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다니기/2001 유럽배낭여행'에 해당되는 글 153건

  1. 2009.05.18 배낭여행기 유감 2 - 아쉬움만 남았다. 2
  2. 2009.05.15 배낭여행기 유감 1 - 소도 웃을 게으름이 빚어낸 뻔뻔함 2
  3. 2009.05.10 Epilogue - 여행이 주는 의미 4
  4. 2009.05.02 배낭여행의 꿈을 이루게해준 "여보~ 고마워요." 2
  5. 2009.05.01 마지막 만난 한국청년.. 당당하길... 2
  6. 2009.04.28 배낭여행, 그 마지막 밤.
  7. 2009.04.24 유럽을 변화시킬 Euro貨 1
  8. 2009.04.22 흥미로운 유럽의 대중교통
  9. 2009.04.21 변화에도 효율을 판단한다
  10. 2009.04.03 독일의 실용주의에서 한국의 미래를 본다. 1
  11. 2009.02.17 이래서 이런 것들이 발달한 건 아닐까??
  12. 2009.02.13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힘이 느껴지는 라인강
  13. 2009.02.10 역사의 잔재가 느껴지는 하이델베르크城
  14. 2009.02.08 이렇게 좁은 게 세상이라는 걸 실감나게 한 동욱兄의 소식 1
  15. 2008.12.23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16. 2008.12.14 지펠하우스에서 들은 내 생애 최고의 연주 2
  17. 2008.12.13 백발의 낭만이 부러웠던 [붉은황소]
  18. 2008.12.12 칼테오도르 다리와 네카강 주변 2
  19. 2008.12.09 하이델베르크대학
  20. 2008.12.04 하이델베르크 도착 2
  21. 2008.12.03 지식이 짧으면 요령이라도 있어야 버틸 수 있다
  22. 2008.12.02 그림엽서 보 듯 돌아보는 로텐부르크
  23. 2008.12.01 독일 최고의 古都 로텐부르크 4
  24. 2008.11.29 빛나는 문화유산 탄생의 아이러니
  25. 2008.11.27 프랑스와 독일의 차이 - TGV와 ICE
  26. 2008.11.25 모든 언어가 통일되어야 할 것
  27. 2008.11.24 차분하면서도 강인함이 느껴지는 뮌헨
  28. 2008.11.18 더치페이... 보지못한 사람은 논하지마라.
  29. 2008.11.15 브로이하우스에서 배우는 독일식 효율
  30. 2008.11.14 연령 초과로 쫒겨난 뮌헨의 유스호스텔

 

많은 분들의 댓글을 통한 격려에 고마운 마음을 드립니다.

배낭여행기 폴더의 저장글 갯수 151이라는 숫자를 보고 나도 깜짝 놀랐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렇게 쌓였구나...  
아마 처음부터 150회에 걸쳐 올릴 생각을 했다면 절대 불가능한 수치다.
지레 겁을 먹고 시작도 하지 않았을테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렇게 길게 끌고갈 수 있었던 분명하고 확실한 원동력이 있다.

블로그를 방문해 달아주신 많은 분들의 댓글. 
그런 댓글이 없었더라면 아마 중도에 중단됐을지도 모른다.
지쳐 한동안 뜸을 들이다가도, 요즘 여행기가 안 올라온다는 한 줄의 댓글에 사명감(?)을 느끼곤 했다.
누군가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몽상이 나를 끝까지 몰고간 것이다.

많은 분들의 댓글 - 배낭여행기를 마칠 수 있게해준, 나에겐 가장 큰 격려였다. 


여행기를 올리며 느꼈던 몇가지 아쉬움을 끝으로 이제 모든 이야기를 마무리하자.

첫번째, 괸심을 갖지못했던 일상사진.

카메라의 저장매체가 당시로는 고용량인 256MB 메모리카드였지만,
37일간 곳곳의 다양한 모습을 욕심껏 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때문에 이삼일에 한번 씩은 촬영한 사진 중 중복된 것이나 질이 떨어지는 것을 삭제하곤 했다.
여기에 여행후 사진을 CD로 제작하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사진들을 
일부 다시 정리했는데, 이게 참으로 미련한 짓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대부분의 일반 여행자들은 여행사진을 찍을 때 기념이 될만한 것을 담는 반면,
전문 작가나 여행가들은 보통사람들이 별로 눈여겨보지 않는 이면의 모습이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본질을 중요시한다.
그런 모습을 조명함으로써 이역(異域)의 생경한 문화와 관습을 경이와 감동으로 전하는 것이다.

경험이 부족한 나역시 그랬다.  주로 유적의 모습을 담았으며,
그나마 곁가지로 담은 모습마저 정리를 하며 많이 없애버린 것이다.

그런데, 글을 올리다보니 그런 곁가지(?) 사진들이 무척 아쉬웠다.
소소한 이야기일수록 사진을 곁들이면 더 재밌고 감칠 맛이 있겠다는 생각이 자주 든 것이다.
나의 경험부족에서 온 시행착오였다.
   

두번째, 다양성이 부족한 단조로운 소재.

외국에 갈 기회가 있을 때 마다 관심을 갖고 들러보려는 곳이 있다.

현대식빌딩의 화장실 - 오피니언 리더층의 꾸미지않은 시민의식을 알고싶을 때.
초등학교나 중학교 - 그 나라 현재모습의 근원과 미래의 모습을 보고싶을 때. 
재래시장 - 서민들의 생활상이 궁금할 때.
유흥가 - 가장 본능적인 욕구가 궁금할 때.

이번에도 그러고싶었지만, 37일간의 일정은 유적지만 돌기에도 너무 빡빡했다.
물론 처음부터 일정을 그리 잡을 수도 있었겠지만, 유럽이 처음인 초이에게 나만의 관심사를 강요할 순 없었다.

여행기를 올리며 가장 아쉬웠던 게 이렇듯 내용의 소재가 유적 중심으로 너무 단조로웠다는 점이다.
유럽 각 지역의 다채로운 모습과 사람들의 오밀조밀한 삶을 다양하게 보지 못한 게 무척 아쉽다.
  

세번째, 절감한 표현능력의 한계.

무얼보든 느낌은 단순해도 별 문제가 없다.
대단한 걸 여러 곳에서 보더라도 그때마다 "야~~" 하고 감탄만 해도 된다.
유럽을 돌며 커다란 유적물이나 대단한 탑을 볼 때 마다 "대단하다~~' 하고 놀라기만 하면 됐다.
곳곳의 웅장한 성당들을 보면서도 "웅장하네.." 하고 경탄하면 됐다.

하지만, 글로 옮기다보니 생각도 못했던 게 문제로 다가왔다.
수많은 유적지에 대해 글을 올리면서, 그때마다 매번 "대단하다" 혹은 "웅장하다" 고만 표현할 수는 없었다.
한두번도 아니고 새로운 것에 대해 매번 유사한 표현만 사용한다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얼마나 재미없고 지루하고, 또 짜증나겠는가.

글이라는 게, 쓸 때는 느끼지 못 하지만 작성된 글을 읽어보면 같은 접속어나 수식어가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누구에게나 습관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어휘가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도 글을 쓴 다음에는 반드시 몇 번을 읽어보며 나도 모르게 반복 사용하는 표현을 수정하여 
문맥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다른 소재의 이야기들을 단편적으로 글로 표현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걸
비슷비슷한 소재들에 대해 계속 묘사해야 하는 여행기를 올리며 표현력의 한계를 절감한 것이다.
50년동안 한국어로 생각하고 표현해왔는데 왜 이렇게 사물이나 느낌에 대한 다양한 묘사를 못 하는지...
정말 어휘 구사력이 너무 보잘 것 없다는 생각을 처음 해봤다.   
   

마지막으로, 현실성의 결여.

2001년 11월~12월에 다녀온 배낭여행기를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한 건 2005년 8월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끝난 건 2009년 5월이다.
더구나 글의 형태가 "~~였다. 혹은, ~~했었다." 라는 과거나 과거분사형이 아닌,
여행중 작성한 기록에 따라 "~~한다. ~~에 있다." 는 식의 현재진행형으로 기술되다보니,
길게는 8년전의 이야기가 마치 지금 보고 느낀 것 처럼 오해를 불러올 수가 있다.

2001년에 내가 본 것이 지금은 전혀 다른 모습일 수도 있고,
때문에 당시 받은 느낌과 지금 전해지는 느낌이 다를 수가 있기 때문에,
중간에 내 블로그에서 여행기를 읽으시는 분들, 특히 최근에 같은 곳을 돌아보시거나
그 지역에 거주하시는 분들께 민망하기도 하다.
특히, 최근에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여행정보를 얻는 경우도 많아, 자칫 내 블로그를 통해
이미 바뀌어버린 잘못된 정보를 취하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든다.




그들은 무얼 하고 있을까?



여행 중에 만났던 많은 사람들은 지금 무얼하는지 궁금하다.

첫 기착지인 암스테르담에서 만난 사법시험 합격자들은 중견 법조인이 됐을까?
직장을 다니며 경비를 벌어 배낭여행 다니기를 2년 주기로 반복한다던 아가씨는 그후 몇 번을 더 다녔을까?
나폴리에서 만난 캐나다에 유학중이던 청년과, 인터라켄에서 만난 영국 유학생은 지금 어느 나라에 있을까?
융프라우에서 만났던 젊은 여성 사무관도 지금쯤 중견 간부가 됐겠다. 참 예의바른 아가씨였는데...

터키를 한달간 돌아본다던 청년.
로마의 민박집에 늘어져있던 청년들.
여행 첫날 배낭을 잃어버리고 침낭과 1회용 카메라를 들고다니던 청년도 생각난다.
마지막 날 프랑크푸르트에서 본 청년은 독일유학을 예정대로 마쳤을까??

그들에게 당시의 여행은 무엇을 주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지금 어떤 모습으로 각자의 영역을 구축해 나가는지도 궁금하다.
만날 수만 있다면 그때의 이야기와 함께 사는 모습들도 보고싶다.

아~참~~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한국관의 여사장님과 아주머니는 어떻게 지내실까...



한때 르포라이터를 동경하던 시절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기 쉬운 가리워진 이면을 들추어 숨어있는 의미를 찾고 싶었다.
모두에게 익숙한 평범함을 재조명하여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 

직장생활을 마치고 기회가 만들어지면 해보고싶은 일이었는데,
여행기를 작성하며 깨달았다.  내겐 너무 역부족인, 희망사항일 뿐이었음을. 
이면을 볼 수 있는 능력도, 새로운 의미나 가치를 묘사하고 표현할 능력도 나에겐 허락되지 않았음을 안 것이다.



여행이 주는 의미도 중요하지만,
여행을 정리하며 얻는 교훈도 소중함을 알게된 작업이었다.

:
1989년인가 90년인가 처음 외국이란델 나가봤다.
외국이라고 하지만 가장 가까운 일본임에도 다른 나라에 간다는게 왜 그리 설레이던지..
출발하기 전 여행에 필요한 준비물을 수첩에 적기 시작한 것이 내 여행기록의 시작이 됐다.

사람의 외모부터 우리나라와 별반 차이가 없는 일본이었지만,
나이 서른을 넘어 처음 접하는 이국의 모습을 꼼꼼히 메모했다.
내 발길이 닿았던 곳, 우리와 조금이라도 다른 것을 놓치지않고 기록하려 했던 이유는,
어쩌면 남들에게 해줄 이야기꺼리를 많이 남기고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중에 뭔가 아는 척은 해야겠는데, 회사 출장으로 나간 것이라
자유롭게 돌아다닐 시간도 별로 없고, 머리도 나빠 기억력에도 한계가 있으니
자그마한 것이라도 세밀하게 적어놔야 많이 아는 것 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그러니 많이 본 것 처럼 하기 위해서라도 별거아닌 것도 무조건 적어야만 했다.
말 그대로 적자생존이었다.  적어놓아야만 나중에 떠들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출장에서 돌아와 출발하기 전에 챙겼던 준비물 리스트를 보며
불필요했던 것과 누락됐던 것을 정리해보았는데, 후에 처음 출장을 가게된 후배가
그 자료를 유용하게 활용하는걸 보고 매우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홍콩과 마카오, 이어 호주와 뉴질랜드, 유럽, 그리고 미국과 캐나다를 들락거릴 때 마다
나름대로 메모를 열심히 했는데, 우스운건 메모를 하면서도 한편으론 '내가 왜 맘 편히 여행을 못하고
고생을 사서 하나..'
하는 생각이 늘 따라다니더라는거.

