 어떤 이름일까?
한 나라의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겼으니 좋은 이름 같은데,
스물도 안된 나이에 단명했으면 나쁜 이름인가?
[관순]이 아닌 다른 이름이었다면 생이 달라졌을까?

[이완용]은 어떤가?
암울했던 식민시대에 죽을 때 까지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렸으니 개인에게는 재물과 명예를 준 좋은 이름인데,
후세에 가장 치욕적인 이름이 된걸 보면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거 같기도 하고.

한 나라의 최고권력자인 대통령을 역임한 후 수감생활을 하신 분들의 이름은 어떻게 판단해야 하나?
정몽주가 다른 이름이었다면 선죽교에서 철퇴를 맞는 일이 없었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다보니 호칭을 달리 부른다고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그 분의 말씀에 수긍이 간다.
 

작명법에 대해 주워들은 풍월이 있다.
한자로 이름을 지을 때 한자 획수가 짝수와 홀수로 구성돼야지, 짝수나 홀수로만 구성되면 좋은 이름이 아니라는.
그런데, 江河는 한자 획수가 6획과 8획으로 모두 짝수다. 
그 부분이 좀 아쉬우면서도 스스로 부여한 뜻도 좋고 발음도 맘에 들어 아쉬움을 담은 채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날의 우문현답으로 나의 마음 한구석에 담겨있던 오랜 아쉬움을 모두 날려보낼 수 있었다.

그래.. 맞아...
남이 부르기 편하고 내가 들어 좋으면 그보다 좋은 이름이 어디 있겠나.
중요한건, 내가 담았던 의미대로 순리대로 사는게 내 이름과 내 삶을 스스로 돋보이게 만드는게 아닐까.



:

동호회 정모를 마치고 여주의 한 식당에서 뒤풀이를 한 적이 있었다.
1/n로 식비를 걷어 계산을 마치고 나와서는 누군가 한마디한다.

"주인이 참 융통성이 없네...  아니.. 20만원이 넘었으면 우수리는 떼도될걸 그래 3천원까지 다 받냐...
 저렇게 장사해가지고 단골이 생기겠어??"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과연 그게 탓할만한 사안인지 궁금하다.

가끔 일부 사람들의 행동이 이해 안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 경우 난 그런 사람들에게 두가지를 묻고싶은 충동을 느낀다.

하나는, '그 사람의 입장을 제대로 알고있는가?' 와,
또 하나는, '모든 경우에 똑같은 주장을 할 수 있는가?' 다.

누구나 고객입장에서 바라는 것은 비슷하다.
저럼한 코스트로 양질의 대우를 받고싶은 것.
하지만 그런 이상적인 희망은 현실에서 충족되기가 싶지않다.
저렴한 코스트로 받을 수 있는 대우는 제한될 수 밖에 없으며,
양질의 대우를 받으려면 일정수준 이상의 댓가를 지불해야하기 때문이다.

간혹 저렴한 코스트로 양질의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경우가 있을순 있지만,
그건 극히 제한된 시간과 공간에 한할 뿐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착각하곤 한다.
그리고 그 한정된 경험을 모든 경우에 당연시 적용하려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저가정책도 마케팅의 방법이고, 고가정책도 마케팅의 방법이다.
굳이 구분을 한다면, 저가정책은 저소득층을 대상으로한 판매전략이고
고가정책은 고소득층을 겨냥한 판매전략이다.

저가정책은 재료비나 인건비 등 판매비용의 구성요소를 낮추고 낮춘데다가 마진도 낮추는 것이고,
고가정책은 판매비용의 코스트도 높겠지만 그보다 마진을 상당히 높게 잡는게 대부분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싼 것엔 더 야뱍하고 비싼 것엔 더 후하다.
시장 좌판의 콩나물값은 더 깎거나 콩나물 한줌을 더 얹으려 기를 쓰고 
저렴한 식당에서는 서비스안주를 당연한듯 요구하거나 계산서의 우수리를 떼고싶어 하면서도,
백화점의 고가품을 대상으로는 흥정할 생각을 못하며 고급식당에서는 자진해서 팁까지 쥐어준다.

좀 심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강자에겐 오그라들면서 약자의 등을 치는 행위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물론 서민들의 사회에서 좀 깎아달라는 말이 정겨운 상행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서로간의 정담수준으로 그쳐야지 그걸 당연한 요구나 조건으로 내새워서는 곤란하다.


잘해주는 집에 단골이 생기겠지만, 사실 순서는 단골에게 잘해주는게 맞는 것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쟁일지도 모르나, 손님이 정당한 값을 치루는게 먼저이기 때문이다. 
저렇게 장사해서 단골이 생기겠냐는 말이 걱정으로 들리지않고 속좁은 사람의 투정으로 들리는 까닭이다.

과부심정은 홀아비가 안다는 우리 속담도 있는데,
이상하게도 서민들의 상행위에서는 그 말이 통용이 안되는거 같아 안타깝다.               


10만원을 치루고 그만한 대우를 받았다면, 만원에 해당되는 대우가 만원의 댓가임을 알자.
만원을 지불하고 10만원의 대우를 바라는건 억지다.

고객은 무조건 왕이 아니다.
고객은 자신이 처신하는 만큼 왕이 될 수도 있고, 대신이 될 수도 있고,
선비가 될 수도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평민이 될 수도 있다.


소비자와 판매자는 서로 평가하고 평가받는 것이다.
권리에만 당당하려 하지말고 먼저 의무에 당당하자. 
 
합리적인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다면, 합리적 사고를 할 줄 알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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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는 김수한 추기경의 선종으로 온 나라가 숙연했던 한주였다.

