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TV드라마에 사극의 비중이 엄청 높아졌다.
특히 한때는 MBC의 [주몽]을 필두로 SBS의 [연개소문], KBS의[대조영] 등 고구려를 소재로 한
대하드라마가 가히 사극의 전성시대를 이뤘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가 바뀐 지금도 공중파 3개 채널에서는 사극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최근 몇년동안 이어지고 있는 사극 열풍의 트렌드는 두가지다.
[퓨전]과 [블록버스터].

내가 기억하는 퓨전사극의 시작은 [다모(茶母)]가 아닌가 싶다.
물론 그전에도 몇몇 퓨전스타일 사극드라마가 있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은 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스타일의 사극으로 인기몰이를 한 것은 [다모]일 것이다.
그리고 [황진이]와 최근 방영되는 [홍길동].

블록버스터사극의 기억되는 시발점은 [성웅 이순신].
그리고 [해신]에 이어 그 이후 방영되는 사극은 거의 블록버스터 수준이다.

사실 퓨전과 블록버스터가 딱히 구분되어지지는 않는다.
블록버스터에는 이미 퓨전의 개념이 녹아있기 때문이지만, 그래도 퓨전과 블록버스터 결합의 결정판은
작년 년말 종연된 MBC의 [태왕사신기]가 아닐까.


사극에서의 퓨전은 어떤 의미일까?
단순하게 말하면, 어투(말투)와 복식(의복)의 현대화.
거기에 하나 더 붙인다면 사회관습의 현대적 해석일 것이다.

종전의 사극은 너무 어렵고 지루했다.
모든 등장인물들은 표정부터 행동까지 너무 근엄했고, 말투 또한 상당히 어려웠다.
이야기 전개도 느릿했고, 드라마의 배경이나 성격이 전체적으로 진부할 수 밖에 없었다.
매번 비슷한 소재와 배경 속에 등장인물만 바뀌었을 뿐이다.

기존의 고연령층에게는 그런 것이 통할 수도 있었겠지만,
변화의 소용돌이가 일상처럼 느껴지는 젊은 층에게 그런 드라마는
구석기시대의 동굴벽화를 바라보는 것 이상의 따분함일 수 밖에 없다.

그러던 사극의 분위기가 가벼워지고 경쾌해졌다.
조선시대의 화법도 요즘의 말투처럼 변했고 빨라졌다.
복장도 훨씬 단순해졌을뿐 아니라 시각적으로 친숙해지고, 문화적 패러다임도 친밀하게 와 닿는다.

스케일도 엄청나게 커졌다.
전투장면도 어지간한 영화이상으로 박진감과 웅장함이 넘친다.
투여되는 인적 물적 물량도 예전의 사극에 비하면 상상을 초월한다.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까지 동원되어 볼거리가 많아졌는데,
거기에 역동적인 카메라워킹과 세련된 연출기법이 가미되어
스피디하게 전개되는 화면전체에서 드라마의 힘이 넘친다.

특히, 방영 초기에 시청율이 결정나는 드라마의 특성상
요즘 새로 방영되는 드라마는 1,2회에 가장 화려하고 농축된 화면으로 승부를 건다.
[대조영]에 이어 년초부터 방영되고 있는 [대왕세종]의 1회 처음 도입장면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렇게 사극은 이제 남녀노소 구분없이 모든 계층에게 사랑받는 쟝르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사극이 사랑받는다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본다.
안그래도 역사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젊은 층에게 사극이라는 드라마를 통해서나마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갖게한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울러 특정 사안이나 특정인에 대한 재조명을 통해 다양한 각도에서 역사를 재해석할 수 있다는 것도
다양하고 유연한 사고와 인식의 발달에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려되는 것이 있다. 
드라마에서 전개되는 내용과 역사적 사실과의 간극이다.

역사적 고증사료가 미비한 시대에 대한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작가와 연출자의 상상력에 의해
전개될 수 밖에 없다.  주몽의 성격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어디에도 없다.
대조영과 이해고, 대중상과 설인귀가 어떤 형태로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도 알 수 없다.
모두가 작가의 상상력과 연출자의 의도에 의해 보여지는 것을 우리는 마치 최면에 걸린 듯
실제처럼 받아들이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문제다.

모든 드라마가 그렇듯, 사극 역시 어쩔 수 없는 창작이라 하더라도, 그렇더라도 지켜져야 할 선은 있다고 본다.
역사적 사료가 없는 것이야 어쩔 수 없더라도, 사료가 존재하는 역사에 대해서는 사실에 근거해야 할 것이다.
[대왕세종]의 도입부는 장차 세종이 되는 어린 충녕대군의 납치를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게 역사적 사실인지는 나도 혼란스럽다.

앞서 말했듯, 요즘 사극은 젊은 층에게도 매우 인기가 높다. 
그러다보니 학생들에게는 사극의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는 경향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사극에 의한 역사왜곡은 상당히 위험한 사회적문제가 될 수도 있다.

사극도 재미가 있어야함은 물론이다.
그런 재미를 위해 퓨전도 필요하고, 블록버스터도 필요하다.
하지만, 재미만을 우선하여 역사적 실체가 변질되는 것은 매우 우려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사극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적사실에 근거하는 것이다. 


史劇은 분명 진화하고 있다.
진화의 사전적 의미는 [일이나 사물이 점점 발달하여 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史劇의 진화는 [劇의 진화]가 아닌 [史의 진화]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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