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라는 가정은 역사에 의미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가정을 전제로 한 상상은 늘 새로운 창의를 유발하고, 그만큼의 유쾌한 재미를 준다.

[방자전]은 그런 기조로 만들어진 영화다.
이몽룡과 춘향이는 서로만을 좋아했을까?
그들에게 방자와 향단이는 정말 안중에도 없는 존재였을까?
또 이몽룡과 춘향이는 방자와 향단이에게 전혀 오르지 못할 나무였을까?

이몽룡과 춘향이의 러브라인이 주가 되는 춘향전을 요리조리 뒤집어본 영화 [방자전].
[방자전]은 방자가 이야기 대필작가(요즘으로 하면 자서전 대필작가가 되겠다)에게
자신의 사랑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시작되고 진행된다.


[방자전]의 주요인물은 기존 [춘향전]의 등장인물과 이름과 신분은 같지만, 캐릭터는 전혀 다르다.
 
류승범이 이몽룡 역으로 캐스팅된 것만으로도 이몽룡의 캐릭터는 반쯤 그림이 그려졌다.
그간 수많은 작품에서 보여졌던 류승범의 캐릭터.. 감독이 그의 그런 캐릭터를 요구했다면,
이몽룡이 올바른 품행의 모범적인 양반집 자제가 아닐거라는건 뻔히 보인다.
[방자전]의 이몽룡은 그런 예상과 어긋나지 않는다. 요즘의 날라리에 버금가는 권모술수에 능한 한량이다.

춘향의 캐스팅 역시 유사하다.
기존 영화의 수많은 춘향은 미모는 기본이고, 단정하고 기품과 절개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조여정의 캐릭터는 그렇지않다. 조여정 개인에게는 좀 미안한 표현이지만, 그녀에게서는
고전적인 기품과 절개보다 현실적인 실리를 추구하는 현대여성의 개성이 더 돋보인다.
[방자전]의 춘향이 그렇다. 춘향은 사랑과 실리에 대한 저울질을 계속 한다.

방자를 보자.
춘향전의 방자는 이몽룡에 비해 인물은 물론 체구도 밀릴 뿐 더러 행실도 가볍다.
[방자전]의 방자는 그 반대다. 인물도 더 낫고, 체구도 듬직할 뿐 아니라, 행실도 진중하다.
춘향전에서는 향단이에게 객쩍은 수작도 걸지만, 여기서는 향단이에겐 관심도 없다.

향단이도 그렇다. 춘향전의 향단은 종속적이고 늘 춘향이의 곁에 머물며,
방자와 희희덕거리는게 고작이지만, [방자전]의 향단은 강한 생활력으로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며 감히(?) 이몽룡과 잠자리를 즐기기도 한다.       

춘향전의 한 축을 이루는 변학도 역시 탐관오리라기보다 싸이코에 가깝게 나오는데, 이렇듯, 
그간 우리에게 익숙했던 춘향전의 주요인물들은 방자전에서 완전히 색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김주혁, 조여정, 류승범, 류현경, 송새벽은 여지껏 우리가 전혀 만나본 적이 없는 
새로운 방자, 춘향, 이몽룡, 향단, 변학도를 아주 감칠 맛 나게 잘 만들어 주었다.

[방자전]은 기발한 역발상으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유쾌한 영화지만,
정작 주인공인 방자는 시종일관 진지하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면서 마무리를 어떻게 할지
궁금했는데, 전혀 생각치 못했던 춘향의 반전과 함께 의외로 차분한 맺음을 한다.   


춘향전이 한 남자에 대한 한 여자의 일편단심 사랑이야기라면,
[방자전]은 한 여자에 대한 한 남자의 지순한 사랑이야기다.

[방자전]은 춘향전이 나오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주는듯 한데, 데쟈뷰 현상을 느끼듯,
이 이야기가 마치 사실인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착각이 들 정도로 시나리오를 잘 만들었다.
군데군데 붕 뜨는듯한 장면이 있긴 하지만, 어차피 기본적으로 코믹을 가미한 영화임을 감안하면
문제삼을건 아니라고 본다.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흐름에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다.

화면을 보면서 느낀거 하나. 영상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케이션 헌팅도 좋았고, 촬영도 정성껏 한 것 같다.


영화가 끝나자, 한 관객이 나가며 하는 이야기가 들린다.
"에이.. 괜히 봤네. 딴거 볼걸.."

그 말을 듣고 아내에게 웃으며 말했다. "어~ 나는 좋게 잘 봤는데..."
역시 사람마다 와닿는게 다른 모양이다.

처음 이 영화의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유쾌한 영화를 만들어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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