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도인가...  94년도인가 기억이 정확치 않은데,
당시 직장에서 사내 인트라넷 시스템을 도입하며, 직원들은 사용할 ID 를 제출하라고 했다.
그리고보니 인터넷의 각종 사이트에 가입하기 위해서도 ID 는 필요했다. 

뭘로 할까...   그래도 좀 폼나는 걸로 해야지.  두고두고 나를 표현할 대명사인데..

그런데,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조회해 보면, 내 머리에서 떠 오르는 모든 그럴듯한 것들은
이미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들이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자존심 상, 남이 선점한 ID 에 숫자를 붙여 사용하기는 싫고...

며칠을 고민해도 맘에 드는 아이디가 떠오르질 않아,
서두르지 말고 느긋하게 생각하자고 버티다가 뉴질랜드를 가게 되었다.

하루는 오클랜드 시내를 돌아다니던 중,
우연히 의류가게의 간판과 출입구에 적힌 [Tahi] 라는 상호가 눈에 들어왔다.
가게에 들어가 점원에게 [Tahi] 가 무슨 의미냐고 물으니, 뉴질랜드 원주민 언어로 [Number One]이라는 뜻이란다.

[No.1] 이라...  좋은 의미네...
귀국하자마자 [tahi]는 모든 사이트에 나의 아이디로 등록되었다.
기분좋게도 어느 곳에서도 사용중인 아이디가 아니었다.  원주민 언어라 그런가...???

그런데, 인터넷의 각 사이트가 보안을 강화하기 시작하면서,
신설 사이트를 중심으로 아이디를 6자 이상으로 요구하는 곳이 많아졌다.
그래서 그런 사이트에는 할 수 없이 [tahi] 다음에 숫자를 붙여 사용했는데, 역시 뭔가 늘 갈증이 나는 듯 하다.

그래서 새로 만든 아이디가 [zexxio].
내가 애용하던 골프채 드라이버의 브랜드 [XXIO]의 발음 [젝시오]를 영어 발음대로 조합한 것이다.
임의로 만든 조합이어서인지, 이 역시 중복되는 경우를 아직은 못 봤는데,
혹시..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중에서 마음에 들어 내가 모르는 사이트에서 먼저 사용할 수도 있을라나 모르겠다.


인터넷으로 인하여 파생된 또 하나의 문화가 필명, 혹은 닉네임이 아닐까...

예전에는 필명이라 하면, 글을 쓰는 문인들에게나 적용되는 단어라 생각했다.
그리고, 연예인의 경우는 예명을 사용하고, 
문인, 예술가를 포함 사회적 신분이 있는 사람들의 경우 뭔가 있어 보이기위해 號를 사용하는걸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제 필명은 대중화된 네티즌의 필수품이 아닌가.

처음 인터넷 사이트에 간단히 댓글을 달면서 썼던 필명은 [달그림자].
필명을 적으라기에 그냥 아무생각없이 내가 좋아하던 노사연의 노래제목을 적은 것이다.
그러다 낙서처럼 글을 끄적이며 사용했던 것이 [知民].  사람을 바로 알자는 의미였는데, 별로...  

필명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부터다.
필명으로 호칭을 한다는데, 일단 어색하지가 않아야 되겠지...
그런 맥락에서 보면 [달그림자]는 좀 그렇다.   그럼 달그림자를 한자로 바꿔봐???
그럼 月影이 되는데, [月影]이라... 월영.. 이건 어째 좀 스님들 법명 같다.
그럼..  知民은..??   지민.. 지민..  애들 이름 같기도 하고..

나이를 더해 가더라도 어색하지 않고 가볍지 않은,
그러면서도 남이 부르기 편하고, 들어서도 푸근한게 좋은데...
거기에 내 생각이나 의미까지 담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

그러다 생각난게 [江河]다.
물 흐르듯 순리대로 살자.

뭐.. 발음도 괜찮은거 같고, 의미도 나름대로 붙여놓으니 그럴 듯 하고,  나이 먹어서도 가벼워 보이지 않고.
또, 전화왔었다고 전해달라며 필명을 남기더라도 상대방에게 어색하지 않고. 
영어 표기가 좀 그렇지만, 그것은 지나친 욕심이겠지..


이제 [강하]는 내 이름 [이상범] 보다도 더 보편화되어 남에게 불리우고 있다.
또 나도 이제는 이렇게 불려지는게 더 편하게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네이키드 트리]가 생각난다.
naked tree...  벌거벗은 나무...  그래서 가게가 벌거벗겨졌나...???
이럴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이름을 [forest]라고 할걸...
삼림..  벌써 우거진 느낌이 드는데...    
아예 [jungle]로 할걸 그랬나..??   하긴, 정글은 어째 좀 음습한 느낌이 들기도 하네...

후회와 핑계는 사돈의 팔촌 쯤 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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