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따뜻한 구본수 兄
나의 폴더/사람 사람들 2006. 4. 8. 01:50 |
얼마 전 오후에 느닷없이 아는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평소에도 가끔은 통화를 하지만,
이날은 왠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다르다.
어디야...?
뭐하냐...?
... 응... 그냥 생각나서 전화했지... 쏘주나 한잔 할까 하고...
뭔가 이상하다... 이 양반이 무슨 일이 있나...
분명히 뭔가 할 얘기가 있는거 같은데, 말은 안하고...
> 저녁에 일찍 들어가요?
- 그럴거 같으네...
> 그럼 오랜만에 형수랑 저녁이나 같이 하죠.
- 우리끼리 하자..
> 아~ 그래도 오래만에 형수 얼굴도 봐야지...
- 야~~ 여자들 껴봤자, 쓸데없는 소리 한다고 옆구리 찌르기나 하지 뭐... 우리끼리 해.
> 그래요 그럼...
해서... 7시반에 만났다.
단둘이 만난게 도대체 얼마만인가... 단둘이 만난 적이 있긴 있었나... 기억도 안날 정도로.
오랜만에 둘이 홍탁삼합과 동동주 뚝배기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만나서도 한동안은 일상적인 얘기만 하는데, 본론이 제대로 안 나온다.
내가 이 선배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 1학년 때.
같이 써클활동을 하는 동기 여학생의 오빠로, 같은 대학의 4학년이었다.
캠퍼스에서 같이 생활한 기간은 1년이었지만, 선배는 8남매로 누나와 형이 있고 여동생도 있지만
남동생이 없는, 남자형제로서는 막내였기에, 나를 친동생처럼 가까이 대해 주었고,
나 역시 형이 없는 장남이라 첫 인상이 좋았고 성격도 좋은, 선배에게 스스럼없이 ' 형 ' 이라고 부르며
만난 기간 이상으로 가까워 졌다.
선배도 ROTC를 하고 나 역시 같은 길을 걸어 동질성을 느끼곤 했지만,
서로 엇갈리는 군 입대로 연락이 끊겼었는데,
수 년이 지나 내가 결혼 후 신혼살림을 차린 아파트의 같은 동에 살고 있었다.
아파트 출입구 앞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얼마나 놀랍고 반가웠던지...
그 후, 서로 이사를 다니고 직장을 옮기며 또 연락이 끊기고, (그 때는 핸드폰이 없었으니까)
딸아이가 한영외고에 입학하여 집사람이 학교엘 갔다가 우연히 학교에서 형수를 만난 것이다.
선배의 둘째 아이가 딸아이의 일어과 선배였던 것.
참.. 인연이란게...
그런 절친한 선배가, 뭔소리를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하고 있는데,
얘기를 슬슬 시작한다.
자기가 일요일에 베란다 창고 정리를 하다가 상자를 발견했다는 얘기.
그 상자 안에는 오래 묵은 편지가 있었다는 얘기.
그 편지속에 내가 보낸 편지가 있었다는 얘기.
내가 보낸 편지를 다시 읽어보며, ` 아... 얘가 나한테 이렇게 많은 편지를 보냈었구나...` 생각했다는 얘기.
그러고보니 자기는 내게 편지 한통 못 보낸거 같아 새삼 미안하더라는 얘기.
그 어릴 적에 자기를 형처럼 따랐던 동생에게 제대로 못 해준거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들더라는 얘기....
그래서 새삼스레 생각이 나서 쏘주한잔 하고 싶었단다.
- 네가 보낸 편지가 꽤 많아... 열 몇통..한 열일곱통 정도 되던가...
> 내가 그렇게 많이 보냈어요? 뭘 그리 많이 보냈지...
그러면서 편지 한통을 안 주머니에서 꺼내 건네준다.
- 아무거나 하나 가져왔다.
그 편지의 겉봉 주소엔 그 형이 처음 입대했던 군부대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쭈~욱 읽어내려가는데 석장이나 된다.
내용도 재밌다. 나름대로 내 속 마음이 다 담겨져 있는거 같다.
심지어는 뭔지 기억도 안나는 얘기지만, 학교 써클활동을 하면서 속상한 이야기까지...
1975년에 쓴 편지니까 얼추 30년 전에 쓴 글이다.
한가지 스스로 놀란건 20살의 아직 어린 젊은이가 쓴 글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내용이나 필치가 제법 어른스럽더라는거다. (결국 자랑하는게 되지만...)
나름대로의 생각이 많이 녹아 있다.
내가 썼던 그 편지 속에 대충 이런 문구가 있었다.
[ 많은 좋은 사람들을 아는게 성공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라면, 나는 성공할 자신이 있습니다.]
글쎄... 기억도 안나는 30년 전의 다짐대로 내가 지금 성공하고 있는건지...
한가지 분명한 건 비단 내가 아니더라도 당시 스무살의 청년과 지금 스무살의 청년과는
많은 의식의 차이가 있을거라는거다.
형이 다음에 만날 때 내가 보냈던 편지를 모두 복사해서 주겠단다.
젊은 시절의 생각과 지금을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겠냐고...
좋은 얘기 같다.
그날, 무척 행복했다.
내가 의도하지 못해서 결코 간직할 수 없었던 내 생각의 타임캡슐을
누군가의 세심한 배려덕분에 찾을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보다 더 행복한 것은,
그 옛날, 단순히 정감있게만 느껴졌던 형이
30년이 지난 지금, 내게 커다란 나무그늘과 같은 존재로 다시 다가왔다는 점이다.
그간 가끔 만나기도 했지만, 그 형이 새삼 정겹게 느껴지며 기대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집에 와 그 이야기를 했더니, 집사람과 딸애가 오히려 더 황홀해 한다.
- 집사람 : 옛날 편지를 들춰보고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어 일부러 전화를 한다는게...
지연아... 너무 아름다운 50대 아니니??? 너무 멋있다...
- 딸아이 : 향모언니네 아빠가 그렇단 말이야... 얼~~~ 감동이야.
아빤 행복하겠다. 나도 나중에 성은이와 그럴 수 있을까...
내게 너무나 커다란 행복감을 안겨준 본수兄 !!!
兄... 고마워..
나머지 편지 복사본 받는 날은 내가 한잔 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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