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스타
보고 듣고 느끼고/영화겉핥기 2006. 10. 6. 09:33 |
사극 [왕의 남자]에서 관객으로부터 웃음과 눈물을 함께 뽑아냈던 이준익 감독이,
이번엔 현대극에서 또 다시 관객으로부터 웃음과 눈물을 훔쳐간다.
[라디오 스타]는 2006년 대종상 영화제에서 [왕의 남자]로 각본상을 수상한 최석환 작가가 역시 각본을 썼을 뿐 아니라,
[왕의 남자]에서 함께 호흡을 맞췄던 촬영, 연출, 의상, 분장 등 주요 스텝들이 이준익 감독과 다시 뭉쳐 만든 작품이다.
특히 최석환 작가는 [황산벌]의 각본도 집필했으니, 이쯤되면 이 영화들이 누구의 작품이라고 해야할지 고민스럽기도 하다.
여하튼, 두 사람은 찰떡궁합 임이 틀림 없는거 같다.
찰떡궁합은 또 있다.
안성기와 박중훈.
이 시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두 사람은 이미 많은 영화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다.
1988년 [칠수와 만수]를 비롯해, [투캅스], 그리고, [인정사정 볼거 없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에서 보이는 두 배우의 행동은 연기 라기 보다는 실생활을 보는 듯 너무나 자연스럽다.
안성기 - 우리는 그를 국민배우라 칭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강한 카리스마부터 코믹연기까지 그는 모든 배역 속에 가장 밀도있게 용해되는 배우다.
나이를 먹으면서 [인정사정 볼거 없다] 이후,
영화를 대표하는 간판 주연에서는 한발짝 뒤로 자리매김한 듯 하여 안타까움이 크지만,
[무사], [형사], [한반도] 등에서 여전히 그만의 무시할 수 없는 탄탄한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아니길 바라지만, 어쩌면 [라디오 스타] 이후 영화 포스터에서 주연으로서 그의 이름을 쉽게 발견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흥행성을 중시하는 영화계 속성상 젊은 배우들의 중용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도 한국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배우임에 틀림없다.
박중훈 - 이상하게도 그는 팬들에게 코믹배우로 깊게 각인되어 있다.
터프한 역을 맡더라도 그 배역의 근간은 단순무식이다.
아주 잘 생긴 얼굴임에도 그의 캐릭터는 늘 웃음이다.
그런 박중훈이 이번엔 가을에 맞는 우수가 짙게 깔린 모습으로 다가왔다.
나는 이 영화에서 여지껏 본 적 없는 박중훈의 가장 맑고 깨끗한 얼굴을 보았다.
이제 그도 불혹을 넘기고 있음에도 오히려 순수한 청년의 모습이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이 영화 속에 비춰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그의 모습이 보여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의 변신이 기대된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88년도 선풍적 인기를 끌던 가수왕이, 그 후, 폭력과 대마초 등으로 카페촌의 가수로 전전하다
지역방송국 DJ를 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내키지 않는 일에 대한 무기력증으로,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대충대충 꾸려가던 진행방식이
어느 순간 티핑 포인트를 이뤄 전국적인 인기를 모으게 된다는 것.
줄거리도 단순할 뿐 아니라, 영화 전반에 걸쳐 극적인 요소나 반전도 없다.
등장인물도 단순하고, 배경도 뻔하다. 그리고 특별한 감동도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단순함과 평범함 속에서 따뜻함을 느끼게 한다.
그것이 이준익 감독의 힘이다.
일반적으로 [힘]이라는 것은 강한 것을 상징한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은 부드러운 힘을 표방한다.
그에게는 强한 힘이 아닌, 柔한 힘으로 관객을 사로잡는 능력이 있다.
관객에게 느낌을 강요하지 않고, 느껴지게끔 만든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는 무리가 없다.
[라디오 스타]에서 안성기와 박중훈 두 걸출한 스타는
그동안 여러 영화에서 보여지던 독특한 캐릭터가 많이 절제된 느낌을 준다.
그저 담담하고 담백하다. 이렇게 개성강한 두 스타를 특징없이(?) 융합하는 것이 이준익 감독의 또 다른 힘이 아닐까.