하지만, 지나보면 항상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요즘에는 인터넷의 발달로 여행지의 문화나 역사 등 여행지에 대한 정보는 넘쳐난다.
그렇더라도 
그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나만의 느낌이나 감성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그러한 느낌이나 감성은 여행을 할 당시의 여러가지 여건에 따라 동일인에게도 늘 다르게 와닿을 것이다.
그래서 그때그때의 느낌을 기록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배낭여행의 기록은 나에게 그 결정판이었다.
내가 경험한 가장 긴 일정이었고, 한번에 가장 많은 곳을 돌아보는 여행이었기에
정리를 하면서 누락되거나 헷갈릴 것을 대비해서라도 겪은 것을 더 세밀하게 기록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디지탈카메라도 장만했다.  여행시 사용하던 나름 괜찮은 필름카메라가 있었지만,
장기간 많은 곳을 다니면서 촬영을 하다보면 필름가지고는 안될거 같아서였다.  
필름가격, 필름의 보관, 인화비, 그리고 사후보관까지 생각하니 도저히 무리라는 생각에 
당시로서는 최고사양이라는 300만화소를 64만원인가에 구입했던거 같다.
메모리카드도 당시로서는 용량이 제일 컸던 256MB.  큰 맘 먹고 큰 돈 쓴거다.
무리라는 생각이 무리한 지출을 유발한 셈.  하지만 그 효과는 분명히 컸다.

여행을 마치고는 바로 여행기를 정리했어야 했는데, 생각이 많았다.
그냥 기록한 노트를 보관해도 되지않을까...
괜히 정리한다고 시작했다가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는거 아닐까...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는 게으름 속에 4년이 흘렀다.
어찌보면 정리를 한들 어차피 내 컴퓨터 속 문서로만 존재할거라는,
정리에 대한 목표의식이나 동기부여가 안됐다는게 게으름의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던 중 정리의 계기가 된게 블로그다. 
뭔가 포스팅을 해야하는데, 올릴 아이템은 별로 없고...  
그때 '아~~ 배낭여행기를 올리면 한동안은 포스트 소재 걱정은 안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이게 엄청난 착각이다.
처음엔 재밌고 신났다.  지난 기록들을 정리하면서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는게 참 즐거웠다.
사진과 여행일지를 대비시키다보니 마치 내가 그 때 그 현장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신기하리만큼 당시의 모든 상황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마치 입체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처음부터 세세하게 묘사를 하다보니 이야기 분량이 엄청 길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단순히 나의 느낌이나 경험적인 사항이 아닌, 역사적 사실같은 부분은 혹시라도 오류를 범할까봐
일일히 백과사전을 찾아보고 사실확인을하다보니 당초 생각 이상으로 신경 쓸 것도 많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이렇게 하다보면 언제 끝날지 나부터 가늠이 안될 정도였다.

그렇다고 갑자기 대충 형식적으로 올리자니 앞서 올린 것과 내용과 형식이 너무 차이가 날거 같고,
무엇보다 대충한다는건 내 자존심 상 용납이 안된다.  차라리 안하는게 낫지... 
그렇다고 중간에 그만두는건 더 그렇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스스로의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정리를 하다 지겨울 정도로 지치면 그냥 내팽개쳐두고,
그러다 또 생각이 나고 원기가 좀 돌면 다시 끄적이다 또 나자빠지고...
그러기를 반복하다 2005년 8월 8일 처음 올린 여행기가 2009년 5월 10일 끝났다.
처음엔 블로그를 찾아오시는 분들께 예의가 아닌거 같아 미안한 생각도 들었지만 개의치않기로 했다. 
그냥 내 글 정리하는건데, 편하게 하지 뭐...   뻔뻔해진거다.


그런 곡절 끝에 배낭여행을 다녀온지 7년 4개여월 만에 여행기가 끝났다.
여행을 다녀온지 3년 8개월만에 여행기를 시작한 것도 웃기는 일인데,
고작 37일간의 이야기를 그로부터 4년 가까이 지나 현실성이 상당히 떨어진 상태에서 다시 
3년 9개월이라는 기간동안 151회에 걸쳐 올렸으니, 학창 때 쓰던 용어로 썰을 참 길게도 풀었다.

밭 갈던 소가 웃을 일이다.


:
.

모르는 곳.
미지의 세계.
떠남.
배낭.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하는 단어들이다.
나에게도 여행은 늘 동경의 대상이다.

특히,
다른 언어, 다른 역사, 다른 습성을 가진 곳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차이점, 그리고, 우리와의 차이점을 살펴보는 것은 대단한 즐거움이다.

상상.
호기심..
이런 것들을 충족시켜 나가는게 여행이다.
여기에 배낭여행은 낭만을 덤으로 준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데는 배낭여행에 대한 갈망이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
더 이상의 늦춤은 꼭 해보고싶었던 것을 하기에 점점 걸림돌이 늘 것만 같았다.
관광버스를 타고 깃발을 따라 주어진 코스를 따라 움직이는 여행은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내 의지대로 가고싶은 곳을 다니려면 조금이라도 몸이 가벼울 때가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37일간 12개 나라 42개 도시를 돌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말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도시간 이동이 아닌, 시내를 돌아다닐 때는 거의 걸었다.

많은 것을 보고싶었다.
그동안 책에서 보고 사진으로 본 것들의 실체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싶었다.

본 것들을, 보면서 생각나고 느껴진 것들을 빼놓지않고 기억 속에 담아놓고 싶었다.
그러기위해 쉬지않고 적었다.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이 나올 때까지 적었고,
열차에서도 부족한 잠을 청하는 대신 노트를 집어들었고, 지하철에 서서도 적었다.
숙소에 들어가서도 적은 것을 들여다보며 하루종일 하고다닌 행동을 떠올리면서
누락된 것이 없는지 몇번씩 확인하고 덧붙이기를 반복한 37일이었다.

많은 것을 보았다.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부러운 것도 많았고, 왜 우리는... 하는 아쉬운 마음도 많았다.

실현 가능성이 낮은 희망사항이지만, 많은 공무원들이 배낭여행 기회를 가졌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국가간 협력을 통한 연수가 아니라 개인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느끼고 정책에 반영할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재벌2세들이 선진국 유학을 마치고 바로 경영수업을 쌓기보다, 몇달간 이렇게 자유롭게 다니며
소프트한 감성을 키우는 것도 도움이 될거란 생각도 해봤다.
어차피 승계할 기업.. 급할 것도 없지않은가.

곳곳에서 만난 우리 젊은이들에게서 여러가지 인상을 받았다.
진취적인 기백의 젊음에 놀라기도 한 반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드는 젊음도 보았다.
내가 만난 모든 젊음들의 그 시간들이 그들의 인생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끼칠 것이다.

예상치못한 곳에서 본 한글, 태극기 등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심볼들은
대한민국이 동방의 한 구석에 자리한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아님을 알려주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은둔의 나라가 아닌만큼, 아직도 은둔시켜 놓은게 있다면
이제 그것을 적극적으로 내놓아야 할 것이다.


책이 호기심을 현실로 안내하는 지름길이라면,
여행은 호기심을 현실과 연결하는 가장 정확한 통로다.

지금도 세계 각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또 다른 세계 각국의 땅과 바다와 하늘을 누비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방식은 바뀔지언정 인류가 존재하는 한 여행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동경과 호기심은 인류가 결코 버릴 수 없는 본능이며,
그것을 가장 풍요롭게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것이 여행이기 때문이다.

여행은 감성을 자극한다.
여행은 감정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여행은 상상을 아이디어로 만든다.
때문에
여행은 포기할 수 없는 로망이다. 

37일간의 배낭여행은 나의 감성을 자극했고,
내 감정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많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했다.

여행기간 중 아쉬운게 있었다.
우리나라에 적용하면 좋을거 같은 아이디어가 생각날 때 마다
그런 아이디어를 검토하고 적용할 수 있는 기회가 이미 나에게는 없다는 점이다.
이미 나는 그런 위치로 돌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 길이 있을 수도 있겠다. 
공무원이나 관료가 되기는 늦었더라도, 시의원이나 구의원은 나이 제한이 없으니...



사람들이 어디가 좋았냐고 물으면 어디라고 하나...

프랑스의 아비뇽은 처음 인상이 강하게 남아 다시 찾았던 곳인데, 여전히 좋다.
이번에는 벨기에의 브뤼헤가 꼭 다시한번 들르고싶은 곳으로 남는다.
포르투갈도 기회가 되면 다시 찾고싶다.





 순간순간의 저 표정에는 그때마다 각기 다른 생각들이 담겨있었을 것이다.




발길 닿을 때 마다 무엇이 우리와 다른가를 찾아보려했고, 왜 우리와 다른가를 느껴보려했다.



또 가고싶다.
:
유럽에 들어올 때 Swiss knife 때문에 암스테르담 스키폴공항에서 그렇게 헤매더니,
나갈 때도 프랑크푸르트공항에서 한참을 헤매고 다닌다.
집사람 선물로 프랑스에서 구매한 화장품의 tax refund 서류작성 때문에 세관을 찾는데,
security zone 밖에서는 security zone 안에 있다 그러고, 안으로 들어가면 다시 밖에 있다 그러는 통에
security zone을 네번이나 들락거렸더니 입구에 서있던 흑인직원이 희한한가보다.
하긴 같은 복장을 한 두놈이 몇번을 들락거리니 저놈들은 뭐하는 놈들인가 싶기도 하겠다.

두번째 들어갈 때 "우리 또 왔다." 고 했더니,
세번째 들어갈 때는 자기가 먼저 "되게 바쁜 모양이네.." 하며 웃는다.
네번째 들어가며 "정말 마지막." 이라고 하니, 웃으며 하는 말이 "사요나라~~"

뭔나라??  사요나라???
이런...  그 표현만 안썼어도 백점인데, 씰데없는 표현은 해가지고 스스로 점수를 깎아 먹는다.
하기사 이리 헤매고 다니는 사람을 일본인으로 봐주는게 다행일지도..


마지막 에피소드.

프랑크푸르트에서 경유지인 암스테르담에 도착하여 서울行 항공기에 탑승하여
비행기 출입문에 들어서 안으로 들어가며 좌석을 찾는데 좌석줄이 24번부터 시작된다.
어~~ 우리 좌석은 11번줄인데...  이상하다.. 11번줄은 어디 있는거야?
방향을 바꿔 앞쪽으로 이동하려니 거긴 Business Class다.  여기도 아닌거 같고...

초이가 승무원에게 탑승권을 보이며, "이 좌석은 어디예요?" 고 물으니,
Business Class를 가리키며 "이쪽입니다." 그런다.

@ㅁ@..  아니 이게 왠 횡재!!!
Economy Class가 over booking 되다보니 일부를 Business Class로 돌린 모양인데,
우리가 그 행운을 안은 것이다.   WOW~~  정말 막판에 기분 캡이다.
그동안 환전하며 손해본거, 쾔른 다녀오느라 추가된 300DM 까지 일거에 모두 만회되는 느낌.

한달 이상 돌아다니며 걷느라 고생 많았으니 돌아가는 길이나마 이제 좀 편하게 가라는 누군가의 배려인가.
마지막 여행의 대미를 유종의 미로 장식하게 해준 KLM 항공사에 감사드린다.




비행기 창 너머 몽고의 여명이 밝아온다.
이번 여행 중에 여러 곳에서 뜨고지는 태양을 보았다.
파리와 리스본을 가로지르는 야간열차에서 지평선 너머 사라진 태양이 또 다른 지평선에서 다시 떠오르는 것을 보았으며,
끝없이 이어지는 슈방가우의 설경을 비추며 아침을 밝히는 태양도 보았다.
리스본 떼주강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석양, 그리고,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바라보던 붉게 물든 피렌체의 모습도 잊을 수 없다.
여러 곳에서 바라보던 태양, 지구 상의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는 저 태양을 나는 이제 대한민국에서 바라볼 것이다.
그 어느 곳 보다도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이제 20분쯤 후면 인천 영종도공항에 도착이다.

아비뇽 골목 식당에서 먹은 음식으로 며칠 식중독 증세가 있었고,
초이 역시 니스서 부터 발이 불편해 한동안 걷는데 불편함이 있었지만,
첫 장기간의 여행을 무리없이 마치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렇게 오래 전 부터 희망사항으로 꿈꾸며 동경해왔던 배낭여행이 끝났다.

장기간 양보하고 이해하며 동행해준 Choi가 너무 고맙다.
내 등에 찰싹 달라붙어 무거운 짐들을 품고다닌 배낭.. 너도 수고 많았고,
그 속에서 5주간을 구겨진 채로  공기도 제대로 못 쐬며 쪼그리고 다닌 옷가지 짐들도 애들 썼다.
게중에 무엇보다 신발!  개똥 밟아가며 유럽 12개국 42개 도시를 돌아다닌 네가 정말 고생했구나.

하지만, 가장 고마운 대상은 따로 있다.

이번 여행을 이해해주고 정신적으로 지원을 해준 집사람.
여행 중 전화통화시 마다 "아무 생각말고 건강하게 즐거운 여행해요. 너무 돈 생각하지 말고,
먹고싶은거 먹고, 보고싶은거 보고, 하고싶은거 다 하고 와요."
라며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 집사람이다.


여보~~!!   너무 고마워요.
당신 덕분에 나는 아주 즐거운 시간을 가졌는데, 함께 하지못해 미안해...  ^L^..
:

[ 2001. 12. 20 ]

 

 

마지막 날. 

서울로 돌아가는 날이다.

 

마지막 식사를 하기위해 식당으로 내려갔는데 한국청년과 합석을 하게 되었다.