매스컴은 추기경께서 선종하신 날부터 장례일까지 매일 시시각각으로
그 분의 살아오신 삶을 재조명하며 애도물결을 집중보도했다. 

그 기간 난 애써 TV를 외면했다.
생전의 모습을 뵐 수 있는 기회였음에도, 그 모습을 뵙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 뻔뻔한거 같아서다.
그 분의 모습을 뵈면서 떠오를 너무나 많은 죄스러움이 두려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전을 하면서 켜놓은 라디오를 통해 들리는
그 분에 대한 이야기마저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이상한건 그 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나도 모르게 축축해지는 눈시울로 시야가 흐려지며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더라는거.
부끄러움 때문인가...

그 분은 그렇게 내 속에 숨겨졌던 신앙에 대한 마지막 양심을 일깨워주고 가셨다.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그 분이 세상에 남기신  마지막 말씀이란다.


:
TV를 보다보면 왠만한 와이드프로보다  짧지만 더 재밌는게 있다.
바로 CF로 일컬어지는 광고.

15~20초로 제한된 짧은 시간에 잔상이 남는 비쥬얼을 동원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강한 임팩트로 담아야하는 CF광고는 그야말로 무한한 창의성의 전쟁이다.

요즘의 CF를 보고있노라면 과거와는 엄청나게 변했다는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촬영에 동원되는 물량이나 배경 등 기법은 물론이거니와 더 놀라운 것은 기발난 아이디어.
20~30년전의 광고가 CM Song을 통해 기억에 각인시키는 방법에 많이 의존했다면,
요즘의 광고는 콘티부터가 이채롭다.  그리고 그 콘티를 살려주는 copy가 감칠 맛이 엄청나다.

    
때문에 예전엔 TV를 보다가 광고가 나오면 채널을 돌리곤 했지만,
요즘은 오히려 광고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런 현상은 광고문구나 대사가 세간의 유행어가 되고, 광고가 패러디 대상이 되는 것만으로도 반증된다.

최근 몇년간 기발한 아이디어의 광고들이 꾸준히 선보였지만
그중에 특히 이동통신업계의 양대산맥인 SKT 와 KTF 에서 시리즈로 내놓은 CF들은 
온국민에게 광고라는게 지루하지않고 재밌게 즐길 수 있는 콘텐츠라는,
광고의 일반적인 패러다임을 바꾸어놓은 계기가 되지않았나 싶다.           

KTF의 [SHOW를 하라]는 세간살이를 바꾸고싶어하는 시골에 계신 부모님의 재기넘치는 모습을 통해
모든 시청자들에게 핵폭탄같은 웃음을 선사하며 3G 영상폰의 특성을 1000% 이상 구현했고,
이에 뒤질세라 SKT는 [생각대로 T]의 로고송인[생각대로 하면되고~~]
힘든 시기에 모든 이들이 희망메세지를 담을 수 있는 국민 로고송으로 만들어버렸다.

광고는 이제 이렇게 우리 곁에서 함께 호흡하며 우리 실생활의 길라잡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한 광고를 보고 나는 절로 짜증이 났다.

그 광고의 copy는 (정확한 표현은 아닌지 모르겠지만) 이런 문맥이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물음에...   그랜져로 대답했습니다.]

이 광고의 제작팀과 특히 카피라이터에게는 매우 결례되는 말씀이지만,
정말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한마디로 속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관점에서,
특정 자동차를 사회적 신분의 척도로 내세운 이 카피는 결정적으로 두가지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그랜져가 과연 사회적으로 인정받을만한 신분의 척도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CF에 등장하는 모델의 연령을 감안한다면 그 나이에 그랜져는 우월적 지위를 상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부를 궁금해하는 친구에게 그것을 내세울 정도라면 그는 타인을 배려할줄 모르는 소양이 덜된 사람이 아닌가.  
  
두번째 오류는, 역으로 그랜져가 사회적 신분의 척도라고 가정하는데서 나온다.
첫번째 오류가 상대적으로 어려운 사람에게 치기어린 과시로 보일 수 있다면,
상대적으로 훨씬 경제적여건이 나은 사람 입장에서는 가소롭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광고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요새 다 어렵잖아...  나도 힘들어서 외제차 팔고 그랜져로 바꿨어...'
이런 뜻도 되잖아... 하는 시니컬한 생각마저 드는건, 정말 요즘 어렵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2년쯤 전인가...  
"아버지는 내게 그러셨지..  인생을 즐기라고..." 라는 copy와 함께 
여성들과 화려한 레져를 즐기는 콘티의 신용카드 CF가 있었다.
그때도, 인생에 대한 아버지의 조언이 저런 늬앙스는 아닌데...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어린아이를 등장시켜 "**이가 사는 곳은 ***입니다." 라는 copy의 아파트 CF와
요즘 가끔 눈에 띄는 화려한 교복 CF도 젊은 층에게 미칠 수 있는 신분의 위화감을 생각할 때 안타깝다.



공익광고가 아닌 상업광고는 광고를 통한 매출증대, 즉 영리추구가 최대목적이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광고를 제작하고 더 막대한 비용을 들여 방송에 내보내는 이유다.
때문에 누구도 목적에 맞게 기획되고 제작된 광고에 대해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조금만 더 세심한 시각과 다양한 관점에서 콘티를 구성하고 카피를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사회의 층이 다양해지면서 그만큼 복잡한 인식의 스펙트럼을 맞추기가 점점 어려워지는게 사실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모든 사람을 편안하게 아우르고 하나로 묶는 수작(秀作)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광고는 정말 보는 재미가 있다. 
즐거운 광고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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