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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2.14 지펠하우스에서 들은 내 생애 최고의 연주 2
대부분의 도시와 마찬가지로 여기 하이델베르크에도 1박만 할애되어 있기 때문에
붉은황소에서 오랜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어 조금 아쉽지만 지펠하우스로 자리를 옮겨야했다.

지펠하우스를 들어선 순간 독일이란 나라, 그리고 독일사람들에 대해 어렴풋이 잡히는게 있었다.




붉은황소와 마찬가지로 지펠하우스의 벽면도 많은 빛바랜 사진들로 채워져 있는데,
내 생각에는 이 가게 주인의 선조들과 가족들의 사진들이 아닌가 싶다. 
흥미로운건 사진 중에 군인의 사진이 많다는 것이다.
아마도 조국을 위해 전쟁에 참전한 것을 자신과 가문의 명예와 영예로 생각하는 마음이 큰 모양이다.
이런 모습들은 우리도 한번쯤 되새길 필요가 있다.

또 하나 재밌는건, 인테리어와는 애초부터 전혀 무관한듯 모든 곳이 온통 난도질을 당했다는 점.
벽면은 물론 테이블까지 나무로 되어있는 모든 곳은 저렇게 어김없이 칼로 새긴 문구들로 성한 곳이 없다.
오랜 기간에 걸쳐 이곳을 찾은 손님들이 기념으로 남긴 저런 흔적이 오히려 이 집을 전통있는 명소로 만든 것이다.

이 대목에서 궁금해지는거 몇가지.
모든 책상과 사방이 저런 모습을 보이니 전혀 이상해 보이지도 않고 연륜이 쌓인 것처럼 보이지만,
처음부터 주인이 날잡아 며칠사이에 일부러 저러지는 않았을테고, 처음 몇군데만 저런 흔적이 남았을 때는
무척 보기 흉했을텐데, 그걸 주인은 어떻게 참고 넘겼을까??

또 하나는, 처음에 주인이 저렇게 해도 좋다고 공지문을 붙이지 않았다면,
어느 매너없는 사람이 남의 가게 멀쩡한 것에 처음 칼질을 할 생각을 했는지... 
참 대단한 배짱이다.


어쩌면 이랬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취객 한놈이 술김에 포크로 테이블에 자기 이름을 새긴다.
그러다가 주인에게 걸려 그 녀석은 된통 혼나고, 주인은 변상을 받으려 했지만,
얘는
"돈이 없으니 배 째~~~"
결국 흠집난 테이블만 바라보며 속앓이를 하고 있는데, 며칠 뒤 다른 술취한 놈이 그걸 보고는 지도 객기가 발동...
그러기를 몇차례...  결국 주인은 자포자기 상태에서 더 이상 통제할 의욕도 잃고,
그러면서 세월이 흐르다보니 저렇게 생각지도 않은 볼거리로 명소가 되어있더라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따라 삼천리...

어찌됐건 그 역사의 현장을 순순히 지나칠 한민족이 아니잖는가...
이곳을 다녀간 배달의 민족 누군가가 동서독으로 나뉘었던 독일과 남북으로 나뉘어있는 우리의 처지에서
동질의식을 느꼈는지 [통일한국]이라고 크게 하나 새겨놓았다.  1997년에 다년간 모양이다.


붉은황소의 백발노인과 달리, 지펠하우스에서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친구가 피아노 연주를 한다.
전형적인 독일노래를 요구하자 어렸을 때 들어본 귀에 익은 노래가 많이 나온다.
그렇게 독일민요 대여섯곡을 연이어 들려주더니 잠시 뜸을 들인 후 연주하는 노래는 놀랍게도
[아리랑].

오~잉~~~ @>@...  정말 뜻밖의 곡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젊은 피아니스트를 바라보는데,
연주를 끝낸 그가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싱긋 웃는다.
놀라움과 감격 속에 웃으며 박수를 치는 우리를 보며 그의 곁에 있는 여자가 피아니스트에게 무어라 말하자,
그녀에게 "They are Koreans." 라고 말하며 다시 우리를 보고 웃는다.

그 순간 해줄 수 있는게 박수 밖에 없어 계속 박수만 치는 우리에게 미소를 보내고 다시 건반을 향한
그의 다음 곡 연주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경악과 함께 얼이 빠지고 말았다.

그의 열 손가락이 건반을 타고 움직이면서 피아노에서 울려 나오는 선율.

정말 아름다운 그 곡.. 
정말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그 곡..
더구나 악보도 없이 그가 연주한 그 곳은...
.
.
.
.
놀라웁게도
[아침이슬]이었다.

처음 한두소절이 연주될 때도 믿기지가 않았다.
저 노래가 정말 [아침이슬]인지 믿기지가 않았고,
내가 정말 이 순간 하이델베르크의 한 술집에 있는 것인지 믿기지 않았고,
저 곡을 연주하는 사람이 정말 이곳에 사는 독일인인지 믿기지가 않았다.

[아침이슬]은 70년대 대한민국의 아픔과 그 시대 젊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대표적인 노래이고,
미래의 자유를 갈망하고 확신하는 국민의 정서와 혼을 담은 노래인데,  
이 노래를 독일의 한 지방도시에 있는 작은 선술집에서 듣게 될 줄이야...

그가 연주한 [아침이슬]은 여지껏 내가 들어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아침이슬]이었다. 

벅차오르는 감격을 억누르며 연주를 마친 그에게 다가가 이 노래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니
한국 유학생에게 악보를 받았단다.
하지만, 그가 이 노래에 별 관심이 없었다면 이렇게 악보없이 연주할 정도가 됐겠는가..
악보없이도 이렇게 연주할 정도라면 많이 해봤다는 얘긴데, 그건 곧 이 노래가 마음에 들었다는 반증.

서로 짧은 의사소통으로 세밀한 대화가 안된 것이 아쉬웠지만,
왜 이 노래를 좋아하느냐는 나의 물음에 답한 그의 말에는 이런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sentimental...   good feeling...   attractive song...




내 생애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연주를 들려준 지펠하우스의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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