어제 도착을 했다는데 유학을 위한 어학연수차 나왔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보니 나이는 29.  군복무를 마치고 개인사업을 하다가 왔는데,.

독일어는 잘 하느냐 물으니 8개월간 문법공부를 하다 왔고, 경영학을 전공하려 한단다.

물론 학비가 무료라는 말에 독일을 택한 것인데,
글쎄
  그 나이에 문법 8개월 해서 경영학을 전공하기 위해 유학을 온다는게 과연 합리적인 선택인지 의구심이 든다.

또한 대화 도중 표정이나 말투에서 전해오는 느낌상 잘 버텨낼 수 있을지도 궁금하고.

 

또 하나, 이왕 나오려면 연말연시나 지나고 나오던가 하지,
왜 하필이면 크리스마스 직전에 나와 스스로 썰렁함과 외로움을 자초하는지.

하긴.. 어학과정 일정 등 내가 감안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을 수 있으니 그걸 내가 지적하는건 바람직스럽지 않다.

 

어제 도착해 전철표 끊는 법도 몰라 배낭여행온 17세 고등학생 뒤를 쫓아다녔다는 순한 표정의 그 청년이

빵이랑 치즈 햄 등을 잔뜩 가져와 아침을 먹으며 한 말이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

물가가 엄청 비싼거 같더라구요. 제가 원래 아침을 잘 안먹는데 여기는 어차피 무료제공이니까 많이 먹고 나가려구요.

 

그저 하던 일이 있었다니 너무 조급하고 답답하게 생각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보고 안되면

젊을 때 좋은 경험 쌓고 돌아가서 하던 일 한다는 기분으로 건강하게 지내라. 는 말 밖에 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한가지 확실하게 각인되어진게 있다. 

나 자신의 신분!

 

처음 나폴리에서 캐나다 유학생 최건을 만났을 때 이 친구가 아저씨~ 아저씨~~ 할 때만 해도
아직 학생이니까 나이차가 많아서 그렇게 부르는구나. 그랬는데,
그 뒤로 만나는 한국 배낭족마다
나에 대한 호칭은 아저씨. 
조직생활을 하며 직급으로만 호칭되다 처음 아저씨라는 호칭을 들을 땐 이상하고 어색하더니,
이제 이 호칭이 나의 가장 확실한 신분임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래도 아저씨일 때 더 다녀야 하는데  할아버지 되기 전에.
:

쾔른역까지 바래다준 김동욱선배의 배웅을 받으며 프랑크푸르트行 기차에 올랐다.
참... 배낭여행을 계획하면서도 동욱兄을 만날거란 생각은 꿈에도 못했는데...
작별이 많이 아쉽다.  또 언제나 보려나...


프랑크푸르트는 독일의 공업도시다.
그래서인지 역에서 내려 대충 둘러봐도 여지껏 보아온 유럽의 도시와는 좀 다르다.
뭐랄까..  별 감흥이 없다고 해야하나...  그냥 사방이 서울에서도 많이 보아온 회색빛 건물들.

지하철을 타려 티켓을 뽑는데, 여기도 이미 유로동전을 사용하는 티켓 자동판매기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하긴 도입이 낼모레니...


유스호스텔 체크인 후 여장을 풀고 이번 여행의 마지막 저녁을 먹기위하여 
유스호스텔 뒷골목에 있는 식당을 찾았다. 

Choi가 우리 식으로 돼지족발 같은걸 시켰는데, 이게 형태는 족발과 비슷한데
음식의 색이나 맛이 우리 족발과는 사뭇 다르다. 
우선, 우리 족발이 좀 진한 색이고 어딘지 보기에도 좀 질긴 느낌이 든다면,
얘네들꺼는 색도 허여멀건하고 부드럽게 보이는게 마치 영계백숙 같다.
초이가 권해 몇점 집어먹는데 그렇게 연할 수가 없다.

그리고 결정적인 차이는 냄새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어떤 방식으로 찌는건지 삶는건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냄새가 없고 고기가 그렇게 연할 수가 없다.
돼지고기 중에서도 특히 족발을 별로 좋아하지않는 나로서도 손이 간다.


마지막 저녁을 먹고 유스호스텔로 돌아와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보이는 모습이 딱 독일풍이다.
프론트 앞에 7~8명이 맥주병 혹은 맥주캔을 들고서서 마시고 떠드는데,
이건 일하는 놈이나 묵으러 온 놈이나 똑같다. 누가 직원이고 누가 투숙객인지...
같이 프론트 앞에 빙 둘러서서 맥주마시고 담배피우며 얘기들을 나누느라 정신이 없다.
그나마 여긴 맥주마실 때 컵을 사용하지않으니 좀 낫다.
컵을 사용하며 남이 사용했던 컵을 물에 한번 담갔다가 꺼내 또 사용하는건 이상하더만.

한편에선 젊은 (젊다기보다 내 눈엔 새파랗게 어린) 여자아이들이 담배를 피우며 얘기중인데
50이 훨씬 넘어보이는 사람과 같이 담배를 입에 물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
유럽을 돌며 여자들 담배피우는 모습을 수도 없이 보아 별 이상할 것도 없지만, 독일은 특히 연령층이 더 낮은거 같다.
15세정도의 여자아이들이 담배를물고 거리를 다니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

room에 들어와 세면을 하는데, 햐~~ 이거 또 희한하네...
수도꼭지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찬물로 틀어놓으면 물이 계속 나오는데,
온수쪽으로 레바를 돌리면 한 10초 나오다 끊어지고, 다시 누르면 또 10초쯤 나오다 끊어진다.
절약하는 아이디어도 가지가지다.  2차대전 후 전쟁으로 피폐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독일인들은 담배를 피울 때도 열사람이 모여야 성냥개비 하나에 불을 붙였다더니,
이런 것에서도 독일인의 근검절약이 배어있는 모양이다.


이제 이번 배낭여행의 모든 일정이 사실상 모두 마무리됐다.

프랑크푸르트는 처음부터 이번 배낭여행 대상이 아니었다.  
단지 유럽에 들어가는 왕복항공권을 예매하다보니 암스테르담을 경유하는 [인천 - 프랑크푸르트]가
일정과 가격이 가장 무난하게 맞아 이 노선을 예매하여, 유럽에 들어갈 때는 암스테르담에서 내리고
유럽에서 나올 때는 독일을 마지막 방문국으로 하여 프랑크푸르트에서 나오도록 일정을 잡은 것이다.
재밌는 것은, 암스테르담을 경유하여 프랑크푸르트까지 운항되는 이 여객기의 노선이 
독일 항공사의 노선이 아니라 네덜란드 항공사의 노선이라는 점이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프랑크푸르트에 하루정도 일찍 들어와 시내를 둘러볼 시간이 있었을텐데,
예정에 없던 쾔른을 들렀다 오느라 그럴 여유가 없다.
내일 오전 10시까지 공항으로 나가 암스테르담을 거쳐 인천으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오늘밤은 피곤해도 쉽게 잠이 올거같지 않다.
이제 이 글을 쓰는 노트를 닫고 누워도, 눈을 감고 있어도, 그동안 보았던 것들이 어른거리고
겪었던 일들이 하나하나 스쳐지나갈거 같다.

그래.. 어차피 내일은 비행기 속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할텐데 그때 자도 충분하지..
억지로 잠을 청하기보다 밀려오는 잔상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맞고 즐기자.

:
유럽에서는 지금 2002년 1월 1일부터 도입되는 Euro貨에 대한 준비로 각국이 여념이 없다.
Euro 가입국가 중 영국과 스웨덴, 덴마크를 제외한 모든 나라와
Euro 미가입국가 중에서도 헝가리, 폴란드 등 동구권 10개국이 유로화 도입을 희망하는데,
2001년 1월부터 2월까지는 유로화와 현재 사용중인 자국화폐를 병행 사용하며,
3월부터 자국화폐 사용이 금지되고 오로지 유로화만 사용가능하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니,
전에 유럽방문시 쓰고남은 유럽 각국의 돈을 이번에 가져와 사용했어야 했는데 아쉽다.
그거 쓰자고 내년 2월까지 다시 유럽을 찾는다는 것도 그렇고, 암튼 이제 사용할 일이 없을테니
기념품의 가치로 만족할 수 밖에.

하여튼, 그래서 유로화가 도입되는 모든 나라는 가는 곳마다 시행에 대한 홍보포스터가 붙어있고
모든 상품의 가격표에도 현재 통용되는 화폐가격과 유로가격이 같이 명기가 되어있다.
식당의 메뉴판에도 유로단위로 가격표가 같이 명기되어 있다.
아마 국민들에게 현재 사용중인 화폐에 대한 유로화의 가치에 대해 감을 익히게 하려는 조치인거 같다.

그렇다면 각 나라의 이해가 걸려있을 도안은 도대체 어떻게 할까?
유로화 포스터를 유심히 들여다보니 지폐 7종, 동전 8종이 통용되는데,
지폐는 앞뒤면이 공통으로 도안되어 있지만, 동전의 경우에는 한면은 숫자 단위를 공통도안으로 하지만
다른 한면은 각국이 나름대로 도안을 하게끔 되어있는거 같다.
그러니까, 동전의 한면을 보면 이 유로동전이 어느 나라에서 제작됐는지를 알 수 있다.
수집 좋아하는 사람들은 각 국가별 동전을 종류별로 하나씩 모으려 할텐데,
그리되면 서랍 속에 들어가 잠자는 동전도 엄청나겠네.

문제는, 유로화가 도입되면서 각국은 어쩔 수 없이 (국가에 따라 의도적인 부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화폐개혁이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지하경제를 움직이는 Black Money에 비상이 걸렸다.
공개하기 곤란한 엄청난 자금들이 지금 갈 방향을 찾고있는데, 부동산과 같이 자금원이 드러나는 투자처는
곤란하기 때문에 그림이나 골동품 등의 구입에 눈을 돌리고 있다고 한다.


유로화가 시행되면 각국의 물가도 어느정도 선에서는 균형을 잡아가지않을까.
예를들어 coca-cola 한캔의 가격이 지금이야 화폐단위가 달라 바로 비교가 안되지만,
화폐가치가 통일이 되면 큰 차이가 날 수는 없지않겠는가.

유로화가 어떤 방식으로 발전해나갈 것이냐는 큰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과연 그동안 세계의 통화기준으로 운용되던 Dolla貨에 어느정도 대응할 수 있을런지,
그리고 세계금융시장에서 달러와의 주도권 싸움도 볼만할거 같다.
아울러 과연 영국의 Pound貨가 언제까지 자존심을 지킬 수 있을지도 흥미롭다.

유로화가 정착이 되면서 유럽이 정말 유럽연방으로 세계의 질서를 새롭게 만들 수 있을까??


그건 그렇고, 유로화가 도입되면 이태리 사람들이 제일 허전함을 느끼고 헷갈릴거 같다.
이태리화폐 리라는 현재 유럽에서 화폐가치가 대단히 낮기 때문에 대충 계산해서
2000리라가 1유로가 된다고 치면, 지금 화폐단위에서 무조건 "0" 세개가 날라가고도 또 2로 나누어야 하니
얼마나 허탈하고 썰렁할까...
  
가장 큰 화페단위였던 100000리라가 지갑 속에 50짜리 지폐로 변해있다고 생각해보라. 
심리적 상실감이 무척 클거 같은데...

어쨌든 앞으로 유럽여행하기는 편하게됐다.
각국을 넘나들 때 마다 일일이 환전을 안해도 되니 시간도 절약되고 환차손도 줄일 수 있고.

이럴줄 알았으면 배낭여행을 몇달 후에 나오는건데...






뒤셀도르프에서 라인강을 배경으로 연그린 선배인 김동욱 목사와 함께.
:
유럽 전체는 거미줄같은 철도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기차는 전기의 힘에 의해 움직인다.
그러다보니 규모가 큰 역은 전선이 어지럽게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대도시도 마찬가지다. 
대도시 중소도시 가릴 것 없이 tram이 전기에 의해 동력을 전달받고 있으며,
심지어는 전기로 움직이는 bus도 있다.

도시의 거리 전체가 전선으로 덮혀있는데, 
사거리와 삼거리의 교차로에서 그 복잡한 전선을 통해 좌회전과 우회전을 해가며
서로 꼬이지않고 엇갈려 빠져나가는 것이 참으로 신기할 정도다.

대중교통수단이 모두 전력에 의해 움직이다보니 매연이 없고 공기가 맑다.
우리는 몇십년 전에 전차를 모두 철거했는데, 유럽의 나라들은 수십년된 도심 도로 한복판의 선로를 이용해
대중교통수송과 쾌적한 대기환경 조성을 수행해나가고 있다.

서울의 도심에서 전차와 복잡한 케이블이 모두 사라졌을 당시, 서울의 미관이 엄청 깔끔해져 좋아했는데,
그렇다면 유럽의 사람들은 그걸 몰라서 아직 이러고 있는걸까??
도시공학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보아야할 뭔가가 있는거 같아 머리 속이 복잡하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대도시의 tram은 무척 낡았고 중소도시일수록 tram이 신형이고 산뜻하다는 점.
대도시는 예전부터 사용하던 것을 계속 사용하고, 중소도시는 새로 tram을 운용하면서 신형을 도입하기 때문이다.

