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편을 보면서부터 마음 속에 점 찍어 놓았던 영화 [즐거운 인생].


작년 추석 때 이준익 감독의 [라디오 스타]를 보았는데, 이번 추석에도 이준익 감독이다.

[라디오 스타]에 대한 겉핥기를 하면서 [이준익 감독 - 최석환 작가]의 커넥션에 대해 언급을 했지만,

이번에도 두 사람이 뭉쳤다. [황산벌], [왕의 남자], [라디오 스타] 에 이어서...

두 사람은 서로가 없었다면 무슨 재미로 살았을까 싶다.


이준익의 영화에는 그를 느끼게 하는 몇가지 특징이 있다.

영화감독 이준익이 추구하는 작품세계와 그것을 완성시켜나가는 이준익 특유의 방법.

- 따뜻함, 절제된 웃음, 엔딩 씬.


이준익의 영화는 따뜻함이 기본이다.  하지만, 억지로 감성에만 호소하는 법이 없다.

오히려 그의 영화는 처음에는 코믹처럼 보인다. 그 코믹이 시간이 흐르며 잔잔해진다.

눈물샘을 지극하면서 웃음짓게 만드는 것이 그의 영화다. 



상우, 기영(정진영), 성욱(김윤석), 혁수(김상호)는 대학가요제에 나가기 위해 결성한 그룹사운드 [활화산]의 멤버다.

하지만, 대학가요제 예선에서 세 번이나 떨어지고, 지금은 각자의 가정이 있는 40대 초중반의 가장들.

기영은 금융회사 차장으로 실직을 하고 교사인 아내에 얹혀사는 백수.

성욱은 기영보다 더 일찍 실직을 했지만, 낮에는 택배기사, 밤에는 대리운전으로 가정의 생계를 꾸려나간다.

그나마 경제적으로 가장 여유가 있는 중고차 딜러 혁수는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캐나다로 조기유학을 간 기러기 아빠.


각자의 삶에 바빠 자주 만나지도 못한 채, 활화산의 싱어였던 옛 친구 상우의 죽음을 접하고 장례식장에서 만난 이들은

상우의 아들 현준(장근석)이 가지고 있던, [활화산] 시절 상우의 기타를 보고 밴드를 하던 추억을 되살리는데...

셋 중 가장 할 일이 없는 기영의 설득에, 단조로운 삶에 대한 답답함 속에 갇혀있던 성욱과 혁수가 동조하면서

세 사람은 상우의 아들 현준의 리드하에 40대의 신세대 밴드로 변신을 한다는게 줄거리.



이런 변화와 변신의 과정을 보면서 관객은 웃기도 하고, 뭉클해짐을 느끼기도 한다.

삶에 찌들린 40대 중년 가장들이 자신들의 즐거운 인생을 펼쳐나가는 모습이 감동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즐거운 인생]은 지금 이 시대 대부분의 가정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점을 보여준다.


한창 일할 나이 가장의 직장에서의 조기 실직

자식에게 모든걸 거는 과도한 사교육비 부담.

조기유학에 따른 기러기아빠의 비애.

자녀양육에 있어서의 가장의 역할.


때문에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가장들이 즐거운 인생을 살기란 말처럼 쉽지가 않다.

물론, 일정수준 이상을 갖추고 있는 계층에겐 40대란 중년이 마냥 즐거운 인생일 수 있겠으나,

이 시대의 대부분에게는 결코 쉽게 나타낼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

      

즐거운 인생을 사는건 모두의 꿈이다.

하지만 현실은, 즐거운 인생을 추구하는 가장과 무책임한 가장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다.


영화 중 아이들 학원비 때문에 나누는 부부의 대화내용 요약.


성욱처 : 돈이 좀 들더라도 아이들 영어 수학은 시켜야 하는데...

성욱 : 학원을 꼭 다녀야 돼??  학원 안 다니고도 얼마든지 세상을 살 수 있어.

성욱처 : 말이 돼..??  학원비가 좀 비싸도 시켰으면 좋겠어.

성욱 : 나.. 이제 밤에 일 안해.  요새 밴드 해...  

성욱처 : 그게 무슨 소리야..??  밴드라니???

성욱 :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고 싶어.

성욱처 : 누군 하고 싶은게 없어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성욱 : 그럼 너도 하고 싶은걸 해... 자식한테 얽매이지 말고...


성욱 아내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이제 자식을 키우기 시작하는 대한민국 엄마들의 소망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는 대한민국 아내들의 가슴에 가장 한 맺힌 채 묻혀있는, 가장 토해내고 싶은 절규다.

그러기에 성욱의 마지막 말은, 남편에 대한 의지와 기대감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아내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일 수도 있다.


우리 이웃의 저런 이야기를 들을 때,

저런 가장에게 즐거운 인생을 추구하는 용기있는 가장이라고 격려의 박수를 보낼 수 있는건지,

혹은 무책임하고 철없는 가장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게 될런지는 각자가 생각해 보자. 

우리 사회, 우리 가정, 우리 삶의 현실은 이런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오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정진영, 김윤석, 김상호 실제 본인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는...


정진영이야 그래도 인지도가 높은 편이지만, 김윤석과 김상호는 사실 그다지 팬들에게 어필하는

스타급 연기자는 아니다. 그러니 그들의 출연료 수입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일이 연기였기에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왔을 것이다.

그들이 극중에서 연기한 연주가 아닌 실제 연기를 함으로써 오랜 세월동안 하고 싶은걸 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가정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세 사람은 이 영화에서 더 신명나는 연기력을 보여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기들 인생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실제 세 사람의 연기는 참 좋았다.

정진영의, 삶의 피곤함이 묻어나는 무기력하고 지친 듯한, 그러면서도 상황에 따라 다소 비굴하기도 활기차기도 한 표정연기.

인생을 관조하는 듯한 김윤석의 무표정하고 덤덤한 눈빛 연기.

그리고, 가족에게 배신당한 허무함과 허탈함을 안고 친구들에게는 시니컬한 농담을 던지는 김상호의 내면 연기.

모두가 작품 인물의 감성을 잘 살려준 연기라 생각된다.

장근석도 이 영화에서 젊은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이 작품을 계기로 아마 앞으로 많은 성장이 있을거 같다. 


이 영화에는 모두 여섯 곡의 연주장면이 나오는데, 모두가 연기자들에 의한 실제연주라고 한다.

이준익 감독의 리얼리티에 대한 욕심으로 정진영, 김윤석, 김상호, 장근석 네사람이 몇 달을 합숙을 하며

연주를 익혔다고 하니, 그들의 대단한 열정과 재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정말 영화 속 연주는 마치 전문연주자들의 연주를 더빙한 것처럼 흠잡을 데가 없다.


이준익 감독의 엔딩 씬은 이제 내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는데,

[라디오 스타]에서 수채화 같은 느낌을 주던 엔딩이,

[즐거운 인생]에서는 활화산의 연주장면을 무대에서 점점 관객 뒤로 카메라를 롱 페이드 아웃 하면서

공연장 바깥까지 끌고나가 마치 썰물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 끝난다.

좀 지나친 표현일런지 모르겠으나, 마치 여태까지 본 [즐거운 인생]이 꿈이었던 것 같은.

 


언론에선 온 국민이 뜨거워지는 감동의 휴먼 코미디라 하였지만,

내게 [즐거운 인생]은 현실과 맞물려 씁쓸한 뒷 맛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DVD로 나오면 소장하고픈 잘 만든 따뜻한 영화다.


내년 추석엔 이준익과 최석환 콤비가 무엇을 만나게 해줄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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