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간 40분의 런닝타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님에도, 거의 지루함을 느끼지 못한 채 몰입했다면
일단 괜찮은 영화라고 평해도 되지않을까. 오랜만에 스릴러다운 스릴러를 접했다.
[이끼]는 꽤 할 말이 많은 영화이면서고, 어떻게 평해야할지 모르는 영화다.
그만큼 임팩트가 강하다.  한가지를 제외하곤 흥미롭게 본 영화다. 

잘은 모르지만 원작 [이끼]는 꽤 많은 분량의 장편만화로 알고 있다.
강우석 감독은 방대한 양의 만화를 탄탄한 연출로 잘 농축시켜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160분이라는 상영시간을 보더라도 원작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공포 스릴러인 [이끼]는 간간히 코믹스런 대사로 관객이 너무 경직되지 않도록 배려하면서도,
그렇다고 그런 대사로 인해 긴장감있게 전개되는 흐름이 흐트르지지않게 하는 세심함을 보인다.

[이끼]에서 가장 돋보이는건 모든 출연진의 농후한 연기다.
이상주의자 유목형을 연기한 허준호의 진짜 채식만 섭취한 듯한 얼굴도 그렇고,
박민욱 검사 역의 유준상도 모처럼 자기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듯한 연기를 보였지만,
이 영화 배역의 백미는 천용덕 역의 정재영이다.

정재영은 여러 영화의 다양한 인물을 연기했지만, 그의 연기는 무색무취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특징이 없다는게 아니라, 담백하다는 의미다. [동막골], [바르게 살자], [김씨표류기] 등에서
그가 보인 모습은 어눌한 진지함이나 어눌한 코믹이었다. 그의 연기가 어눌했다는게 아니라,
그 배역의 캐릭터가 그랬고 그게 그의 담백한 연기와 잘 맞았다는 얘기다.
[거룩한 계보]에서 액션을 하기도 했지만, 선 굵은 연기자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이번에 제대로 만났다.
[이끼]에서 정재영은 배우로서 아주 강한 인상을 각인시켜 주었다. 특히, 영화 끝부분,
지하로 통하는 통로의 틈으로 대화를 엿보는 그의 광기어린 눈빛은 압권이었다.
원작 만화와 거의 같게 묘사한 노인분장도 한몫을 한거 같다. 

박해일은 거의 변화가 없는 듯한 표정이나 목소리 톤으로 인해 연기력에 대해 말이 있을 수 있는데.
이 영화를 보니 그게 배우로서의 그의 캐릭터라는 생각이 든다.

[이끼]를 보는 내내 인상적이었던 것은 OST다.
영화의 상황 상황에 맞게 깔리는 사운드트랙이 이 영화를 더욱 밀도있게 느끼게 해준다.
당연한 얘기일 수 있지만, 소리가 분위기에 빠져드는 느낌을 만들어간다는게 참 신기하다.  
    
또 한가지, 거의 엔딩 씬인 두 사람의 마주보는 눈길에서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영화의 반전이 이루어지는데, 일반적인 반전과 다른 점은 반전을 모르고 지날 수도 있다는거다.
영화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긴장의 끈을 놓은 관객은 반전이 있었다는 것도 모른 채 지날 수 있는,
그러니까, 이게 반전이라는걸 알려주는게 아니라 관객 스스로가 느끼게하는 반전을 깔아놓은 것이다.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긴박감 넘치는 스릴러를 즐기는 것도 재밌지만,  
지나친 이상주의는 그걸 따라가지 못하는 보통사람의 정신을 피곤하게 만들고,
그게 곧 이탈심리로 이어져 오히려 부정적인 행동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메시지도 건질 수 있다면.
영화보러 가서 경품받은 격이랄까.

영화 시작 후 꽤 긴 시간이 지나고서야 제목이 나오는 영화.
그만큼 줄거리의 인과관계가 만만치 않다는걸 암시하는데, 서두에 언급한 한가지의 결함이란,
아버지의 빈소를 찾아온 유해국에게 보여주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지나친 거부감이 
마치 이렇게 대결구도가 형성된다는걸 인위적으로 알려주려는 듯한 어색함이 있다는 것.

초반과 중반 몇 번의 끔찍한 장면이 마음 약한 사람을 놀래키기도 하지만, 스릴러로서 수작이라고 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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