우리같으면 어땠을까??
아마 대도시 것을 교체하면서 대도시의 노후된 것이 지방으로 내려가지 않았을까...
하긴, 지방자치제가 시행된 지금은 자치단체장의 자존심 때문에 그리 쉽진않을거 같다.
우리 자치단체가 또 폼 잡는데는 누구 뒤지기 싫어하니까.
그러니 예산도 없는데 청사를 크게 짓고, 단체장 승용차부터 바꾸지...

하여간 그 넓은 전 유럽의 모든 철도를 따라 전선이 연결되어 있다고 상상해보라.
전 유럽의 하늘에 전선이 거미줄같이 덮혀있다는 생각을...

또한 그렇게 되기까지 유럽 각국의 선로 및 전선공사, 그리고 운영시점에서의 전력의 공급과
각종 보수 관리 등에 대한 책임과 분담의 문제, 아울러 열차운행비용과 수익의 분배가 어떤 방식으로
협의되고 합의되는지도 정말 궁금하다.  각국의 이해가 복잡하게 얽혀있을텐데. 

:
독일은 변화를 싫어하는 나라다.
변화를 싫어한다는 것이 진화를 기피하거나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변화를 효율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추구한다는 것이다.
즉 가치가 적은 소모적인 변화라면 굳이 변화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않는거 같다.

그 예로 독일의 전화기는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거의 모두가 다이얼식이었다고 한다.
공업국가 독일이라는 이미지와는 정반대지만, 지금도 사무실에서는 다이얼식 전화기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변화하는 속도가 느리다고 해서 변화에 대한 반응속도가 느리다는게 아니다.
철저하게 검증하여 시행착오를 줄이고 잘못된 변화의 후유증에 대비하는 것.
이것이 독일인이 추구하는 효율적인 변화인가보다.




하이델베르크城에 보관되어 있는 도시계획도.

이 오래된 도시계획도에 [변화와 계획]에 대한 독일의 사상이 내재되어 있는듯 하다.     



독일은 전세계에서 가장 정확한 나라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기차운행에 대해서만은 실망이다.
뒤셀도르프에서 프랑크푸르트로 가기위해 마인쯔에서 갈아타는 기차편을 택했는데,
마인쯔 도착이 예정보다 10분이 늦는 바람에 계획했된 프랑크푸르트행 기차를 놓치고 다시 30분을 기다려야만 했다.
갈아타는데 30분을 기다린다는건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별일 아니지만,
독일에서는 철도망이 얼마나 세밀하게 운영되는지 갈아타기 위해 연결되는 기차의 간격이 보통 10분을 넘지않는다.
하여간 뭔일이 있었는지 대부분의 열차가 연착이다. 


독일에는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고속버스나 시외버스가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철도가 워낙 잘 발달되어있고 또 모든 가정이 자가용으로 직접 고속도로를 이용하기 때문에
고속버스라든지 시외버스가 존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진짜 없을까???   




기차가 연착되니 사진이라도 찍자고 초이가 한방.
:

[ 2001. 12. 19 ]


아침 식사후 동욱兄의 안내로 뒤셀도르프로 갔다.
뒤셀도르프는 라인강이 관통하고 있어 라인강을 곁에서 볼 수 있으며
소박하고 아담한 독일 작은 도시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단다.

구시가지를 돌다보니 길에 몇 나라 음식점들이 골고루 하나 씩 들어서 있는데, 한국식당 [Silla]도 보인다.
들어가보니 일본인들도 있고, 독일인들이 꽤 많이 식사를 하고있다.
우리나라 식당에 손님들이 많이 있는 걸 보니 괜히 기분이 좋다.




오른 쪽 미국 성조기 뒤의 하얀 색 돌출간판이 한식당 [Silla]의 간판.
길 왼 쪽에 있는 붉은 간판에 보이는 게 주부들에게 유명한 쌍동이칼 로고 아닌가...


한국의 엘란트라가 여기서 3만 DM란다.
원화로 1800만원이 조금 넘는 가격인데, 우리나라 보다 쌀 줄 알았더니 가격이 장난이 아니다.
근데 미숀이 약해서 아우토반에서 달리다보면 자동차 속도의 힘을 미숀이 따라가지 못 해 
고장이 잦은 모양이다.  이건 좀 창피하다.

유럽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Smart는 독일의 Benz와 스위스의 Swatch에서 합작하여 만든 차라는데,
이것도 가격이 3만DM정도 한단다.  콩알만하다고 가볍게 볼게 아니다.
차가 작다보니 안전성을 높이기위해 각종 첨단장치가 많이 가미된, 작지만 기술집약적 차라고 보면된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오토매틱보다 스틱 차가 압도적으로 많이 팔린단다.
또한 휘발류 값이 디젤 값과 큰 차이가 없다.  이유를 알아보니 디젤 차량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는 단순한 논리다.
영국은 디젤과 휘발유 가격이 똑 같단다.
때문에 국내에서의 생각으로 디젤차를 렌트하여 여행하는 사람들이 실망을 많이 하게 된다고.
RV형 디젤차가 늘어나는 추세인 우리나라도 몇년 뒤면 이렇게 되겠네...

고급차종인 Benz나 Audi, BMW 등도 스틱 기어에 디젤엔진이 많단다.
독일의 기능중심 문화 때문일 것이다.
자동차 엔진도 소음보다 아우토반을 힘있게 질주할 수 있는 강한 엔진을 선호하게 되고,
그 힘과 스피드를 얻기 위해서는 디젤엔진과 스틱기어가 더 적격이라는 얘기다.
또 그러다보니 디젤엔진의 기술개발이 잘 되어 힘 좋고 소음 적고, 또 휘발유엔진에 비해 매연도 없다고 한다.
게다가 연료 값도 비슷하니 힘 좋은 디젤차 선호가 이해가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디젤차의 이미지가 어딘지 고급스럽거나 세련되지 못해,
부유층이나 점잖은 계층보다는 활동적인 것을 좋아하는 젊은 층이나
짐을 싣고 출장이 잦은 사람들이 저렴한 가격때문에 선호하는 경향이 많은데,
향후 우리나라 자동차 시장의 판도 변화를 미리 보는 거 같아 흥미롭다.

:

일찍 해는 떨어졌고 날씨까지 엄청 추우니 주머니가 빈 사람은 갈 곳이 없다.
온기도 없는 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神에게 구원을 청하는 일 뿐이다.

"神이시여...  왜 제게 이런 어려움을 주시나이까...  제게 광명과 은혜를 주시옵소서..."

허구헌날 기원을 하지만 생활에 별다른 변화의 조짐이 없자, 기다림에 지친 나머지 짜증스럽게 내뱉은 말.

"에이~C...  神은 죽었구만.  그러니 이렇게 기도를 해도 대꾸가 없지..."


겨울에 유럽을 돌며 떠오른 생각 하나.

유럽, 특히 북쪽으로 갈수록 겨울에 해가 무지 짧아진다.
오죽하면 처음 암스테르담에 도착해서는 4시도 안됐는데 들어가 잘 생각을 했고,
부다페스트 스케이트장에 켜진 조명을 보고 늦게까지 스케이장을 연다고 생각한 것이 3시반이었겠는가.

해가 일찍 떨어지고 상점이 일찍 문을 닫으니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집에 일찍 들어갈 수 밖에 없는데,
집에 들어간다고해도 잠 잘 시간은 아니니 그 긴긴 저녁에 할 일이 별로 없다.
그러니 괜히 심심해서 이쪽에 있던 가구 저쪽으로 옮겨보고, 형광등에 뭐도 씌워보고,
또 멀쩡한 벽에 오만가지 치장도 해보고..  천정에 이것저것 매달아보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인테리어가 발달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런 장난질(?)은 그나마 있는 사람들의 몫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추위에 떨며 담요 한장 걸친 채 웅크리고 앉아 온갖 상념에 빠져들기만 한다.

- 나는 왜 이러고 살아야하나..
- 인간이란 무엇이고 삶이란 무엇인가...
- 인간의 존엄성은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일까...
- 구원자란 존재하는걸까...  그 실체는 무엇인가...
- 산다는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끊임없이 하다보니 철학과 신학이 발달한건 아닐까...


좀 우스한 유추지만, 유럽에서 인테리어와 철학, 신학이 발달한 이유가 나름대로 있는 것 같기도하다.
그럼 이런 질문이 되돌아 올 수도 있겠다.
"겨울에 날씨 추운데가 유럽뿐이 아니잖아..  북아메리카도 있고, 북아시아도 있는데 왜 유럽이 유독 그래?"

근데, 환경이나 조건이 같다고 모든 현상이 동일하게 나타나는건 아닌다.
북아메리카는 신대륙이라 할만큼 영국인이 이주하기 전까지는 문명이라는게 없었다.
그만큼 사람들의 생각하는 방향이나 인식의 틀이 다를 수 밖에 없다.
그건 북아시아도 마찬가지였을거다.  제국은 있었지만 문화적환경은 처져있었다.
반면에 유럽은 오랜 기간에 걸쳐 문화를 꽃피운 대륙이다.
없는 자들도 봐온건 있고 그만큼 생각의 깊이가 다르다.

또 하나 차이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유럽이 다른 대륙에 비해 빈부의 차이가 컸을 것이다.
북아메리카의 인디언들과 북아시아의 부족민들은 비슷한 집단생활을 통해
남들과 자신의 생활수준을 비교하여 크게 다름을 느끼지 못한 반면,
유럽은 부유층과 서민층, 그리고 빈곤층의 격차가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부유층은 모든 것을 동원해 화려함을 추구하고, 서민층은 있는 것으로 오밀조밀 무언가 만들어내고,
빈곤층은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 뒤처진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것이 같은 기후환경이지만 다른 문화가 생성된 요인 중의 하나가 아닐까 추정해본다.


인류학자는 아니더라도, 여행을 다니면서 이런저런 것을 서로 연관하여 생각해보며,
엉뚱한 해석을 해보는 것도 나름대로 여행의 재미가 아닐까.

:
하이델베르크의 한국식당은 여지껏 다녀본 외국의 한인식당 中 가장 인간적인거 같다.
[인간적]이라는게 현지의 치열한 생존경쟁을 겪어보지 못한 다소 감상적인 표현인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아주 친절하다.

어제 점심을 먹은 [황태자식당]에서도 김치찌개를 시키자, 김치 등 반찬들을 무료로 주고
"한국음식을 먹지못해 얼마나 먹고싶었겠냐" 며 밥도 한그릇 더 주며 많이 먹으란다.
그렇게 고마을 수가 없다.  마드리드의 [한강]과 비교가 된다.




하이델베르크 구시가지 전경.

독특한 지붕형태와 붉은 색조가 마치 예쁜 동화마을을 보는듯 하다.
저건 누가 통일을 시킨건지, 아님, 개개인들이 절로 저렇게 맞춰간건지 궁금하다.  


Frankfrut 로 들어갈 일정을 바꿔 김동욱선배를 만나기 위해 쾔른으로 향했다.
Eurail pass 유효기간이 끝나 처음으로 현금을 내고 티켓을 끊었는데, 1인당 83마르크다. (약 52000원)
되게 비싸다.  그러고보니 그동안 Eurail로 탄게 장난이 아니었구나...
목돈들이더라도 Eurail pass를 장만하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절로 든다.
안그랬다면 기차시각에 맞춰 표를 구하는 것도 번거로웠겠지만, 그때마다 일일히 드는 비용에
돈.. 돈... 돈.... 하면서 엄청난 중압감에 눌릴뻔 했다.


기차가 한시간여를 달리자 우측에 물이 넘실거리는 커다란 강이 나타난다.
언뜻보아도 물살의 힘이 느껴지는 강이다.
폭도 넓거니와 깊이도 있는 듯 커다란 바지선들도 보인다.

독일의 동맥이라고 일컫는 라인강이다.

기차가 계속 라인강을 끼고 가는데, 수많은 바지선들이 라인강을 타고 계속 오르내리고 있다.
자동차를 싣고 가는 바지선도 있고, 컨테이너를 선적하고 가는 바지선도 있다.
유람선만 왕래하는 세느강이나 한강과는 달리 화물을 가득 실은 배들이 왔다갔다 하는 모습에서
강의 무게와 힘의 차이가 느껴진다.

이번 여행中 본 많은 江 중에 Portugal 의 떼주강이 가장 기억에 남았는데,
라인강을 보는 순간 왜 라인강을 독일의 젖줄이요, 동맥이라고 하는지 실감이 난다. 
특히 경이로운 것은 근 1시간 30분여를 강을 따라 달리는 동안
강의 양단을 연결하는 다리를 하나도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마치 강의 양단이 남남인 것 처럼, 이 강이 국경처럼 느껴질 정도로 철저히 다리가 없다.

