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河
2010. 5. 25. 01:25
가까운 후배의 이야기.
"집사람과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영화보러 가려던 날, 형 블로그에서 영화평을 봤는데
별론거 같아서 안갔네."
그 말을 듣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올리는게 조금 부담스러워졌다.
내가 영화에 대해 올리는글은 말 그대로 수박겉핥기 식의 내 개인적인 생각임에도
누군가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준다는게 좀 미안했기 때문이다.
그냥 봤으면 재밌게 봤을 지도 모를 영화를 아예 볼 생각조차 포기했다는게,
그 후배에게도, 그리고 정성껏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게도 미안했다.
[하녀]는 일주일 전에 보았는데, 그런 이유로 이제사 영화에 대한 글을 올린다.
한 여자가 건물에서 투신자살을 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투신하기로 마음먹고 뛰어내릴 준비를 마치고도, 죽음에 대한 공포로 망설이다가
결국 죽음을 택한건 그만큼 삶에 대한 공포가 더 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살아도 사는 것 같지가 않은... [하녀]는 그런 삶의 의식을 풀어가는 영화다.
식당에서 일하던 이혼녀(전도연)가 상류층 부호의 집에 가정부로 들어간다.
이 가정부를 영화에서는 하녀로 칭한다. 이 집에는 이미 또 한명의 하녀(윤여정)가 있다.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젊은 주인(이정재)과 어린 나이의 안주인(서우),
그리고, 어린 딸과 두사람의 하녀가 이 집의 구성원이다.
어린 딸을 제외한 구성원의 공통점은 모두가 속물근성을 가졌다는 것.
주인은 하녀들을 문자 그대로 下女로 생각한다.
늙은 하녀는 정신적으로 밑에 두고, 젊은 하녀는 육체적으로 밑에 둔다.
어린 나이에 돈에 끌려 결혼을 한 안주인은 눈에 보이는게 없다.
그런 주인들의 안하무인격인 행동을 경멸하면서도 하녀들은 그 생활에서 벗어나고픈 생각이 없다.
수모를 받으며 주인을 비웃지만, 어떤 형태로든 맛본 상류사회의 틀을 놓치고싶지 않아서이다.
전도연.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전도연만한 여배우가 또 있을까.
청순한듯, 순진한듯, 그러면서도 은근히 남자를 유혹하는 자태, 그리고 때로는 백치미까지.
전도연에게는 그런 묘한 매력이 있다. 팜므파탈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배우다.
내가 생각하는 또 한명의 주연은 이정재가 아닌 윤여정이다.
윤여정은 노회한 하녀의 역을 그녀만의 시니컬한 표정으로 잘 그려냈다.
한가지 궁금했던건, 개봉전 인터뷰에서 이정재가 했던 말이다.
베드신이 힘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베드신도 힘들었지만, 그보다 더 당혹스러웠던건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든 대사였다." 그 대사가 무엇인지 궁금했는데,
나도 블로그에서 표현하기 힘드니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보시도록.
야릇한 장면을 기대하며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중반이 넘어서면서 많이 실망스러울 수 있다.
[하녀]는 멜로가 아닌 스릴러에 가깝다. 베드신은 스토리를 구성하기 위한 초기 과정일 뿐이다.
그나저나, 이제 복근없는 남자배우는 한국영화에서 주연급으로 나서기도 힘들거 같다.
이정재도 아주 수려한 근육질의 몸매를 보여준다.
이 영화의 메시지는 끝부분 안주인과 늙은 하녀의 대사를 통해 전해진다.
이제 이 집을 떠나겠다는 하녀의 말에 안주인이 버럭 소리친다.
"갈 때 가더라도 이거 다 치워놓고 가!" 늙은 하녀가 대꾸한다. "난 이제 여기 하녀가 아니니 니들이 치워~"
그리곤 마지막 일갈 "니들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
주종관계에서 주(主)의 위치에 있던 사람은 아무리 상황이 바뀌어도 자신의 위치는 영원히 主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종(從)의 위치에 있던 사람은 가슴 속에 켜켜이 쌓인, 한 맺힌 말들이 많다.
늙은 하녀의 마지막 한마디는 상류병이라는 깊은 우월주의의 늪에 빠져있는 계층에게 던지는 이 사회의 메시지다.
엔딩부분이 다소 밋밋한 느낌이 드는데,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자꾸 송강호 주연의 [박쥐]가 생각났다.
내 느낌으로는 [하녀]는 [박쥐]와 비슷한 칼라와 톤을 보여준다.
[박쥐]를 재밌게 봤다면 [하녀] 역시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다.
반면에, [박쥐]를 보고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하녀] 역시 실망스러울지 모른다.
칸 영화제 시사회에서 3분간 기립박수를 받았다는 영화 [하녀].
영화는 외부 혹은 특정인의 평이 아닌, 자기의 취향으로 봐야 재미와 느낌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