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전
보고 듣고 느끼고/영화겉핥기 2011. 8. 5. 14:59 |영화본지가 꽤 오래 되었다.
일부러 기피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화보기 힘들만큼 여유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그동안 그닥 필이 꽂히는 영화가 없었다.
그러다 오랜만에 본 영화 [고지전]. 안그래도 은근히 관심이 가던 영화였는데,
방학 중 잠시 다니러 온 재원이의 제안으로 오랜만에 네 식구가 함께 야탑 CGV를 찾았다.
요즘 전쟁영화는 적과 아군, 그리고, 선과 악의 구분이 없다.
대척지점에 있는 양쪽이 존재할 뿐. 설사 피아를 구분한다 하더라도,
아군이라 해서 모든게 선은 아니고, 적이라 해서 무조건 악이 아니다.
각자가 처한 위치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두 집단이 있을 뿐이다.
전쟁을 수행하는 집단의 이념을 다루는게 아니라, 이념이 다른 집단에 속해있는
구성원들의 인간적 내면을 다루는게 냉전시대 종식 후 전쟁영화의 대세가 됐는데,
전 세계 유일한 이념의 냉전지역인 우리나라 전쟁영화도 그런 흐름으로 간다.
[고지전]도 그런 영화다.
국군이라 해서 모든게 옳은게 아니고, 북한군이라해서 모두 잔인하고 비인간적인게 아니며,
각자의 환경에서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최선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서두에
북한군 장교가 전투중 생포한 남한 포로를 폼나는 일장 훈시와 함께 풀어주는 장면,
부대원의 생존을 염두에 두지않는 작전지시가 불합리하다고 판단하여 상관을 사살하는
장면 등을 이전의 잣대로 재단한다면, 고지전은 친북 빨갱이 영화고 상영불가 영화다.
방첩대 소속 강은표 중위(신하균).
무심결에 내뱉은 실언으로 인해 징계 위기에 처하자, 그를 아끼는 상사의 배려로 최전선 부대에서
발생한 미심쩍은 현상을 조사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동부전선 최전방인 악어중대로 배속된다.
임박한 휴전협정을 앞두고 한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연일 사투를 벌이며
하루걸러 주인이 바뀌는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격전지인 애록고지에 배치된 악어중대.
강은표 중위의 임무는 북한군과 교전중인 악어중대 군사우편망을 통해 북한군의 편지가 남한으로 보내지는
현상과, 전사로 보고된 악어중대장의 시신에서 아군 지휘관용 권총 탄환이 발견된 정황을 조사하는 것.
악어중대에 부임한 강은표 중위는 나약하기만 했던 자신의 부하로, 북한의 포로가 됐던 대학동기
김수혁(고수)을 만나는데, 2년 만에 재회한 김수혁은 나약한 일등병에서 냉철한 장교로 변해 있었다.
믿을 수 없을만큼 놀라운 모습으로 변신한 친구, 나이어린 임시 중대장의 기이한 행동, 그리고,
뭔가 숨겨진 비밀이 있는 듯한 아군 내부의 묘한 심리적 충돌, 은밀한 내통으로 보여지는
적과의 이상한 교류, 아군마저도 경계하는 극도의 폐쇄성 등등 이해하기 힘든 여러 현상들.
강은표 중위는 이런 여러 현상들을 접하며 전장에서의 휴머니즘과 집단의 생존을 위해 벌어지는
상상을 초월한 행위에 대해 충격과 함께 옳고 그름의 판단에 대한 혼돈을 겪게 되는데..
[고지전]은 전장에서의 휴머니즘과 생존의 의미를 생각케 한다.
전장에서의 휴머니즘은 예기치 못하는 엄청난 비극을 초래할 수 있는 나이브한 감정이며,
생존을 위해서라면 비상식적인 냉혹한 결단도 묵시적으로 용인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겪는
고통도 결국 개개인의 몫이라는걸 생각케 하는 것이 이 영화가 주는 화두가 아닌가 싶다.
포항 철수시 집단의 생존을 위한 신일영(이제훈)의 행동으로 인한 부대원의 심리적 공황과 정신장해.
강은표와 김수혁의 이초(김옥빈)에 대한 감정으로 인해 초래된 결과와 이초에게 행해지는 강은표의 마지막 행동.
그리고, 적과 대치한 전투상황에서 장교로서 이해하기 힘든 김수혁의 행위에 대해 원칙과 교과서적인 강은표의
군인정신이 수시로 대치하지만, 그때마다 김수혁의 말과 행동에서 의미없는 원칙보다 의미가 담긴 현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강은표의 모습들. 이러한 장면들이 이 영화를 보는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주연을 가리는게 의미가 없지만, 굳이 가린다면 메인 주연인 신하균보다 고수가 더 메인 주연처럼 느껴지는건
두 사람의 연기력보다 두 배역이 갖는 캐릭터의 차이 때문인거 같고, 그보다 가장 막내로 전투에 참전했지만,
뛰어난 전공으로 대위까지 승진해 선배들을 이끄는 나이 어린 중대장 역을 개성있게 표현한 이제훈이
아주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사족 하나.
지루하게 진행되던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그토록 바라던, 가족에게 살아서 돌아간다는 희망에 환호하지만,
12시간 후부터 발효된다는 소식과 함께 최후의 고지탈환 명령이 떨어진다.
여지껏 지탱해온 생존이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는 마지막 전투가 남았다.
그 상황에 접해보지 않은 사람은 누구도 현실을 받아들이는 심정을 가늠할 수 없다.
아울러, 국가에 있어 영토의 개념과, 목숨을 담보로 해가며 차지해야 하는 산봉우리가
개인에게 주는 의미의 차이도 생각케 한다.
오랜만에 본 영화로 만족스러운 영화.
예고편으로 본 [최종병기 활]도 상당히 관람욕을 자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