그리고 강가에 선착장과 도크를 만들어놓아 화물선의 중간 경유지 뿐만이 아니라
강 양단을 연결하는 교통시설로 활용하고 있다.  이렇게 교량 대신 배로 강의 양단을 연결함으로써 
강을 오르내리는 바지선들이 운행에 제한을 받지않을 뿐 더러 자연에 대한 미관도 좋아보이는데,
수많은 선박들로 인한 환경오염문제는 어찌 해결하는지 모르겠다.  
이 사람들이 그 생각을 못했겠나...  방법이 다 있겠지...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먼 보던 라인강의 모습을 실제 눈으로 본 것 만으로도 83마르크 가치는 뽑은거 같다.

한가지 안타까운건, 해가 일찍 떨어져 너무 어두운데다 빠른 기차 속도 때문에 
라인강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없었다는거.
이건 정말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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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城은 여지껏 보았던 유럽의 다른 城들과는 보존되어있는 형태와 느낌이 사뭇 다르다.
그동안 보아왔던 수많은 城들은 화려함 혹은 웅장함이라는 수식어를 달고다녔다.
그리고 그 수식어에 걸맞는 형태를 보존하고 있거나, 혹은 수식어에 어울릴만큼 복원되어 있었다.

하지만, 하이델베르크城은 그렇지가 않았다. 
하이델베르크城은 역사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나마 상태가 나은 것이 프리드리히宮.



좀 확대해보면 창틀 사이에 조각상이 보이는데,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들이라고 한다.
오른쪽 돌출되어있는 벽면 상단의 선처럼 보이는게 해시계다.






화상을 입은 사람이 성형수술을 하지않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듯
하이델베르크城은 이렇게 전쟁의 상흔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이런 모습이 생생한 역사의 참모습을 보여주는거 같아 오히려 숙연하게 와닿는다.



프리드리히5세가 고국인 영국을 그리워하는 아내 엘리자베스 공주의 생일선물로 하루만에 지었다는 엘리자베스門.
졸속공사치고는 오래 버티고 있는데, 정말 하루만에 지었을까...??

귀족층의 저런 객기(?) 때문에 수많은 서민들의 등뼈가 까지고,
또 귀족계층 한 남자의 저런 황당한 이벤트를 멋지다고 부러워하는 철없는 여성들 때문에
능력안되는 뭇 남자들이 얼마나 전전긍긍하는지 저 계층의 사람들은 알까...




성문탑 오른쪽 건물은 루프레히트宮.


지붕이 없어 더 아름답다는 오토하인리히宮.


흥미로운 것은, 세계대전으로 유럽전역을 침공한 독일이 전쟁의 참상을 잊지않기 위하여
하이델베르크城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것.
이런 것을 아이러니라고 하는건가...






 

:
[ 2001. 12. 18.  Tue ]


아침에 일어나니 옆 방에서 한국말이 들린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나누니, 한국에서 관광오신 부부 두팀과 독일에서 목회활동을 하시는 목사님이시다.
부부 두팀은 각각의 아들 딸이 내년 5월 결혼 예정인 예비사돈이시다.
자녀들의 결혼에 앞서 예비사돈끼리 먼저 여행을 다니시는 거다.
원래부터 알고 지내던 절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사돈끼리 여행다니기도 쉽지 않은데,
하물며 예비사돈이라면 더하지 않겠나.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몰라도 아이디어도 좋았고, 그런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긴
두 부부도 참 마음이 여유로운 분들이신거 같다.
곁에서 보기도 좋지만, 결혼할 자녀들의 가정에도 행복이 보이는 거 같다.

그건 그렇고...

참 세상이 좁다더니 정말 그런가보다.
독일에서 목회활동을 하신다는 목사님을 뵈니 불현듯 대학 써클 선배인 김동욱兄이 생각났다.

신과대를 졸업하고 독일로 건너간 동욱兄과는 학창시절 아주 절친한 관계였다.
서로의 엇갈린 군입대 시기로 캠퍼스에서 함께 지낸 기간은 불과 1년에 불과했지만,
동욱兄이 군입대 후에도 야간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신촌에서 술을 마시다 통금에 쫒겨,
兄이 없음에도 연희동의 동욱兄 집으로 달려가면 동욱형 부모님이 더 반가이 맞아주시곤 했다.
兄이 독일로 떠난 후에도 나를 친자식처럼 생각하실만큼 내게 각별한 정을 주셨고,
나 역시 부모님처럼 생각하고 가끔 찾아뵙곤 했었는데 두 분이 돌아가신 후 연락이 끊겼던 김동욱선배.

넓은 독일 땅이지만 같은 한국인 목사님들끼리는 혹시라도 서로 알지 않을까 생각되어
"김동욱 목사를 아시느냐?" 고 물으니, 이름을 들어본 거 같다며 두어군 데 다른 목사님들에게 수소문을 하시더니
마침내 동욱兄의 소재와 전화번호가 나온다.

햐~~~  이럴 수가...   생각지도 않았던 너무나 뜻밖의 상황이다.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해 배낭여행 중인데 하이델베르크에 있다니, 兄도 너무 놀라며 무조건 쾔른으로 오란다.
기차표를 끊고 전화하면 역으로 나가겠다고...   
배낭여행계획에 독일을 포함시키며 잠깐 동욱兄 생각을 하긴 했지만 만나게 될 거란 생각은 전혀 안했는데,
살다보니 정말 세상에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유럽을 돌며 꽤나 넓은 세상이다 생각하며 짧은 일정을 아쉬워했는데, 이렇게 좁은 게 또 세상이구나 싶다.

쾔른은 여행 동선에서 너무 떨어져있어 계획에 포함하지 않았는데,
그렇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그냥 갈 수는 없다.

쾔른을 들르려면 당초 일정의 변경이 불가피하다.
워낙 빡빡한 일정인데다 게다가 막바지라 일정 변경이 쉽지않다.
하는 수 없이 하이델베르크와 마지막 프랑크푸르트의 일정을 하루씩 줄이기로 했다.
다른 곳은 몰라도 하이델베르크만큼은 여유를 갖고 돌아보고 싶었는데 많이 아쉽다.
나도 아쉽지만, 내 개인적인 일 때문에 일정을 변경하여 초이에게도 미안한데,
초이가 혼쾌히 동의를 해주어 고맙다. 

그렇다면 이제 하이델베르크城을 서둘러 돌아보아야 한다.





  구 시가지에서 바라본 하이델베르크城.




  반대로, 하이델베르크城에서 바라본 구 시가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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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격스런 피아노연주의 선율을 가슴 속에 간직한 채
민박을 함께 운영하는 한국식당 [한국관]으로 돌어오니 주인 아주머니께서
생선튀김이 남았는데 맥주한잔하고 올라가란다.

집 나서고 처음으로 공짜안주에 공짜 맥주까지 앞에 놓고 아주머니 두분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재밌다.
아니...  이날 들은 두분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재밌다고 표현한다는건 내게 좀 문제가 있다.

이미 오래 전 우리나라가 빈곤으로 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던 시절,
많은 광부와 간호사들이 독일로 건너갔었는데, 주인 아주머니 역시 그 시절 간호사로 와서 독일에 눌러앉은 분이다.
그리고, 일하는 아주머니는 연변에서 오신 조선족이신데, 딸은 북경대학에 들어갔다며,
말도 통하지않는 이국땅에서 힘들게 일하는 것도 딸 때문이란다.
결국 딸의 뒷바라지를 하기위함인데, 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힘듬이 배어있는 얼굴에 웃음이 환하다.
부모의 정이 뭐고, 자식사랑이 뭔지...

그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많은 것을 들었다.

독일사람들은 정말 무지하게 검소하단다.
그들은 모든 것을 무지하게 아끼는데, 그 [아낌]은 그들의 철저한 계획과 실천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듯 하다.

예를들어, 일주일에 쓸 돈을 미리 정해놓고 그 범위 안에서만 쓰는데,
1주일에 100마르크를 쓴다고 정해놨는데 월요일에 80마르크를 사용했다면 
나머지 6일동안은 어떻게 해서든 20마르크로 버틴단다.

또한 모녀지간에도 잔돈까지 계산을 한다고 한다.
엄마가 딸에게 시장보기를 요구했을 때, 딸은 장을 보고와서 엄마에게 센트까지 정확하게 돌려준다고 한다.
공과 사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 독일인의 생활습성인 모양이다.

그 외 두분과 오랜 시간 나눈 이야기의 대부분은 두분이 살아온 삶에 대한 이야기다.
독일에 와서 고생하며 정착한 이야기를 들을 때 [애환]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안해봤느냐는 물음에,
"한국에 돌아가도 어디에 정착해야할런지도 모르겠고
이미 적응하기가 힘들거 같다."
는 답변을 듣고 마음이 착찹했는데,
일하는 아주머니의 다음 말이 더 내 마음을 적신다.

"그래도 형님은 돌아가면 온나라가 동포들이 사는 곳인데 어디에 정착하면 어떻고, 적응 못할게 뭐있어요??
  그 넓은 땅 한곳에서 발 붙이고 사는 우리같은 소수민족도 있는데..."



 


 

:
대부분의 도시와 마찬가지로 여기 하이델베르크에도 1박만 할애되어 있기 때문에
붉은황소에서 오랜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어 조금 아쉽지만 지펠하우스로 자리를 옮겨야했다.

지펠하우스를 들어선 순간 독일이란 나라, 그리고 독일사람들에 대해 어렴풋이 잡히는게 있었다.




붉은황소와 마찬가지로 지펠하우스의 벽면도 많은 빛바랜 사진들로 채워져 있는데,
내 생각에는 이 가게 주인의 선조들과 가족들의 사진들이 아닌가 싶다. 
흥미로운건 사진 중에 군인의 사진이 많다는 것이다.
아마도 조국을 위해 전쟁에 참전한 것을 자신과 가문의 명예와 영예로 생각하는 마음이 큰 모양이다.
이런 모습들은 우리도 한번쯤 되새길 필요가 있다.

또 하나 재밌는건, 인테리어와는 애초부터 전혀 무관한듯 모든 곳이 온통 난도질을 당했다는 점.
벽면은 물론 테이블까지 나무로 되어있는 모든 곳은 저렇게 어김없이 칼로 새긴 문구들로 성한 곳이 없다.
오랜 기간에 걸쳐 이곳을 찾은 손님들이 기념으로 남긴 저런 흔적이 오히려 이 집을 전통있는 명소로 만든 것이다.

이 대목에서 궁금해지는거 몇가지.
모든 책상과 사방이 저런 모습을 보이니 전혀 이상해 보이지도 않고 연륜이 쌓인 것처럼 보이지만,
처음부터 주인이 날잡아 며칠사이에 일부러 저러지는 않았을테고, 처음 몇군데만 저런 흔적이 남았을 때는
무척 보기 흉했을텐데, 그걸 주인은 어떻게 참고 넘겼을까??

또 하나는, 처음에 주인이 저렇게 해도 좋다고 공지문을 붙이지 않았다면,
어느 매너없는 사람이 남의 가게 멀쩡한 것에 처음 칼질을 할 생각을 했는지... 
참 대단한 배짱이다.


어쩌면 이랬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취객 한놈이 술김에 포크로 테이블에 자기 이름을 새긴다.
그러다가 주인에게 걸려 그 녀석은 된통 혼나고, 주인은 변상을 받으려 했지만,
얘는
"돈이 없으니 배 째~~~"
결국 흠집난 테이블만 바라보며 속앓이를 하고 있는데, 며칠 뒤 다른 술취한 놈이 그걸 보고는 지도 객기가 발동...
그러기를 몇차례...  결국 주인은 자포자기 상태에서 더 이상 통제할 의욕도 잃고,
그러면서 세월이 흐르다보니 저렇게 생각지도 않은 볼거리로 명소가 되어있더라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따라 삼천리...

어찌됐건 그 역사의 현장을 순순히 지나칠 한민족이 아니잖는가...
이곳을 다녀간 배달의 민족 누군가가 동서독으로 나뉘었던 독일과 남북으로 나뉘어있는 우리의 처지에서
동질의식을 느꼈는지 [통일한국]이라고 크게 하나 새겨놓았다.  1997년에 다년간 모양이다.


붉은황소의 백발노인과 달리, 지펠하우스에서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친구가 피아노 연주를 한다.
전형적인 독일노래를 요구하자 어렸을 때 들어본 귀에 익은 노래가 많이 나온다.
그렇게 독일민요 대여섯곡을 연이어 들려주더니 잠시 뜸을 들인 후 연주하는 노래는 놀랍게도
[아리랑].

오~잉~~~ @>@...  정말 뜻밖의 곡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젊은 피아니스트를 바라보는데,
연주를 끝낸 그가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싱긋 웃는다.
놀라움과 감격 속에 웃으며 박수를 치는 우리를 보며 그의 곁에 있는 여자가 피아니스트에게 무어라 말하자,
그녀에게 "They are Koreans." 라고 말하며 다시 우리를 보고 웃는다.

그 순간 해줄 수 있는게 박수 밖에 없어 계속 박수만 치는 우리에게 미소를 보내고 다시 건반을 향한
그의 다음 곡 연주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경악과 함께 얼이 빠지고 말았다.

그의 열 손가락이 건반을 타고 움직이면서 피아노에서 울려 나오는 선율.

