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화 속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영화겉핥기 2010. 6. 21. 01:56 |아내가 먼저 특정 영화를 지정하며 보자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극히 이례적인 경우지만, 한참 전부터 아내가 "[포화 속으로] 아직 안하나?" 하며
몇 번 씩이나 이 영화를 챙기지 않았다면, 가슴찡한 감동을 놓칠 뻔 했다.
결론부터 말하는 이 영화를 본 소감이다.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개시한 복한군은 파죽지세로 전선을 밀고 내려왔고,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에 전 병력을 집중시킨다.
보병 제3사단 소속의 강석대(김승우) 대위는 포항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 임을 강조하지만,
투입할 병력이 없다는 상부의 방침에 어쩔 수 없이 학도병 71명에게 포항 사수의 임무를 부여한다.
하지만, 북한군 766부대의 대대장 박무랑(차승원) 역시 포항을 통한 우회가 부산 점령의 지름길이라 판단하여
상부의 지시를 무시한 채 병력을 포항으로 진입시킨다.
탱크로 중무장한 북한군 정규군에 맞서는 학도병 71명 중 전장을 겪어본 사람은 겨우 셋.
국군이 낙동간 전선으로 출발하는 날 도착한 68명은 처음 잡아본 소총으로 단 한 발의 사격연습만 했을 뿐이다.
자신을 보호하던 국군을 죽이는 북한군의 등을 바라보면서도 겁에 질려 장전조차 제대로 못하던 오장범(탑)은
그나마 전장의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강석대 대위에 의해 학도병 중대장으로 임명되지만,
소년원 출신으로 학도병에 지원하여 합류한 구갑조(권상우)는 오장범을 인정치않고 사사건건 오장범과 대립한다.
그러는 사이 766부대는 학도병들의 방어진지인 포항여중으로 진격해 오는데...
모든 영화에 관심을 갖지 못하는 내 기억이 틀렸을지도 모르지만,
[포화 속으로]는 2003년 제작된 [태극기 휘날리며] 이후 7년만의 한국전을 소재로 한 영화가 아닌가 싶다.
다른게 있다면, 이 영화는 정규 군인들이 아닌, 학도병들의 이야기라는 것.
어느 날 갑자기 전장으로 나와 전투에 필요한 최소한의 기본적인 훈련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학도병.
그들은 전투에 필요한 요건이 무엇이고, 자신들의 부족함이 무엇인지 조차 모른다.
텅 빈 도시 속 그들만이 남아있는 방어진지인 한 밤의 학교 교실에서 장기자랑을 하며 시간을 보낼 정도로
그들은 적을 마주하기 전 까지는 두려움조차도 없는 순수한 학생들이다.
그런 학생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처절한 전투에 목숨을 던져가는 과정을 담은 [포화 속으로]는,
동생에 대한 맹목적인 형제애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전쟁병기로 황폐화돼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그린
[태극기 휘날리며]와는 또 다른 찡한 울림으로 우리 가슴을 두드린다.
한국전이라는 같은 배경 때문인지 영화내내 [태극기...]가 떠오르는데, 배경이나 전투장면이 [태극기...]만큼
스케일이 크지 않지만, 중학교라는 제한된 전장에서의 전투장면이 아주 짜임새있고 단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중간중간 오장범이 어머니를 생각하며 전하는 독백 장면은 생각하기에 따라 약간 지루함을 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요소가 이 영화를 단순한 전쟁영화가 아닌 메시지가 담긴 영화로 만들어주는거 같다.
차승원, 권상우, 탑, 김승우.. 포스터에는 이런 순으로 캐스팅이 소개되지만, 이 영화의 Main Hero는 탑이다.
작년 하반기 선풍적 인기몰이를 했던 드라마 [아이리스]에서 킬러 역을 맡아 강한 인상을 심어줬던
아이돌 그룹 빅뱅의 멤버인 탑은 [포화 속으로]에서도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 도입부 공포에 질린 유약한 모습, 그런 유약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강한 척 하는 중반의 모습,
그리고 실제 강하게 변해가는 종반의 모습을 탑은 인상적으로 끌어가고 있다.
다른 주연급 연기자들도 각자의 역을 멋지게 소화하는데,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운게 있다면 권상우다.
이는 권상우의 연기력을 논하는게 아니라, 권상우의 나이가 학도병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좀더 학도병의 연령에 부합되는 젊은 배우를 캐스팅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는 모든 사람들이 한번씩 봤으면 좋겠다.
요즘 우리가 누리는 자유로움이 그냥 얻어진게 아니라, 누군가 우리 앞 세대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고,
그 누군가가,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어린 나이의 청소년들이었다는걸 생각하면 숙연해진다.
내가 고등학교 때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과연 나는 어떤 행동을 했을까... 그런 반문을 해보며,
특히, 요즘의 젊은 층들이 이 영화를 보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았으면 한다.
영화가 끝나고 스탭들 소개 자막이 올라오며 당시 참전했던 학도병 중 생존자 두 분의
"그래도 나는 살아서 이렇게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 할 수라도 있지요, 그때 희생당한 학우들을 생각하면.."
이란 내용의 회고 증언이 영상으로 나오는 순간, 계단과 통로를 따라 나가던 관객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춘 채
미동도 없이 경청하는 모습에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무언가 전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관객이 빠져나온 뒤에도 혼자 객석에 앉아 두 손을 마주한 채 끝까지 스크린을 응시하던 나이드신
남자분의 처연한 표정이 눈에 밟힌다. 혹시 형제 중에 그렇게 희생당하신 분이 계신건 아닐까..
가족들과 함께 볼만한 영화로 적극 추천한다. 나중에 DVD로 나오면 미국에 있는 아이들에게도 보내줄 생각이다.
아울러, 이 영화가 [태극기 휘날리며] 정도의 흥행을 이루었으면 하는 기대를 해본다.
사족 하나.
영화를 보고 나오며, 아내에게 말했다.
"마지막에 깔리는 음악의 분위기가 [태극기 휘날리며]에 나오는 음악과 느낌이 비슷하데.."
그리고 집에 와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 영화의 음악을 담당했던 사람을 검색하니, 동일인이다.
우와~~ 내 귀도 막귀는 아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