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화살
보고 듣고 느끼고/영화겉핥기 2012. 1. 24. 03:31 |영화가 끝나면서 스크롤 업 되는 출연진과 스탶의 이름에서 눈에 들어오는 이름이 하나 있다.
감독 정지영. 감독이 누군지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다.
정지영 감독의 영화를 본 게 언제였는지... 정지영 감독의 작품에는 메시지가 있다.
한번쯤 음미하고 짚어봐야 할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재조명함으로써 시대가 놓친 쟁점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감독이 정지영 감독이다.
국민배우 안성기. 그가 선택한 영화, 그리고 그가 맡은 배역은 늘 페이소스와 함께 곱씹어 볼
의미를 준다. 그렇게 무언가를 생각하게 하는 그런 감독과 배우가 만나 2007년에 발생한 당시
성균관대학 수학과 김명호 교수의 판사에 대한 석궁 테러사건을 근거로 제작한 영화 [부러진 화살]은
시사회 후 당시 변호사의 "실제 재판과정과 싱크로율 80%" 라는 인터넷 기사 만으로도 영화팬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요체는 이렇다.
교수 재임용에 탈락한 김명호 교수가 성균관대학을 대상으로 한 [교수지위 확인소송] 항소심에서
패하자, 이에 불복하여 원고 패소판결을 내린 판사에게 석궁을 쏜 김명호 교수에 대해 재판부가
사법질서 파괴라는 이유로 실형을 선고한게 2007년 석궁 테러사건이다.
하지만 영화는, 당시 사법부의 재판 과정이 사법부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는 다분히 감정적인 처사와 함께
제 식구 감싸기에 의해 편파적으로 진행됐다는 시각으로 접근한다.
불과 5년 전의 사건에 대해 진실이 무엇인지를 판단할 근거가 나에게 없기 때문에 정지영 감독이 의도한
영화의 접근방식이 맞는지, 혹은, 당시의 판결이 맞는지에 대한 판단은 유보한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몇 가지 내 머리 속에 윤곽이 잡히는건 있다.
모든 진실게임에서는 이해 당사자가 배제되는게 그나마 제 3자를 납득시키는데 도움이 되겠다는거.
즉, 판사가 연루된 재판에서 판사에게 절대적인 재량권이 주어진다면 결과에 대해 시비가 엇갈릴 수
있다는 생각이다. 반드시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사안에 따라 외국의 배심원 제도와 같은
국민참여재판의 정착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는, 판검사가 모두 사법고시를 통한 사법연수원 출신이라는 법조시스템의 태생적 공통분모하에서,
그들을 거스르며 법을 다루는 집단에 대항한다는 건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의 운명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에서 독방에서 법을 공부하며 재판부에 논리적으로 대항하던 김경호 교수가 어느 순간 공동실로
이감되어 고통을 겪으면서 투쟁 의지가 꺾이는 장면이 그렇다.
마지막 하나는, 사법부에 대한 견제시스템이다.
영화에서 무죄 입증과 공정한 심리를 위한 변호사와 피고의 법에 근거한 정당한 요청과 주장에
대해 재판장은 상식선에서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모르쇠로 일관하며 묵살한다.
아무도 어쩔 수 없는 사법부의 이런 도를 지나친 모습에 관객은 실소로써 분노를 표현한다.
영화에서 일부 의식있는 현장 취재기자들에 의해 사법부의 독선에 대해 언론차원의 문제 제기가
시도되지만 이마저 보이지않는 힘에 의해 좌초되고 만다.
이렇게 사법부에 대한 도전이라 규정 후 엄단이라는 전제를 깔고 진행되는 재판에서 변호사는
최후 변론의 말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을 한다.
"... 오만하고 독선적인 사법부에 대해 국민의 준엄한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 대사를 들으며 혼자 생각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사법부에 대해 국민이 할 수 있는 심판에 무엇이 있나..?
국회의원에 대한 심판은 4년 주기로 찾아오는 선거로 할 수 있다.
정부, 혹은 여당에 대한 심판도 선거로 가능하다. 자치단체장에 대해서는 국민소환제가 있다.
정권의 실정에 대해서는 집회와 시위로 의사표시를 할 수 있다.
