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만화가게에 가서 일정량의 만화를 보면 표딱지를 주곤했다.
그게 지금으로 보면 쿠폰의 개념인데, 그 표딱지를 다섯장 모으면 프로레슬링 중계를 할 때, 
만화가게의 TV를 볼 수 있었다.

그 당시 프로레슬링은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다.
그만큼 시청율도 단연 1위 였고, TV가 제대로 보급되기 전이었던 만큼 프로레슬링 중계가 있는 날이면
온 식구들은 물론, 동네 사람들 마저 TV가 있는 집으로 기웃거리곤 했다.
그러니 남의 집에 갈 만큼 친분이 없는 동네 꼬마들은 천상 만화가게로 달려 갈 수 밖에 없다.


김.일.

당시 그 이름 두 자는 지금의 이승엽이나 박지성보다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 때는 지금과 같은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니, 팬 카페 같은 것도 있을리가 만무였고,
오로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전국을, 그리고 온 국민을 열광케 만든 이름이다.  

박치기.
지금은 소프트웨어의 어감으로 머리를 잘 써 유명해진 사람이 많지만,
김일은 하드웨어적 어감의 머리 하나로 세계를 제압한 사람이다.


당시 국내의 인기 프로레슬러로, 기술의 달인 [장영철]과, 당수의 [천규덕]이 있었지만,
파괴력면에서 한발을 들어올렸다 체중을 실어 내리찍는 김일의 박치기에 필적할 수가 없었다.



수세에 몰리던 김일이 파괴력 넘치는 박치기로 상대를 제압할 때 온 국민은 열광하고 환호했다.
반칙을 주무기로 하는 하는 무법자의 술수에 고전을 할 때면,
전 국민의 입에서 ' 박치기~~ 박치기~~~' 가 연호되기 시작하고, 
특히 상대의 흉기에 의해 피가 낭자한 이마로 그의 박치기가 직렬하면서
상대가 함몰되는 모습은 권선징악 그 자체였다.
그만큼 그의 박치기는 아이들에게 정의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그가 오로지 박치기에만 의존하는 단순한 레슬러는 아니었다.
내 소년시절의 기억에 존재하는 전성기 때의 그는, 몸도 날렵하고, 기술적으로도 뛰어난 영리한 선수였던 걸로 기억된다.
박치기는 그의 최후의 필살기였을 뿐이다.

당시의 기억나는 레슬러 중에, [안토니오 이노끼]와 [자이언트 바바], 그리고 [압둘라 부처] 등이 떠오른다.
[안토니오 이노끼]는 후에 [무하마드 알리]와 세기의 격투기를 벌인 적도 있었고,
[자이언트 바바]는 무척이나 매너가 좋았던 장신 선수로 기억된다.
그리고, [압둘라 부처]는 마치 인간산맥이라 부를만큼 거구였던거 같다.

그의 국내 경쟁자로 불리던 장영철이 그와의 경기에서 패한 후, '프로레슬링은 쇼다.' 라는 발언 파문으로
프로레슬링은 국내에서 급격히 인기가 하락하고, 그 여파로 그의 존재도 어느 순간 우리의 머리에서 희미해져 갔다.

가끔 그에 대한 기사가 언론에 짧게 보도되곤 했는데, 그가 병상에서 투병하는 모습,
그리고, 역시 투병중이었던 장영철氏를 문병하여 그와 화해의 악수를 나누는 모습 등은
올드팬의 향수를 자극하곤 했다.   

지난 주 그의 사망소식을 언론을 통해 접하곤, 어린 시절 소중했던 추억의 하나를 잃은 듯 마음이 허전했다.
나의 어린 시절을 들뜨게 하고, 열광하게 하고, 손바닥이 부르틀 정도로 박수를 치게끔 만들었던 김일 선수.
비단 나에게만 그런 추억이 있진 않을 것이다.

어려웠던 시절, 우리 또래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안겨주었던 [박치기왕 김일].
이제 삶의 링에서 내려간 그에게 추모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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