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보고 듣고 느끼고/영화겉핥기 2010. 5. 5. 02:54 |2009년 7월 [님은 먼곳에] 이후 9개월만에 선보인 이준익 감독의 영화.
이준익의 영화는 빼놓지않고 보아온 이준익 마니아지만,
이번에 특히 내 호기심을 자극한건 이준익과 차승원의 조합이다.
이준익의 영화는 대부분 좋은 평을 받았다. 반면에,
차승원이 출연한 영화 중 그의 이름에 비해 흥행에 크게 성공한 영화는 기억에 별로 없다.
특히 그가 출연한 사극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이건 그의 연기력과는 별개의 문제다.
차승원의 이미지는 코믹영화에 더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때문에 두 사람의 조합이 만들어낸 결과가 궁금했다.
이준익의 사극에는 늘 코믹이 가미된다. 코믹은 이준익 사극의 바탕이다.
그리고 이준익 사극의 코믹은 권력의 희화화에 방점을 둔다.
이 영화에서도 그렇다. 왕과 대소신료들이 모이는 어전은 항상 봉숭아학당이다.
최근 몇년간 만화를 영화화한 작품들이 많이 나왔는데, [구르믈...]도 원작은 만화다.
작년 [님은 먼곳에]를 본 후, 이런 글을 올렸었다.
괜히 이준익 감독이 만든 최석환이 아닌 다른 작가의 영화,
이준익이 아닌 다른 감독이 만든 최석환 작가의 영화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지금 같아서는 언젠 그럴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구르믈..] 역시 최석환 작가가 각본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혼자만의 작품이 아닌, 다른 두 사람과 공동 각본이다.
그래서일까...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간걸까.. 아님, 사공이 많아 서로 노젓기를 소홀히 한걸까...
영화는 군데군데 진부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엉성하게 와닿는 면이 의외로 많다.
처음엔 진부함을 세세함이라고 생각했고, 엉성함을 간결함이라고 간주했다.
이준익에 대한 기대감과 집착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보아주려해도 실망스러움은 어쩔 수 없다.
스토리 전개도 인과가 분명치 않고, 영화의 마무리도 그렇다.
기(起) 승(承)은 있는데 전(轉) 결(結)이 이어지지가 않는다.
구성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이준익답지가 않다.
의외로 사소한 부분에서 어색함이 보이는데, 예를 들면,
황정민과 차승원의 무술대결은 몸짓은 치열하지만, 긴장감과 리얼리티가 없다.
요즘 영화답지않게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게 너무 드러난다.
황정민이 공격하는 칼의 방향에 차승원의 칼이 먼저 기다리고 있는게 보일 정도니..
한지혜의 대사도 신파처럼 느껴진다면 너무 무지한 평인가.
한지혜가 표현하기에 영화 속 백지의 캐릭터는 너무 무거웠는데,
대사의 내용마저도 백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가벼움을 부추기는듯 하다.
[구르믈...]은 더블 히어로지만, 황정민을 위한 영화가 된 느낌이다.
그의 맹인 연기와 쉴 새 없이 주절대는 애드립만으로도 관람료 반본전은 뽑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황정민을 Main Hero라고 보기도 어렵다.
연기만으로 볼 때는 황정민이 주인공 같지만, 영화에서 모든 사람들은
- 황정학(황정민)까지도 - 이몽학(차승원)의 궤적을 따라 종속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차승원의 연기는 고정된 느낌은 있지만 배역에 충실했다고 본다.
다만, 작품 속 두 캐릭터가 너무 상반되다보니,
마치 챨리 채플린과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공존하는 모습이랄까.
영화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제목에서 나타난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구름은 대의(大義)이자, 이루고자 하는 꿈이다.
달은 그것을 일궈내는, 즉, 대의를 앞세워 새로운 것을 꿈꾸는 존재를 지칭한다.
달이 구름 속에 가리워져 있을 때는 그 달의 형체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달이 구름을 벗어나는 순간, 그 달이 꽉찬 만월(滿月)이었는지,
아직 영글지 않은 초승달이었는지, 기울어가는 그믐달인지 실체가 드러난다.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다.
개혁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많은 사람들이 大義를 앞세우지만,
大義를 잃었을 때 비로소 그 이면에 있던 저마다 다른 크기의 그릇이 드러난다는 것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깨달아야할 교훈이 아닌가 싶다.
흥미로운건, 영화 속 현실주의자인 황정학은 은유화법을 즐기는 반면,
이상주의자인 이몽학은 직설적이고 강렬한 화법을 사용한다는 것.
어찌보면 그 반대가 더 어울릴 것 같은데,
곰곰 생각해보니 현실은 직접적인 마찰을 꺼리는 사람들의 몫이고,
이상은 신념을 바탕으로 할 때 성취되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영화는 비록 기대에 미치지 못해 실망스러웠지만,
영화가 주는 메시지를 이해했다면 소득없는 영화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