물론 이 영화에도 딴지를 걸라면 걸 수 있는 요소는 있다.
영화에서 영월지역방송 DJ 최곤(박중훈)의 파격적인 진행으로 프로그램 인기가 높아지자,
그 프로를 전국방송으로 확대하게 되는데, 그 같은 인기는 지역의 사랑방 방송형태니까 가능한 것이지,
전국방송으로는 말이 많을 수 있다.
실제 현실에서 진행스타일이 그와 비슷한 박철氏나 김구라氏의 방식에 대해 지지와 안티가 엇갈리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면에서의 태클이지, 영화자체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무가치한 얘기다.
이준익 감독은 영화의 엔딩 씬에 상당히 공을 들이는 것 같다.
[황산벌]에서 마지막 장면에 전체 내용이나 주인공과는 전혀 거리가 먼 -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 전원주를 까메오로 출연시켜, 전장에서 고향으로 돌아 온 이문식과 전원주의 해후 장면으로 풋풋한 엔딩을 하고,
[왕의 남자]에서는 감우성과 이준기의 외줄에서의 도약장면으로 강한 잔상을 남기더니,
[라디오 스타]에서도 수채화 같은 엔딩 씬으로 마음을 뭉클하게 만든다.
카메라 앵글의 힘인지, 비를 맞으며 서있는 박중훈의 모습이 여지껏 보아온 박중훈의 모습 중 최고로 멋있게 보였는데,
안성기가 다가가, 두 사람 사이에서 우산이 펴지는 모습은 마치 애니메이션를 보는거 같았다.
[라디오 스타] 에는 또 하나의 보너스가 있다.
바로 영화를 보면서 듣게 되는 7080세대의 음악들.
영화에서 안성기의 애창곡인 신중현의 [미인], 그리고 방송에서 삽입되어 나오는 [아름다운 강산],
조용필의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김추자의 [빗 속의 여인], 들국화의 [돌고 돌고 돌고] 등은,
7080 세대의 향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요즘 신세대 노래인 노브레인의 [넌 내게 반했어]도 듣기 좋았다.
특히,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가 흘러나오는,
최곤(박중훈)이 방송 중, 매니저인 박민수(안성기)를 찾는 장면은 모든 이의 가슴을 찡하게 한다.
[라디오 스타]로, [왕의 남자]와 함께 이준익 감독은
적어도 2006년 만큼은 대한민국 최고의 감독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거 같다.
또 하나, 이 영화에 칭송을 보내는 이유는, 적은 제작비로도 얼마든지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한가위 전날 마음이 따뜻해지는, 예쁘게 만들어진 영화를 보아 너무 행복했다.
DVD로 제작되면 꼭 소장하고 싶은 영화,
2005년 [웰컴 투 동막골]과 함께 누구에게나 가족관람을 추천하고 싶은 영화다.
마지막으로,
마치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상케 했던 박중훈이 영화 속에서 불렀던 -최곤을 88년 가수왕으로 만들었던 - 노래
[비와 당신]의 가사를 싣는다. (개인적으로 이 노래를 꼭 배워보고 싶다)
<비와 당신>
이젠 당신이 그립지 않죠, 보고 싶은 마음도 없죠.
사랑한 것도 잊혀 가네요, 조용하게.
알 수 없는 건 그런 내 맘이 비가 오면 눈물이 나요.
아주 오래 전 당신 떠나던 그날처럼.
이젠 괜찮은데 사랑 따윈 저버렸는데
바보 같은 난 눈물이 날까.
아련해지는 빛 바랜 추억
그 얼마나 사무친 건지
미운 당신을 아직도 나는 그리워하네.
이젠 괜찮은데, 사랑 따윈 저버렸는데
바보 같은 난 눈물이 날까.
다신 안 올 텐데, 잊지 못한 내가 싫은데
언제까지 내 맘 아플까.
영화 스케치
영화에서 East River 라는록밴드로 출연한 [노브레인].
아름다운 강산 등 여러 음악을 들려준다.
영화에서 공개방송을 하는 장면.
최정윤, 박중훈, 안성기, 이준익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