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
보고 듣고 느끼고/영화겉핥기 2012. 3. 21. 13:33 |영화가 시작되면서 비로소 [가비]가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영화를 보기 전, 국어사전을 아무리 찾아봐도 [가비]에 해당될만한 의미를 찾지 못했다.
단지 포스터의 부제가 [아름다운 독(毒)]으로 되어 있어 [假砒]가 아닌가 유추했는데,
영화 첫 화면에서 [加比]라는 문구를 보고 커피를 이르는 표현이라는 걸 알게 됐다.
조선 말기, 역사에서 아관파천이라 기록된, 일본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
일본은 고종을 독살하고 조선 군대를 무장해제 시키기 위해, 커피를 즐기는 고종의 커피에 독을 타 고종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기도한다. 이름하여 [가비작전].
역관의 딸 따냐(김소연), 그리고, 따냐를 좋아해 따냐 부녀를 따르던 일리치(주진모).
둘은 어린 시절 따냐의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오랫동안 러시아를 기반으로 서로 의지하며 살아온 탓에
서로에 대한 애정과 생존만이 중요할 뿐, 조국이라는 국가의식이 정립되지 않은 조선인이다.
열차 강탈범으로 러시아 군대에 의해 체포돼 처형당할 이들을 구출한 일본은,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고종(박희순)을 독살하기 위해 따냐를 고종의 커피 바리스타로 침투시키고, 일리치는 조선 군대를 와해시키기
위한 일본 무관으로 임명된다.
가비작전을 주도하는 사다꼬(유선)는 일리치와 따냐의 관계를 이용하며 두 사람을 조종하고,
일리치는 오로지 따냐를 구하기 위해 사다꼬의 의도대로 조선 군대의 무력화에 치중한다.
하지만, 고종 독살 임무를 부여받은 따냐는, 겉으론 무기력하고 연약해 보이지만 조선의 자존을 지키려는
고종의 흉금을 파악하고는 일리치와는 반대로 오히려 고종의 뜻을 따르게 된다.
서로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랑하는 연인이지만, 서로 다른 생각을 갖게 되는 두 사람...
[가비]는 여러가지 흥미로운 구성요소를 보인다.
조선의 마지막 왕은 순종이지만, 순종이 (헤이그 밀사 파견을 이유로 고종이 강제 퇴위된 후)
일본에 의해 옹립되었음을 감안하면, 고종이 조선 왕실에서 승계된 마지막 왕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 [가비]는 조선의 마지막 왕과 조선 최초의 커피 바리스타를 매치시켰고,
- 조선왕조를 배경으로 했음에도 조선의 풍습보다 서양의 풍습이 돋보인다.
즉, 조선의 실내 건축양식과 복식(服飾)보다 서양식 실내 건축양식과 복식이 주를 이루며,
영화의 소재라 당연하긴 하지만, 조선시대 임금의 식탁에 수라상보다 커피가 주를 이룬다.
- 그리고, 일리치와 따냐, 또 그 두 사람을 조종하는 사다꼬. 조선의 무력화시키는데 동원된
그들은 모두 같은 조선인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가장 아쉬운 건, 영화 초반에 급속하게 이루어지는 다채로운 전개다.
단순한 강도에 의한 피살이 아닌 듯한 따냐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갑자기 전환되는 러시아 장교들과의
열차 액션과 커피 탈취, 러시아 군인에게 체포되어 사형집행 장면에서 느닷없이 일본에 의해 억류된 경위,
그리고, 따냐의 러시아 호텔 바리스타 등장 등, 뭔가 둥둥 떠다니는 듯한 전개는, 편안하게 혹은 긴장감을 갖고
영화에 임하려는 관객의 몰입을 오히려 저해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관객으로 하여금 보여지는 장면을 연결시켜 흐름을 이해하기 바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가비]는 대단히 밀도있는 구성을 보여주려 노력한 흔적이 여러 곳에서 많이 보이는데, 그런 욕구로 인해
스토리의 인과관계가 많이 축약된 느낌이 든다. 그렇게 축약된 부분을 메우는 게 관객의 몫이며,
그런 과정에서 [가비]는 평가가 엇갈릴 수 있는 영화다.
군더더기없고 템포빠른 화려한 연출이라 평가 받을 수도 있고, 그럴 듯하지만 뭔가 외화내빈의 속 빈 강정같다는
평가도 받을 수 있는 게 [가비]다. 이건 편집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가비]의 영상은 아름답다.
상황에 따라 때론 와이드하게, 때론 디테일을 살린 카메라 앵글도 좋고, 전체적인 색감도 좋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의상과 상황에 맞춰 섬세하게 준비된 소품들도 한 몫을 한 거 같다.
조선과 일본, 러시아의 주거환경과 의복을 비교하는 재미도 있는데, 특히, 고종의 백색 곤룡포가 흥미롭다.
여지껏 사극을 통해 보아온 조선시대 왕의 곤룡포는 금색 혹은 붉은 색이었는데, [가비]에서 고종은
늘 흰색의 곤룡포만 입는다. 아마도 명성황후의 국상을 치루지 않은 상태에서 피신을 왔다는 역사적 사실과,
본인이 다스리는 영토 안에서 다른 나라 공사관으로 피신한 나라 잃은 왕의 쓸쓸한 마음을 표출하고자 한
연출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어찌됐든 흰색 곤룡포는 박희순의 회한이 섞인 표정과 좋은 매치를 보여준 거 같다.
배우.. 간단하게 짚자.
조각같은 외모에 시선이 먼저 가기 때문이 아닐까.. [가비]에서 일본군 제복을 입은 주진모의 모습은
냉정한 감정의 일리치와 너무 잘 어울린다.
오히려 여린 듯하지만 흔들림없는 신념을 갖춘 캐릭터를 잘 보여준 거 같다.
능력을 갖춘 개성있는 연기자.
다른 연기에서도 늘 보아오던 그런 밋밋함?
김응수. 정말 요즘 TV건, 영화건, 이쪽 저쪽에서 자주 보인다. 꼭 주연이 아니면 어떤가..
쓰임새가 많다는 건 연기자로서는 가장 큰 보람이다.
영화를 소개하는 TV 프로에서 [가비]에 대해 "물 맛 나는 커피" 라고 평 하는 걸 들었다.
그 평은 너무 가혹하다 생각하지만, 진한 맛의 에스프레소나 짙은 향의 커피를 기대했던 사람에게
조금은 아쉬운 여운이 남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