이렇게 입법부와 행정부에 대해서는 선거와 시위로 심판 및 의사표시가 가능하다.
하지만, 사법부의 불신에 대해서는 국민이 할 수 있는게 별로 없다.
사법부는 선출직이 아니므로 선거를 통해 심판할 수 없으며, 집회나 시위의 방법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에는 국민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이슈가 약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실제 당사자인 김명호 전 교수는 판사도 선거를 통해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러진 화살]에서 이런 문제점에 대해 공감할 수 있다면, 영화를 만든 의의는 있다고 본다.
아울러, 짧은 화면 할애만으로도 일반인이 느끼지 못하는, 하지만 인권을 유린당하는
피해자에게는 절박한 교도행정의 문제점을 절실하게 보여준 것도 정지영 감독의 역량이다.
아쉬운 것도 있다.
법정을 테마로 한 영화의 백미는 원고측과 피고측의 치열한 법리논쟁이다.
원고측과 피고측이 서로 자기 측에 유리한 근거를 제시하며 자기 논리의 당위성을 입증하면서,
한편으로 상대방이 주장하는 논리의 허점을 파고드는 과정을 얼마나 치밀하게 보여주느냐가
법정드라마의 성공요건이다. 하지만, [부러진 화살]은 그 한축이 무너진 영화다.
[부러진 화살]에 원고측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형사사건인 만큼 원고에 해당하는 검사는
기소를 위한 여러가지 정황에 따른 충분한 증거와 논리를 제시해야 함에도 이 영화에서 검사는
아무 역할이 없다. 대한민국 검사의 수준이 저 정도인가 한심할 정도로 아는 것도 하는 것도 없는
완전 꿔다놓은 보리자루다. 마치 동네 아이들 싸움에서 엄마의 눈치만 보는 어린아이처럼 재판장의
처분만 바라는 눈치다. 판사 또한 그렇다. 변호인과 피고의 집요한 논리전개에 대한 판사의 대응은
오로지 [기각]뿐이다. 피고측이 추궁하고 재판부는 쩔쩔매는, 원고측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이상한 재판.
싱크로율 80%라는 담당 변호사의 언급한대로 실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법정영화의 구성면에서는
한 축이 무너진 비균형적인 영화다. 감독이 관객에게 긴장감 대신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려는 의도였다면
이 지적은 틀릴 수도 있지만.
박준 변호사 역의 박원상은 초반 약간 오버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안성기의 까칠한 캐릭터를
중화시키는 넉넉한 이미지의 파트너로 좋은 매치를 보여준 거 같다.
4년 형기를 마친 [부러진 화살]의 실제 주인공 김명호 씨는 동아일보 인터뷰를 통해 "설 이후 당시
재판과정의 경험을 담은 500쪽 분량의 [판사 니들이 뭔데?] 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할 예정이며,
이 책을 통해 사법부가 양아치 조폭 집단이라는 것을 법리적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증거 조작 등
위법을 일삼는 판사들과 법원 판결을 무비판적으로 보도하는 언론을 비판하겠다” 고 했다.
과연 얼마나 사회적 파장을 미칠지 주목된다.
아무리 최정상급의 스타라도 세월이 지나면 정상의 자리를 후배에게 내주게 마련이다.
주연이 아닌 배역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그들도 나이가 들면서 어쩔 수 없이 카메라의 중심을 비껴선다.
국민배우로 최고의 자리에 위치하던 안성기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안성기가 토크 프로에 나와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느 순간엔가, 캐스팅 제의가 들어와 당연히 주연이라 생각하고 대본을 받았는데, 내 배역이
주연이 아닌 조연이더라. 많이 당혹스러웠지만,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가 더 이상 설 곳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배우는 연기할 수만 있다면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최근 몇 년 안성기가 출연한 영화를 보며 스크린 한 켠에 비껴선 그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애잔한 세월의
무상함이 안타까웠는데, [부러진 화살]을 통해 다시 당당히 앵글의 중심에 있는 그의 모습이 무척 반가웠다.
[대부]에서의 말론 브란도와 같이 나이 든 그의 건재한 모습을 오래도록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