정말 아름다운 그 곡.. 
정말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그 곡..
더구나 악보도 없이 그가 연주한 그 곳은...
.
.
.
.
놀라웁게도
[아침이슬]이었다.

처음 한두소절이 연주될 때도 믿기지가 않았다.
저 노래가 정말 [아침이슬]인지 믿기지가 않았고,
내가 정말 이 순간 하이델베르크의 한 술집에 있는 것인지 믿기지 않았고,
저 곡을 연주하는 사람이 정말 이곳에 사는 독일인인지 믿기지가 않았다.

[아침이슬]은 70년대 대한민국의 아픔과 그 시대 젊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대표적인 노래이고,
미래의 자유를 갈망하고 확신하는 국민의 정서와 혼을 담은 노래인데,  
이 노래를 독일의 한 지방도시에 있는 작은 선술집에서 듣게 될 줄이야...

그가 연주한 [아침이슬]은 여지껏 내가 들어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아침이슬]이었다. 

벅차오르는 감격을 억누르며 연주를 마친 그에게 다가가 이 노래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니
한국 유학생에게 악보를 받았단다.
하지만, 그가 이 노래에 별 관심이 없었다면 이렇게 악보없이 연주할 정도가 됐겠는가..
악보없이도 이렇게 연주할 정도라면 많이 해봤다는 얘긴데, 그건 곧 이 노래가 마음에 들었다는 반증.

서로 짧은 의사소통으로 세밀한 대화가 안된 것이 아쉬웠지만,
왜 이 노래를 좋아하느냐는 나의 물음에 답한 그의 말에는 이런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sentimental...   good feeling...   attractive song...




내 생애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연주를 들려준 지펠하우스의 피아니스트.


: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을 겸한 민박집 [한국관]에 여장을 풀고 다시 하우프트거리로 나왔다.



구대학 앞에는 많은 간이상점들이 예쁘게 구대학광장을 수놓고 있는데,
기념품가게와 먹거리가게 등 아이템도 다양하다.





많은 사람들이 추위를 이기려는듯 Hot Wine을 즐기길래, 우리도 그 대열에 동참했다.
핫와인을 파는 곳에 사람들이 몰려 와인을 즐기는 모습을 보니 
마치 우리가 포장마차에서 오뎅국물을 즐기는 모습을 보는듯 하다.
분위기가 우리 오뎅포차와 비슷하다는거고, 이 사람들은 핫와인을 코코아 마시듯 마신다.

카메라 플래쉬빨인지 객지생활 한달이 지났음에도 허우대가 멀쩡하네...


미리 정보파악을 해둔, 하이델베르크에서 유서가 깊다는 Hof집 두군데를 돌아봤다.
Red Ox지펠하우스.

먼저 들른 곳은 붉은황소.




여기가 호프집인지 사진갤러리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로 사방 벽면을 가득 채운 사진액자들.
그 벽면의 한쪽에서는 백발의 할아버지가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70은 족히 넘어보이는데, 저 나이에...   그 여유로운 모습이 참으로 행복해보인다.

한참을 바라보다 다가가 [황태자의 첫사랑]을 들려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물론 [황태자의 첫사랑]을 원어로 모르는 내가 신청한 방법은,
"아인~~ 쯔바이~~ 드라이~~ 퓌어 퓜프 자이네 드링케 비~~어~~  you know?"
대충 한소절을 부르니 알아는 듣는데, 그 노래는 곤란하단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재밌다.
그런 요란한 노래는 뮌헨 같은 곳에서나 좋아하지, 여기는 그런 시끄러운 노래를 좋아하지 않는단다. 

어~~ 이상하다..  [황태자의 첫사랑]의 배경이 하이델베르크 아니었던가??
난 그렇게 알고 있는데, 내가 잘못 알았나...

경륜으로 꽉 찬듯한 저 양반이 그 유명한 곡을 몰라서 그럴리는 없을테고,
여하튼 안된다니 어쩌겠는가..  그래서 신청한 곡이 [들장미].

고등학교때 음악선생님이셨던 김상두선생님은 본인이 성악을 전공하셔서인지 
음악시간마다 세계의가곡을 원어로 부르게끔 지도를 하셨는데,
그 덕분에 얼추 30년이 지나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에서 들장미를 독일어로 신청하게 될 줄이야...
김상두선생님.. 고맙습니다.   아울러 옛 우리의 주입식 암기식교육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이래서 독일의 가곡을 제 지방에서 원단으로 듣게 됐다.            
 

:


칼테오도르 다리.
이 다리를 건너가면 그 유명한 [철학자의 길]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언제부터인가 여간해서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지않았는데, 이 다리 앞에서는 왠지 나를 담고 싶었다. 
그만큼 칼테오도르 다리는 내게 묘한 매력으로 다가왔는데, 
다리의 형상과 색감에서 배어나오는 세월의 흔적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칼테오도르 다리 중간에서 바라본 네카강과 건너편 마을.

칼테오도르 다리를 건너 산으로 조금만 오르면 왼쪽 건물 뒤 산중턱에 산책로가 있는데,
강 저 편에 보이는 테오도르호이스 다리까지 이어지는 그 산책로가
헤겔과 하이데거 등 독일의 저명한 철학자들이 산책을 하며 사색을 즐겼다는 철학자의 길이란다.
꽤 아름다운 길로 중간에 철학자의 뜰도 있다는데, 왜 저길 가볼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배낭의 무게에 짓눌려 조금이라도 빨리 숙소를 찾고싶은 조급함이 문제였다. 





네카강에서 바라본 하이델베르크城.

여지껏 보아왔던 아름답고 웅장한 많은 城과는 달리 하이델베르크城을 바라보며 받은 쓸쓸함.
전혀 돌보지않은 듯한 외관에서는 풍상의 역사보다 비애가 더 절실하게 와닿는다.
여기는 내일 오전에 들러보자.  어떤 역사가 남아있을까...?? 




저녁 7시가 채 되기 전의 하이델베르크城 야경.
마치 불이 난거 같다.


:
하이델베르크가 학생들에게 동경의 대상인 이유는 아마도 하이델베르크대학 때문이 아닌가 싶다.
1386년 루프레히트1세가 설립한 하이델베르크대학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라고 한다.
17세기초 독일 종교혁명의 중심지였으나, 1800년 이후 각계의 석학들을 초빙하여
명문대학의 기틀을 닦기 시작했으며, 그후 다수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고 한다.



하이델베르크대학은 신대학과 구대학으로 나뉘어지는데, 
하우프트거리를 지나다보면 이렇게 신대학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이게 대학 입구라니...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이런 대학 캠퍼스가 넓게 자리잡고 있다.

신대학과 구대학은 어떻게 구분되어지는가?





이게 신대학.




요건 구대학.



여건 구대학 출입구.

한마디로 건물의 때깔이 다르다.  입구 작은건 같다.  그 이상은 나도 모른다.




하우프트거리를 관통하여 끝에 다다르면 네카강을 가로지르는 칼테오도로다리 입구가 나온다.
:


로텐부르크 유스호스텔 앞.

어제 밤은 그간 묵었던 숙소중  가장 오래된 건물에서의 하루밤이었다.


Rothenbrug 에서 Heidelberg 까지 가는 방법 중 가장 관심을 끈 것은 Europa Bus였다. 
버스로 이동하는 그 코스가 상당히 아름답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당초 버스를 타려했으나 12월엔 운행을 하지 않는단다.
상당히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지...  할 수 없이 기차를 이용하는데 네번을 갈아탄다.

덕분에 Eurail Pass 유효기간 마지막 날 기차를 원없이 탔다.
막상 Pass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니 좀 서운하고 아쉽기도 했는데, 마지막 날 독일의 열차는 종류별로 다 타보는거 같다.
일반기차, 경전철 같은거, 그리고 또 ICE 까지.

오늘 탄 ICE는 어제 탔던 ICE와는 내부가 좀 다르다.  



이 정도면 훌륭한 회의탁자가 아닌가.

1등석 콤파트먼트는 더 Luxury 하다.




마주보는 간격도 널찍할 뿐 아니라, 옆좌석과의 사이에도 간이탁자가 있을 정도로 공간이 여유롭다.



환경이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건지, 이렇게 앉으니 같은 옷을 입어도 있어보이는거 같기도 하네.


기차를 타고 다니다보니 옛날 학창시절 독일은 자원이 풍부한 나라라고 배웠던 기억이 되살아나며 그 말을 실감한다.
삼림, 평야, 수자원이 골고루 많다.  정말 남 부러울게 없는 자원왕국이다.
유럽에서 프랑스와 더불어 식량 자급자족이 가능한 나라라고 하는데, 얼마나 좋을까. 



Heidelberg.

언제부터인지, 또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이델베르크는 꼭 한번 가보고싶은 도시로 오랫동안 나를 지배해왔다.
때문에 배낭여행 생각을 하면서 폼페이를 비롯해 필수코스로 머리 속에 그렸던 몇개 도시 중의 하나였다.

세계의 대학도시 중 젊은이들이 가장 동경하는 대상 중 하나.
왜 하이델베르크는 그런 이미지의 도시가 됐을까...
하이델베르크의 무엇이 그런 흡인력을 보이는 것일까..
 
독일의 도시 중 가장 가보고 싶었던 그런 하이델베르크의, 역에서 내려 바라본 첫 느낌은 평범한 독일의 시골도시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시골이미지가 강한 이곳에 한국식당이 세개나 있다는거다. 





역에서 내려 우리말로 중앙로인 개념의 하우프트거리로 들어서는걸로 하이델베르크의 구경은 시작된다.

하우프트거리는 보행자 전용도로로 길이가 매우 매우 길다.
이 거리에는 쇼핑몰, 카페, 음식점 등이 몰려있어 하이델베르크 최고의 번화가이기도 하지만,
긴 거리를 걷다보면 학생감옥, 하이델베르크의 新舊대학, 하이델베르크城, 그리고 칼테오도르다리 까지
하이델베르크의 유명한 것은 모두 거쳐가는 관광의 중심이기도 하다.


이 거리를 배낭을 메고 두리번거리며 걷다니...
신기하다는 생각에 감정이 업되며 실감이 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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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교통수단을 이용하면서 가끔 헷갈리는 경우 하나.

기차나 지하철, 혹은 버스를 이용하면서 내릴 역을 물어볼 때,
"This stop is Munchen?" 하면, 대개가 "Ok, next stop is Munchen." 그런다. 

기초영어가 짧은 내가 여기서 헷갈리는거다.
next stop 이라고 하니, 처음엔 이번 역이 아니고 다음 역이라고 이해를 한 것이다.
그래서 정차를 해도 안내리고 있으면, 여기서 내리라고 얘기한다.
'next stop 이라며...??'  처음 몇번은 헷갈리고 확인 안돼 서로 this 와 next 만 주고 받았다.

몇번 그렇게 헤매고나서야 "This coming station is Munchen?" 이라고 확인사살을 시작했다.
뭐 말이 안통하면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키며 "Munchen?" 이라고 묻는게 제일 확실한거 같다.

여행을 하며 체득한건 지식이 짧으면 요령이라도 있어야 버틸 수 있다는거다. 


또 하나, 지하철을 우리는 Subway 라고 하지만, 유럽에서는 Subway 라고 쓰는걸 못 본거 같다.
Subway 라고 물으면 오히려 알아듣지를 못한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Metro라고 하면서 지하철역을 [M]으로 표시하는데,
독일을 포함하여 그 우측에 있는 나라에서는 [U]로 표시한다.
정확한 명칭은 [U-bam] 이라고 하는거 같던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아직도 파악이 안되고 있다.
지도에도 [M] 또는 [U]라고 지하철역과 노선을 표기한다.

한가지 깜짝 놀란건 유럽대륙에서 지하철이 제일 먼저 도입된 곳이 의외로 헝가리 부다페스트라는 사실. 
1865년인가 도입됐고 그 뒤 1889년쯤인가 프랑스에 도입됐단다.  



로텐부르크의 유스호스텔은 그래도 융통성이 있다.
여기도 유스호스텔의 이용가능 나이는 27세라며, 27세가 넘었다는 것을 지적은 하면서도
우리 잘못도 아니고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묵고 가란다.

그래..  사람사는 곳이 이 정도 융통성은 있어야지...  뮌헨은 거 몹쓸 곳이구만...





유스호스텔의 내부는 썰렁~
그나마 작은 책상이라도 있어 침대에 옆드려 적지않아도 되니 감지덕지.

오늘 하루를 기록으로 정리하고 내일 일정을 체크하는데,
초이는 어느 틈에 샤워를 하고 나와서는 느긋한 폼으로 나를 향해 셔터를 누른다.

쫄따구가 고참 고생하는데 해줄 수 있는게 이것 뿐이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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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에서 가장 오래 된 도시라는 걸 입증이라도 하 듯  옛 고옥들이 그대로 있지만,
  로텐부르크는 결코 낡은 도시가 아니다.





