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폴더/나, 그리고, 가족
지연이의 애리조나 방문
江河
2012. 1. 30. 22:39
아이들에게 안타까운게 하나 있다.
재원이가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미국으로 떠나는 바람에 남매가 함께 보낸 시간이 많지 않았다.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10년이란 시간을 함께 하긴 했지만, 서로 의지하며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엄마에게 더 의존하던 어린 시기였기 때문이다.
사춘기 시절에는 부모보다 같은 또래의 친구나 형제 자매끼리 속마음을 열기가 더 편한 법인데,
아쉽게도 재원이와 지연이는 남매로서 그럴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재원이가 미국에 있는 동안 지연이는 오빠를 무척이나 그리워하며 보고싶어 했고,
그런 마음을 많이 표현하기도 했다. 재원이가 병역의무를 위해 귀국한다고 했을 때,
부모보다 더 재원이를 기다린건 지연이었다. 그리고, 오빠에 대한 그런 마음은 재원이가 제대 후
다시 미국으로 떠날 때도 여과없이 나타났다. 재원이가 표현에 서툴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표면적인 감정은 지연이에 대한 재원이의 감정보다, 재원이를 향한 지연이의 감정이 더 진했다.
그런데, 그런 짙은 애정의 감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원이가 군 입대를 전후해 집에 있을 때
두 아이의 관계는 기대했던만큼 매끄럽지가 못했다. 지연이의 오빠에 대한 태도는 문제가 없는데,
의외로 재원이가 지연이에 대해 어색해 하는 모습이었고, 지연이도 그런 오빠가 느꼈졌는지,
어느 순간 둘 사이가 다소 데면데면해지는 모습이다.
아내와 나는 재원이의 그런 면을 이해한다.
어려서의 성장과정에서 늘 자신보다 앞서 나간 동생에 대한 기억이 오빠인 재원이가 지연이를 대하는데
여전히 부담스러울 수 있다. 게다가 둘이 함께 하지 못했던 기간에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부쩍 성장한
동생의 모습이 생소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게다가, 청소년기에 겪은 문화적 차이도 있을 수 있다.
어찌됐든 그런 시간과 공간의 거리감이 있던 두 아이가 지난 5월 10년 만에 함께 동거(?)할 기회를 가졌다.
재원이의 군입대를 전후한 기간에는 지연이가 기숙사에 있었거나, 연출 준비로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어
얼굴보고 대화할 시간이 없었던 차에, 지난 여름 방학 둘이 들어와 한 달을 함께 했다.
서로가 딱히 해야 할 일이 없었던 그 한 달은 아이들 뿐 아니라, 우리까지 포함하여 말 그대로
네 식구가 처음으로 한가함을 함께 한 시간이었는데, 그 기간 중 재원이와 지연이의 다툼이 있었다.
그 날 다툼 후 화해를 위해 둘만의 대화를 한 시간 이상 가진 재원이는 지연이에 대해 전혀 몰랐던 새로운
면을 알았다는 말을 했다. 몰랐던 지연이의 내면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소중한 계기였던 것이다.
작년 말 겨울방학을 맞아 지연이가 오빠가 있는 애리조나로 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냈다.
지연이가 오빠를 찾아 가리라는건 의외였다. 워낙 계획에 의한 자기 생활이 분주한데다, 둘의 일상코드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때문에 재원이도 처음 지연이가 방문 의사를 표했을 때는 그냥 하는 지나가는 말로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어찌됐든, 지연이는 방학을 하자마자 애리조나로 건너가 열흘을 오빠와 함께 지냈다.
추운 뉴욕을 일시라도 벗어나 학업에 지친 심신을 달래보고 싶었겠지만, 그 장소로 오빠를 택한 배경에는,
지난 여름 둘이 다투며 함께 나누었던 대화를 통해 오빠와 래포가 형성된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때의 소통이
오빠에게 다가갈 오픈 마인드의 계기가 됐다는 얘기다.
재원이는 처음 자신을 찾는 지연이를 위해 나름 사전 준비를 많이 하는 모습이었다.
지연이에게 보여줄 곳도 생각하고, 지연이가 관심있어하는 뮤지컬 관람을 위해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용돈으로 라스베가스의 호텔과 뮤지컬 티켓 예매에도 신경을 쓰는거 같았다.
지연이가 뉴욕으로 돌아간 후, 두 아이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들은 우리에겐 대단히 긍정적이었다.
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함께 생활하는 동안 서로의 성격을 잘 아는 두 아이가 서로에게 배려하려는
노력을 많이 한거 같다. 재원이는 지연이가 싫어할만한 성격의 사람들과의 접촉을 가급적 피하며
지연이의 의사를 많이 묻는거 같았고, 지연이 역시 오빠의 프로그램에 맞추려 노력한거 같다.
"나는 별로 먹고싶지 않더라도, 준비한 오빠 생각해서 다 먹었다."는 지연이의 에피소드가 그렇다.^^
지연이가 재원이의 생활권에 들어간만큼, 아무래도 재원이의 일상을 함께 접하며 우리보다 재원이의
주변 등 독립된 생활을 볼 기회가 많았을 지연이의 오빠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었다.
오빠와 가까이 하는 사람들 모두 술 담배를 안하더라면서, 오빠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을 보니 학생은 없고
모두 직장인들이라는게 가장 놀랐단다. 신분이 아직 학생이라 당연히 학생들과 어울려다닐거라 생각했던
오빠의 대인관계가 새삼스러웠던 모양이다.
남매가 서로에게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면, 그래서
서로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면 지연이의 애리조나 방문은 상당히 유의미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남매가 서로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되는 기회가 많아지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