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에 갇힌 지 어영부영 40분이 지났다.  슬슬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한다.
이러다 이거.. 진짜 여기서 날밤 새우게 되는 거 아냐...

환장하는 게, 이놈의 기차는 어디를 봐도 비상시 조치에 대한 영어 설명이 없다.
독일의 쾔른까지 가는, 명색이 국제열차 아닌가.
그럼 만국 공용어인 영어 설명 쯤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문득, 우리나라 각종 편의시설에 영어 안내가 얼마나 있었는가 되짚어 보게 된다.
이래서 외국인을 위한 영어 안내가 필요한 거구나...

역지사지...  당해봐야 안다.


그건 그거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 열차에서 빠져나가는 거다.
텅빈 객차의 이 칸 저 칸을 분주하게 옮겨 다니며, 뭔가 탈출의 실마리가 될만한 걸 찾느라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구석의 차창에 비상 탈출용 손도끼가 보인다. 
비상시 유리창을 깨기 위한 용도다.

그래... 이거라도 있으면 됐다.  좀 더 방법을 찾아보고, 최악의 경우엔 유리창 깬다.
까짓거 누가 와서 뭐라 그러면, 유리창 값 물어주면 될 거 아냐...

그리 생각하며 손도끼를 손에 움켜쥐니, 그나마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다.

다소나마 여유를 갖고 열차의 승강구 입구에 앉아  전동문을 꼼꼼히 살펴보니
언뜻 출입문 상단에 빨간색의 레바가 눈에 띈다.

그래... 비상시 수동 개폐기구가 분명히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바로 저 놈이로구나.

레바를 함부로 손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인지 레바 위를 납으로 봉인해 둔 게 마음에 좀 걸렸지만,
그것 때문에 망설일 상황이 아니었다.  봉인한 납땜을 뜯고 레바를 슬쩍 아래로 당기니,
'따르르르릉...'
  비상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려댄다.

깜짝이야~~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벨소리에 놀라 레바를 당기다 말고 한발 뒤로 물러섰다.

어찌됐든 경보가 울렸으니 누가 달려와도 오겠지...
근데, 와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면,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나...  그건 초이, 네 몫이다...

한 10분 여를 그렇게 예상 추궁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있는데...  이것도 쓸데없는 대책이었다.  
떡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 먼저 마신다는 우리 속담을 얘들도 알고 있는 걸까...
이 경보는 대체 뭐하러 만들어 놓은건지...    열차 집어갈 놈은 없다 그거겠지...

초이가 묻는다.

' 형.. 아까 뭐 만졌어??'
- 그 위에 빨간 레바 아래로 당겼는데...'

' 근데 안 열렸다...???   그럼 위로 밀어볼까...  ...  ...  이것도 아니네...'
- ...  ... 잠깐만.. 위로 밀어도 안돼??   그럼 아래로 더 당겨봐. 
  아까 내가 벨소리에 놀라 당기다 만 거 같거든...' 

초이가 빨간 레바를 아래로 힘주어 당기자,
' 찡~~~ ' 하며  뭔가 작동하는 소리가 나면서 개폐 보턴에 불이 들어온다.  
오~매~~  반가운 거...    설레는 마음으로 열림 보턴을 누르니 그제서야 문이 열린다.     


한 50분 정도 됐었을까...  바깥 공기가 그리 상큼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철로를 따라 얼추 30분을 걸어 다시 플랫폼으로 돌아왔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대체 뭐가 잘못됐는지를 모르겠다.

열차를 탈 때 기차 승강구의 출입구 보턴을 누르니 문이 열렸고,
게다가, 객차 내부의 출입문 위에  쾔른行 이라는 문구와 중간 정거하는 역 이름까지
LED 문자로 나타내지 않았는가.  망할 놈들... 
운행하는 열차가 아니라면, 문이 안 열리게 하던지, 혹은, 문자 안내를 하지 말았어야지...


그나마, 그래도 한참 멀리 떨어진 차량 기지로 갖다 놓지 않은 게 다행이랄까...
서울역에서 용산역 정도가 됐던 거 같다.
만약 정말 엉뚱한 곳에 떨구어 놓았다면,  우린 밤새 우왕좌왕 헤맸을지도 모른다.


흐이그~~~  정말 황당 그 자체였다.  ^^ㆀ


자...  탈출에 성공했으니,  이제 아름다운 도시 Brugge로 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