  왼 쪽의 시청과 오른 쪽 시의회 건물만 보더라도 오랜 것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좁은 골목의 오래 된 건물에는 작지만 예쁘게 장식된 상점이 화려하게 골목을 장식하고 있다.
  기념품점이 대부분이지만 단순히 Souvenir 가게가 아니다.
  고가품도 많은데, crystal, cup 등의 세공품이 주종을 이룬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상점이 많은데, 상점을 둘러보다보면 여기가 오래 된 중세 도시라는 걸 잊어버린다.

  레스토랑과 Cafe에도 사람이 넘쳐 앉을 자리가 없다.
  몇군데 거쳐 겨우 자리를 잡았으나 계속 들어오는 사람들 때문에 눈치가 보여 식사만 하고 바로 일어나야만 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이 오래된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인지, 관광객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이제 크리스마스가 얼마남지 않았다는 걸 곳곳에서 일깨워주고 있다.
  산타모자를 쓰고 캐롤을 연주하고, 청소년들이 지나는 사람들에게 캐롤을 들려주는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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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thenburg(로텐부르크)는 아주 오래된 도시다.
  역에서 내려 곳곳에 있는 성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가면 오래된 중세도시의 모습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




  古都는 성으로 둘러쌓여 있는데, 곳곳에 성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성문)이 있고
  망루와 성벽을 돌아가는 성벽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관광객들에게 색다른 맛을 준다.




  성 망루.




  로텐부르크를 감싸고있는 성벽.




  로텐부르크 구도시에 들어가려면 곳곳에 있는 이런 종루를 겸한 출입성문을 거쳐야한다.
  각기 다른 색으로 도색된 집들이 마치 동화 속의 집을 보는듯 하다.




  로텐부르크에 특별한 유적은 없다.
  특별한 유적이 있는 곳이 아님에도 좁은 골목길이 사람들로 넘쳐나는 것은
  이 도시가 가지고있는 매력 때문이다.  그리고 도시 자체가 유적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유적이 없는만큼 로텐부르크는 특별히 언급할게 없다.
  하지만 보여주고 싶은건 많다.
  로텐부르크는 그림엽서 보듯 그냥 그렇게 눈으로 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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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 피렌체의 두오모성당]


유럽을 돌며 느낀 유적관리에 대한 공통점.

고(古)도시나 고(古)건물이 있는 지역은 철저하게 간판규제, 고도제한이 있다.
그럼으로써 유적지와 도시의 가치를 보존한다.

지금 다시 바티칸 성당같은 건물을 지으라고 하면 과연 가능할까?
그런 중세의 건물과 같은 화려하면서도 오밀조밀한 건물이 앞으로도 나올 수 있을까??

유럽을 돌며 계속되는 의문이지만, 내 의문에 대한 나의 판단은 "Never!" 다.

판단근거의 첫째는, 투자비의 효율 문제다.
현대적 관점에서는 건물의 효율성, 기능성을 따질 것이다.
또 건축단가 등 건축비도 우선적 검토항목이다.
결국 투자의 상업적가치가 최우선 의사결정요인이 될텐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절대로 나올 수 없다.

누가 비싼 건축비를 들여 임대도 안되고 공사비만 비싼 뾰족한 탑을 세우고, 커다란 Dome을 짓겠나..
또 누가 비싼 인테리어 비용을 들여 건물 전체내부를 그렇게 일관성있게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을까..
어차피 공간은 나누어 쓸텐데.  특정 개인이 전재산을 투입하면 몰라도, 설사 그렇더라도 그 수준은 절대 아니다.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성가족성당만 보더라도 그렇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성가족성당]


시공기간만 이미 120년을 넘긴 이 건물을 이 시대에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개인이 100년이 넘는 건축물을 짓는다는건  애시당초 말이 안되는거고,
만약 정부주도로 하더라도 "대표적인 예산낭비의 전형" 이라며 엄청나게 말이 많을거다.

결론은 이래저래 불가능하다는 얘기.


또 하나 의문은, 옛날 사람들의 창의적 두뇌, IQ다.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 거대하고 정교한 성(城), 궁전, 성당들을 설계할 수 있었을까?

누가?  혼자?  혹은 여럿이??
지금 진화된 컴퓨터의 CAD/CAM을 이용한다 해도 도저히 그런 작품은 나오지않을거 같은데..
그 옛날 사람들의 무한하고 경이로운 창의성과 상상력, 그리고 그것을 현실화 시켜나가는
계산력, 공간인지력 등 모든 것을 포함한 신비로운 천재적 두뇌가 정말 상상이 안된다.

외관, 인테리어, 석자재 등의 모든 것을 과연 한사람이 했을까?
거대한 규모로 볼 때 그럴리는 없을 것이고, 누군가가 지침을 주고 총괄을 했더라도
어떻게 그렇게 정교한 모든 것이 똑같은 모습으로 나올 수가 있었을까??
지금처럼 정교한 문양을 대량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게 하나하나의 수제품이었을텐데..

참.. 경이로움을 떠나 신비로움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것들은 자본주의사회나 민주주의사회에서는 어렵지않을까 싶다.
독재성이 가미된 절대군주제였기에 가능하지않았을까 생각하니,
문화와 예술에 있어 걸작품은 자유로운 창의와 강압적 실행에 의해 가능한게 아닌가 하는
아이러니가 든다.





[독일 뮌헨의 성 미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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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고속열차 ICE는 프랑스의 TGV와 함께 유럽고속열차를 대표한다.
속도는 비교가 어떤지 모르겠지만, 실내 분위기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중세 이전부터 오랜 세월에 걸친 두 나라의 문화감각과 의식의 특성이 열차 내부에서도 드러나는듯 하다.




TGV의 1등석은 패션의 나라 프랑스답게 전체적으로 멋스럽게 꾸며졌다.
좌석이 붉은 색이 가미된 고급벨벳으로 치장되고 좌석의 쿠션감도 상당히 고급스럽게 느껴진다.
전체적인 분위기도 안락하다.





반면에 ICE는 비슷한 좌석배열을 하고 있음에도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일단 좌석이 검은색 가죽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마주보는 좌석의 탁자도 TGV보다 넓고
일렬 의자는 앞 의자 등받이에 TV 모니터가 있다.  그리고 TGV는 한 열이 2인용 의자의 느낌이지만, 
ICE는 1인용 의자 두개를 배열한 것 처럼 가운데 공간이 있다.  개인의 영역을 존중한듯 하다.

저 뒤 파티션 안은 타원형 테이블을 중심으로 다섯개의 의자가 들러져 있다. 
이동 중에 회의실로 활용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TGV에서 느껴지는 포근히 안기는 맛은 부족하지만, ICE는 상당히 compact 하면서 깔끔한 느낌이 든다.
군더더기가 없이 심플하면서 산뜻하다.

화려함과 깔끔함, 포근함과 상큼함, 그리고 멋스러움과 기능성.
이것이 TGV와 ICE의 차이점이라고 표현하면 될까...


ICE의 경우 1등석에는 luggage 외에 locker 까지 설치되어 있고, 화장실도 왠만한 원룸아파트 수준이다.
기차임에도 세면기도 센서가 부착된 전자감응식이다.





조종실도 깔끔하다.

야~~  이 기차타고 계속 가고싶다.
유레일패스도 내일까지인데, 좋은 기차나 원없이 타고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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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하다보면 가끔 헷갈리는 게 있다.  지명이다. 
내가 알고있는 동네 이름의 표기나 호칭이 본토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과 다를 때,
그래서 알아듣지를 못할 때는 정말 막막하다.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을 개네들은 [리스보아]라고 했다.
여기 뮌헨도 와서 들으니 내가 알고있는 뮌헨이 아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줄기차게 [뮌헨]이라고 알아왔는데, 여기서는 [문쉔], 듣기에 따라서는 [뮌쉔]이라고 한다.
더 웃기는건 영어권에서는 [뮤닉]이라고 한단다.  [뮤닉]은 또 어디서 나온 거야??

체코에서도 그랬다.
시내 지도를 구하니 [Prague]라고 되어있어, 이게 체코 오리지널 발음이냐고 물으니,
체코말로는 [Praha]가 맞단다.  Prague는 영어식 이름이란다. 영국이 그렇게 부른단다.
@ㅁ@~~  뭔소리야...
자기네가 만드는 지도에 스스로 영국이 만든 표기를 사용한다는 게 웃기는 거 아닌가...

Netherland 에서도 왜 Dutch 라고 하느냐니까 영국이 붙인 이름이라고 했다.
영국.. 거 웃기는 나라네...   그 나라 사람들의 표기와 발음을 존중해줘야지, 왜 지들 멋대로 갖다붙여..
그러고보니 우리나라는 고려시대 때 서구에 알려졌으니 [Korea]라고 하더라도,
일본은 왜 [Japan]이 됐을까??

예전엔 우리도 한자 문화권인 중국이나 일본의 지명이나 인명을 한자음으로 그대로 불렀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는 현지의 발음대로 호칭을 한다.
[北京]을 [뻬이징]이라고 하고, [東京]을 [도쿄]라고 한다.
이제 중국의 [靑島]는 [칭따오]라고 하고, 일본의 [靑島]는 [아오시마]라고 한다.
그럼으로써 이제 청도는 한국의 [청도]만 남았다.
어려서부터 귀에 박혔던 毛澤東도 이제 제대로 [마오쩌뚱]이 되었다.

모든 이름은 현지에서 사용하는 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당연한 순리라는 생각이 든다.




[프라우엔교회]


유럽 왠만한 나라 어지간한 식당의 종업원들은 똑같은 형태의 전대같은 지갑을 개인별로 차고 다닌다.
그리고 손님이 계산을 할 때 현금인 경우 손님이 있는 테이블에서 바로 계산을 마치고 거스름돈을 내준다.
우리처럼 손님이 나갈 때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지 않으니, 사람이 많을 경우 줄을 서서 기다리지 않아도 되어
빠르고 편하다.  종업원 입장에서도 영업종료시 시작전 지급받은 잔돈과 자기가 주문받았던 금액만 입금시키면
나머지는 자기의 팁이니 주인의 눈치 안보고 가져가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 이런 신뢰가 형성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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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 12. 16.  Sun  ]


어제 저녁 7시경만 해도 엄청난 성시를 이루던 마리엔광장의 노점상들은 
브로이하우스에서 나온 9시 이후에는 토요일임에도 완전 폐장이다.
왜 이곳은 토요일임에도 일찍 철시를 하는걸까?  우리 같으면 새벽까지 영업을 할텐데...

그 답은 결국 고객에게 있다.
매장을 찾는 고객이 없으니 문을 열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토요일이면 특히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늦게까지 도로가 흥청거리지만,
이곳은 토요일이라도 일찍 집으로들 돌아가는 모양이다.
결국 이것도 문화차이라고 볼 수 밖에...




어제 제대로 보지못한 마리엔광장을 아침에 일어나 다시 찾았다. 
마리엔광장의 입구는 어제 밤과는 또다른 느낌을 준다.




일요일 오전 10시면 다소 이른 시각인거 같은데, 오히려 토요일 밤 10시보다 사람이 더 많다.
정말 희한하네...   빗질을 하는 사람이 있는걸로 보아 이 시간이 대충 시작인 모양이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등을 돌면서 느낀건 노점상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좌판형태의 노점상이 아니라는 것.
우리나라 버스정류장 신문가판대와 같이 광장가득 똑같은 색과 똑같은 모양으로 규격화된 소형 간이점포다.
그런 소형 간이점포가 광장에 빽빽한데, 중구난방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지런히 줄이 맞춰져있다.
그런데, 도로변에는 이런 것들이 없고, 오로지 광장에만 밀집되어 있다.
그러니 지저분해 보이지도 않고 오히려 볼거리, 구경거리의 역할을 한다.
이태리의 좌판분위기, 특히 나폴리 중앙역 부근의 앵벌이까지 있는 좌판과는 격이 다르다.





거리에는 이미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곳곳에 산타가 등장하는데, 한국에서 보던 산타보다 풍류가 있어보인다.
기쓰고 벽을 타는 산타.. 처마위에서 느긋하게 지나는 사람들을 관망하는 산타...

성가와 캐롤도 들리기 시작하고 트리를 파는 사람들도 많이 눈에 띄는데,
부다페스트와 프라하에서 처럼 어디서 잘라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모두 생나무를 잘라 판다.
모형보다 훨씬 생동감은 드는데, 이건 보관이 안되지않나...  그럼 한번 사용하고 그냥 땔감으로??  





뮌헨의 신시청사는 정말 오래된, 고색창연한 건물이다.
시청사를 새로 옮긴다면 새 건물을지어 옮기는게 당연지사로 여겨질텐데, 오래된 건물로 들어가다니...
멋있는 독일사람들이다.  궁금한건, 신시청사가 이정도면 구시청사는 어떨까???

신시청사의 정면 저 가운데는 뭐냐??




좌우간 뭐하나 그냥 단순하게 넘어가는게 없다.


뮌헨은 그 이름에서 느껴지는 카리스마가 건물에 그대로 배어있다.
프랑스나 이태리와 같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심플한거 같으면서도 단단하고 견고한 느낌을 준다.




단아하면서도 웅장한 기품이 동시에 느껴지는 뮌헨의 건물을 보면서 문득 떠오른 궁금증.

