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남자
보고 듣고 느끼고/영화겉핥기 2006. 1. 17. 22:27 |이 영화는 여러가지 구도를 참 절묘하게 엮어 놓았다.
영화의 두 축은 [광대와 왕]이다.
이 두 축을 중심으로, 모친의 죽음에 대한 왕의 빗나간 복수가 있고,
이러한 정신나간 왕에 대한 역모가 있고,
그리고 여기에 제목에서 느껴지는대로 사극에서는 보기 드물게 동성애가 결합되어있다.
한국 영화사에 연산을 테마로 한 영화는 많았다.
연산의 파트너였던 장녹수 또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여인이었기 때문에
둘은 서로 주연과 조연을 주고받으며 많은 감독과 연출자들에게
인기있는 역사 속 인물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연산에게 동성애라는 새로운 설정을 시도했다는 점.
장녹수 밖에 몰랐다는 역사 속에서 연산이 커밍아웃을 한 것이다.
배우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 감우성
솔직히 나는 그 동안 감우성이라는 배우에 대해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배용준 같이 여성들의 마음을 뒤흔들만한 깨끗한 외모도 아니고,
그렇다고 장동건 같은 선이 굵은 외모도 아니다.
본인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잘 생긴 외모이긴 한데, 쉽게 물리기 쉬운
깊이가 엷은 미남이라고 할까... 그의 영화를 몇번 본 기억은 나지만,
감우성과 카리스마는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에서 그의 카리스마를 보았다.
감우성도 이런 선이 굵은 연기를 할 수 있구나... 하고.
그의 새로운 매력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은,
감우성 본인은 물론, 한국영화계나 팬의 입장에서도 무척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는 입가에 흉터를 가미한 분장도 일조를 했을 것이다.
마지막 씬 이나 다름없는,
두눈을 잃고 마지막 줄을 타며 읊조리는 그의 대사와 연기는 정말 압권이었다.
그가 맡은 극중인물 장생은 극에서는 비록 짧게 생을 마쳤지만,
감우성은 장생의 연기를 통하여 배우로서 長生의 문을 연 것 같다.
* 정진영
언뜻보면 이 영화에서 정진영의 연기는 평범하다 못해 단순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말 힘든 연기를 잘 표출했다는 생각이 든다.
연기 중에 내면연기가 가장 힘들다고 하지 않는가.
정진영은 가슴이 비어있는 연산의 모습을, 텅 빈듯한 공허한 눈빛과 허탈한 웃음,
그리고 위엄없이 흩어져 나오는 양아치적 말투로 잘 표현하고 있다.
한가지 개인적으로 아쉬운 것은 일부 대사의 톤이 [황산벌]의 김유신을 연상케 한다는 것.
* 이준기
정말 아름다운 남자. 이조실록에 의하면 그가 맡은 [공길]은 실존인물이라고 한다.
실존인물 공길도 이렇게 아름다운 미남이었을까... 궁금해지는 것 만으로도
그의 연기는 성공한게 아닌가 싶다.
신분이 극과 극인 두 남자 사이에서 번민을 하며 신분이 극에서 극으로 수직상승하는
공길의 애절한 눈빛을 보며, 안방극장에서 보던 이준기와는 전혀 다른 이준기를 느꼈다.
* 장항선
장항선의 선이 굵은 연기야 이미 정평이 나 있으니, 연기에 대해서는 말이 필요가 없고,
이 영화에서 내가 장항선에 대해 새로운 매력을 느낀 것은 그의 발성이다.
강한 쇳소리와 같은 짙은 허스키 음성만으로 그는 궁중에서 잔뼈가 굵은
노(老)내관의 경륜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이 영화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시도가 있다.
먼저, 이 영화는 광기어린 폭정으로 옥좌에서 물러나는 연산을 그린 사극이며,
세 남자의 동성애적 삼각관계를 그린 멜로물이며,
광대들의 삶과 애환을 담은 서민극이다.
그리고, 동 시대 신분의 극과 극인 천민과 왕의 대결구도를 담은 시대극이기도 하다.
영화의 대사도 흥미롭다.
서민들의 대화체와 궁중내의 대화체는 여느 사극과 별반 다를게 없지만,
왕과 장녹수의 대화를 들어보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이조시대 왕과 후궁의 대화가 아닌,
마치 현재를 사는 신세대 부부의 대화 같다.
녹수의 왕에 대한 호칭도 '당신'이며,
장녹수가 왕에게 하는 말투도 '우리 애기 젖먹고 싶어??' 하는 식이다.
미천한 광대가 '개나 소나 갖고 노는 왕' 이라는 표현도 서슴치 않는다.
반면 장생은 '아무나 갖고 노는 왕이라면, 갖고 놀 생각도 안했다.' 는 대담한 말을 한다.
민심은 이미 왕에게서 등을 돌렸지만, 그래도 아직 왕의 권력은 살아있음을 일깨워주는 대사다.
장생은 자신이 올라있는 줄을 가리켜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반허공]이라 한다.
분명 허공에 있음에 뭔가 발목을 잡는 것이 있는 것일까.
장생이 일컫는 하늘은 왕에 의한 권력의 상징이며, 땅은 미천한 천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권력과 천민의 중간에서 그들은 목숨을 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있는 것이다.
실제로 장생은 두눈을 잃은 다음 줄위에 올라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잃을게 없다. 두 눈이 안보이니, 이제 반허공이 아닌 허공일세...'
잃을게 없으니 비로소 지유로워진다는...
엔딩씬인 장생과 공길이 줄에서 힘차게 도약하여 두 다리를 하늘로 쭉 뻗어올리는 장면은
다른 세상을 향한 신분의 자유로움에 대한 갈망이 아닌가 싶다.
줄거리를 갖춘 영화 속에서, 영화의 줄거리와는 별도로 광대를 소재로 한 영화답게,
남사당패의 신명나는 여섯마당인 풍물, 버나(접시돌리기), 살판(재주넘기), 어름(줄타기),
덧뵈기(탈춤), 덜미(인형극)를 모두 접할 수 있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감우성의 대역으로 공중점프 줄타기의 멋진 연기를 보여준 사람은 줄타기 경력 30년이라고 한다.
감독은 남사당패의 여섯가지 놀이를 영화의 구성에 맞춰 알맞게 배치하여
관객의 보는 즐거움을 더 했는데,
여기에 보너스로 [패왕별희]와 같은 중국 경극의 맛 까지 보여 준다.
특히, 인형극과 그림자극을 통하여 연산의 흔들리는 심리를 보여준 것은 참 인상적이었다.
제작비 44억으로 3개월만에 촬영을 마친 영화 [왕의 남자].
같은 씬을 3번이상 찍지 않았다는 영화.
먼저 개봉된 제작비만 150억 이상이 들었다는 [태풍]과 비교해보면,
주연급의 무게감이나 제작규모에 많은 차이가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가 많은 호응을 얻고 있는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쫒겨난 것이 1506년이니, [왕의 남자]는 정확히 500년 전의 이야기이다.
이조실록에 단 한줄 나와 있다는 광대에 대한 이야기에서 500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이렇게 탄탄한 줄거리를 뽑아낸 작가와 감독의 상상력과 창조성에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