1990년 10월 통일 후 11년이 지난 지금 동서독간의 융화는 어느정도 이루어졌을까?
그들은 지금 어느정도 동질화가 되어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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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 브로이하우스에서 보여지는 또 하나의 재밌는 모습은,
안주를 시키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과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계층이 다양하다는 점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일행부터 젊은 학생들의 무리, 부자간으로 보이는 팀과,
심지어는 장인과 딸 사위로 보이는 팀까지 아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대부분 안주없이
맥주 1000cc 잔을 앞에 놓고 있다.   할머니들도 그렇다.



너무도 화목한 분위기에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는 요청에 기꺼이 포즈를 취해주신 노부부들.


술잔을 들고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우리와 매우 흡사한거 같다.
젊은 친구들이 술에 취해 주사를 부리는 모습도 보인다.
술 취하면 동서양이 똑같구나...  어디서나 사람나름이겠지.

낮에 느끼지못했던 독일인들의 낭만적인 모습과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 어떻게 저런 사람들의 선조가 나치였을까 새삼 궁금해진다. 
자유로움과 넘치는 활기 속에 독일의 강인함이 보이는듯 하다.


브로이하우스에서 본 경이로운 장면 하나.
나는 이곳에서 여지껏 내가 알고있던 개념을 초월하는 더치페이의 진수를 보았다.

한 테이블에서 8명이 술을 먹고 나가면서 계산을 하는데 더치페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있는 더치페이는 총 금액을 인원수로 나누어 걷거나,
혹은 더 나아간들 각자가 먹은 만큼의 돈을 모아 계산하는거 아닌가? 

그런데, 여기는 그게 아니었다.
각자 먹은 것을 여덟명이 따로따로 웨이터에게 계산을 한다.
그러니까 웨이터는 테이블별로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테이블의 개인별로 돈을 받는 것이다.
햐~~~  정말 머리 나쁜 사람은 이 동네에서 웨이터도 못하겠다.
저거 정신 사나워서 어떻게 따로 돈을 받나...  받을거 다 받기나 하는겐지...

오리지날 더치페이란게 이런거구나...


또하나, 한국에선 볼 수 없었던 이색적인 장면 하나.



저 사진의 호프잔은 이곳에서 공용으로 쓰이는 잔이 아니다. 
단골인 사람이 보관한 개인전용 호프잔이다. 
저렇게 열쇄를 채워 보관을 했다가 술 마시러와서 열어 자기 잔에다 달라는 얘긴데,
당구장에서 개인 큐를 보관하는 것도 봤고, 마시다 남은 술을 키핑하는건 익히 익숙하지만,
개인 잔까지 보관을 하다니...  얼마나 단골이라야 저게 가능할까...

웨이터가 헷갈려 다른 잔에 맥주를 가져오면 항의가 엄청나겠네. 
뭔가 구분하는 표시가 있겠지만 누구 잔인지 기억해서 본인에게 가져다주려면
여기 웨이터들 정말 너무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   

참 세상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는 별난 일들이 너무 많다.


정말 유쾌하고 가슴이 시원해지는 분위기를 만끽하고 나온 후 갑자기 떠오른 궁금증 하나.

저 브로이하우스의 주방과 화장실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
저 넓은 곳 천명이 넘는 사람들의 주문을 받으려면 대체 주방은 얼마나 클까?
주방이 하나만 있을까? 아님, 몇군데로 나뉘어져 있을까?
또, 모두 맥주만 마시니, 소변량이 엄청 많을텐데,
저 인원을 감당하려면 화장실은 얼마나 되야할까???
그걸 확인을 해봤어야 했는데...   불가사의다.


숙소로 돌아가는데 거리의 쇼윈도우에 아주 귀여운 모습이 눈에 띈다. 

     

에구 귀여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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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 브로이하우스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야~~ 이게 정말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보던 그런 독일 HOF집이구나..' 싶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한참을 돌려야 전체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넓은 홀. 
대충 테이블 수를 헤아려봐도 홀의 좌석이 1000석은 족히 될거 같은데,
그 넓은 곳에 빈 틈이 전혀 없다.

그 놀라운 규모와 열기를 카메라 한 컷에 담을 수 없음이 엄청나게 아쉽지만,
아쉬운대로 부분적으로나마 살펴보자. 




홀의 중앙 작은 무대에서는 5~6인조 밴드가 경쾌한 독일노래를 연주하고 있었고,
수많은 테이블 이쪽저쪽에서는 호프잔을 높이 들고 흔드는 사람들, 밴드에 맞춰 같이 노래를 하는
사람들, 또 탁자 위에 올라가 흥겹게 춤을 추는 아가씨로 장관을 이룬다.

이 사진은 밴드의 모습을 담기 위해 가까이서 촬영한 것인데,
입구에서 밴드까지의 거리만도 20 미터는 충분히 되는거 같다.

후끈거리는 열기를 느끼며 자리를 찾기 위해 좌중을 둘러보는데,
한 젊은 청년이 밴드에 흥이 겨웠는지 테이블 위에 올라가 호프잔을 쳐들며 소리를 지른다.
힐끗 바라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동족애.  음... 한반도냄새가 감지된다.  

제발, 더 이상 흐트러지지는 마라.
만약 거기서 진도가 더 나간다면 아예 우리말도 잊어먹을 정도가 되던가. 




빽빽히 깔린 8인용 통나무스타일 테이블마다 빈자리를 찾을 수가 없는데,
그래도 사람들은 계속 밀려들고 있다.  여기서는 우리 테이블 개념이 없다.
다른 일행들이 있어도 자리 여분이 있으면 그냥 그 테이블에 끼어앉는다. 
그러니까 저 사진에 보이는 같은 테이블의 사람들이 다 같은 일행이 아니라는거다.
여기선 그게 당연한 모양이다.

평소에도 이런지, 아님, 오늘이 토요일이라 특히 더 한건지는 모르겠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중앙 홀에는 자리가 없다.
중앙 홀 위에, 그리고 사방에 별도의 구석 홀이 있는데, 결국 우리는 구석 홀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구석 홀에서는 밴드의 연주가 들리지않아 흥겨운 열기를 느끼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지만 어쩌겠는가.


중앙 홀과 비교해서 구석 홀이지, 우리가 들어간 홀도 왠만한 호프집만한 공간이다.
자리를 잡고 앉아 고개를 끄덕거리며 테이블을 들러보던 초이가 집계를 끝냈다.
"형.. 지금 이 안에만 78명이야..."  그러니 여기만도 왠만한 호프집이지. 


여기서 대단한 경영학 공부를 했다.

주문을 하려 홀 안을 들러보니 웨이터가 한명 밖에 안보인다.
100명 정도를 수용하는 홀에 놀랍게도 직원이 한명뿐. 그 한명이 혼자 홀 전체를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참 흥미롭다는 생각에 중국계로 보이는 그 청년의 동선을 유심히 살피니 재밌는게 보인다.

일단 맥주는 양손에 1000CC 짜리 호프잔을 12개씩 한번에 들고 다닌다.
우리 테이블에 왔을 때 "너.. 팔 힘 무지 쎄겠다." 고 하니, 웃으며 여기서 일하면서 강해졌단다.

그럼, 혼자서 주문은 어떻게 받을까??

여기서는 누구도 웨이터를 소리내어 부르지 않는다. 
웨이터의 동선에 눈을 맞추고 있다가 웨이터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가볍게 손을 들면 웨이터가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봤으니 떠들지말고 기다리라는거다.
그러니 기다리지 못하고 웨이터를 소리내어 부르면 촌놈이나 무식한 놈이나 성격파탄자가 된다.

또 하나 호기심이 솟는다.
쟤는 이 많은 테이블에서 주문한 안주를 일일히 다 기억을 할까???  헷갈리지 않을까???

계속 지켜보니, 정말 수많은 안주를 들고 왔다갔다 하는데, 헷갈리기도 하는 모양이다.
당연하지.. 저도 사람인데.   근데 헷갈릴 때의 태도가 우리와 다르다.
당연히 테이블에 가서, 혹시 모듬소세지를 주문했느냐?  혹은  무엇을 시켰느냐? 하고
확인을 할텐데, 이 친구는 중앙의 테이블에 안주를 쌓아놓고 손님을 둘러보며 서 있다.
그러다 손님이 손짓을 해서 우리가 무엇을 주문했다고 얘기하면,
그때 웃으며 "아~~ 그러냐.. 쏘세지가 니네꺼냐?" 며 가져다 준다.
우리 같으면 빨리 갖고오라고 소리를 지르며 난리가 날텐데, 참 대단한 인내심이다.

이런 모습을 바라보며 [효율]에 대해 생각케 된다.
100명 규모의 호프집이라면 당연히 직원이 세명 정도는 있어야한다고 생각할텐데,
혼자서 모든걸 처리하니 코스트가 얼마나 낮은가.

이런게 가능한건 결국 오랜기간에 걸쳐 형성된 문화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기다리는게 당연하고 자기의 요구를 급하게 주장하지않는 습성은 단기간에 걸친 계몽으로는 
어렵기 때문이다. 


호프브로이하우스의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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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을 생각하면 꼭 하고싶은 게 세 가지 있었다.

하나는, 하이델베르크를 가보는 것.
또 하나는, 아우토반을 질주해 보는 것.
마지막 하나는, 가끔 호프집에 가면 벽에 걸려있는 사진에서 보는, 
대강당같은 넓은 호프집을 가득 메운 독일의 정통 호프집을 실제로 보고 그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이다.
뭐 누구는 독일의 남녀혼용사우나 이야기도 하더라만, 그건 내 체격이 빈약해 비교될까봐 포기.

이번 일정에 하이델베르크를 넣었으니 며칠 후면 볼 수 있을테고,
아우토반은 기회가 안될거 같지만, 오늘 뮌헨에 있다는 초대형 호프집은 반드시 찾아야 한다.
안 그러면 두고두고 아쉬움이 클테니까.


퓌센에서 돌아와 예약된 유스호스텔을 찾아갔다.
근데...  아니 이게 뭔소리...
법적으로 26세 이하만 투숙 가능하단다.

아니...  여지껏 다른 나라 유스호스텔에서는 아무 이상 없었는데, 왜 여기만 갑자기 나이를 들먹이나...
예약이 문제가 있었던 거 같은데, 암튼 예약을 하고도 유스호스텔에서 쫒겨났다.
이런 것 까지 확인했어야 했는데, 이런 규정이 적용되는 곳도 있다는 걸 누가 알았어야지...
내일 로텐부르크는 어떨지 걱정이다.  독일은 모두 그렇다면 문제네...

배낭을 메고 거리를 방황하다 다행히도 주변의 작은 민박스타일 호텔을 찾아 짐을 풀었다.

일단 저녁을 간단히 먹은 후 정통 호프집이 마리엔광장 주변에 있을 거라는 말만 듣고, 
전철을 타려 티켓을 끊으려 하는데 기계가 모두 문제가 생겼다.  고장이 난 것이다.
마침 주위의 경찰에게 방법을 물어도 방법이 안 나온다.
모르는 건지, 말을 못 알아듣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지나는 젊은 친구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으니, 자기도 표 없이 타고 다닌다며 그냥 타란다.
그래도 되나...  생각하는 순간, 이 친구 하는 말이, 그러다 재수없이 걸리면 60마르크를 내야 한단다.
일종의 벌금이나 과태료겠지. 1마르크가 약 650원이니 그럼 얼마야??  39000원이네...

근데, 이 친구 말투가 어째 이상하다.
너 어디 사람이냐? 고 물으니, 자긴 체코인이란다.
체코???   또 체코야??  체코인들 왜 이래...




6시반쯤 들어선 마리엔 광장 입구.  

그러고보니 퓌센의 노이슈반스타인城 옆의 계곡에 걸친 다리 이름도 마리엔다리 였는데,
마리엔 이란 단어에 무슨 의미가 있는건가...??




광장 안쪽으로 들어서니 노점상과 인파로 가득하다.
서서 빵을 먹기도 하고, 음료수나 Hot Wine 등을 마시며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한다.

광장복판에 자리잡은 교회의 모습도 무척 예쁘다.




신시청사의 야경.
신시청사가 이렇게 고풍스러우면, 구시청사는 대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이렇게 마리엔광장에는 예쁜 건물, 웅장한 건물들이 어우러져 있어 이쪽저쪽 돌아보며 셔터누르기 바쁘다.
아무래도 여기는 내일 아침 밝을 때 다시 들러야 할 거 같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우린 그 운동장같은 호프집을 찾는 게 목적이기 때문이다.

광장에서 지나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다.
미리 기억을 해둔 이름 [호프 브로이하우스]를 물으니 고개를 갸우뚱 한다.
다시 다른 사람에게 엄청 큰 호프집을 찾는다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방향을 알려준다.
아마 이 안에서는 이곳이 명소인 모양이다.

그렇게 찾아간 곳.




아~~~   드디어 왔구나...

이 안에 들어가면 서울의 호프집 벽에서만 보던 그 거대한 호프집의 모습을 과연 볼 수 있을까... 
생각보다 건물은 그리 크게 보이질 않는데...

설레는 가슴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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