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河 2009. 9. 10. 21:52

어제 동생을 위해 자전거 뒤에 방석을 깔아주는 어린 남매의 모습을 포스팅하면서
지연이에 대한 재원이의 행동이 생각났다.

어려서부터 지연이는 늘 오빠를 앞서 나가는 듯 했다.
공부에 대한 학습능력도 그랬지만, 매사에 꼼꼼해 보이는 지연이가 
무덤덤하고 설렁설렁해 보이는 재원이에 비해 야무져 보였다.

사실 성격만 본다면 재원이도 누구 못지않은 강단이 있는 아이지만,
자기 영역을 반드시 지켜야 할 경우가 아니면 그런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재원이를 겉으로만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원이를 그저 성격좋은 아이로만 판단한다.

때문에 어렸을 때는 지연이가 두살 차이인 오빠를 만만하게 본게 사실이다.
어렸을 때는 여자아이들의 성숙도가 비슷한 또래의 남자아이들에 비해 높기도 하지만,
특히 드러난 두 아이의 성격이 더욱 그렇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참 가족이란 구성이 재미난게, 아무리 야무져도 동생은 동생이고,
아무리 부실해 보여도 오빠는 오빠라는 징후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서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데,
아무 차이가 없을거 같은 어린 시절에 나타났던 그런 모습이 지금도 우리를 미소짓게 한다.


지연이가 다섯살이고 재원이가 일곱살 쯤 됐던 즈음인거 같다.
미국에 있던 여동생이 잠시 들어와 부모님을 모시고 온 가족이 동해안을 갔었다.
이동 중에 양양에 있는 삼팔선휴게소에 들러 잠시 휴식을 취할 때 이야기다.

휴게소 아래 바닷가에 내려가 모두들 음료수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지연아~~!!" 하는 다급하면서 갈라진 목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모두들 깜짝 놀라 소리나는 방향을 바라보니...

세상에...

재원이가 물속에서 지연이 머리채를 잡은 채 지연이를 끌고 나오고 있는게 아닌가.

어른들이 모두 이야기를 나누느라 아이들에게 시선을 놓고있는 사이,
모래에서 혼자 놀고있던 지연이가 백사장에 들이친 강한 파도에 쓸려 나간 것이다.
그런데, 어른들도 놓친 그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놀던 재원이가 보고는 이름을 부르며
뛰어 들어가 다급한 마음에 물 속에 잠긴 동생의 머리채를 잡아 끌고 나온 것이다.

어른들이 모두 경악한 것은 당연지사.
어른들이 부주의했던 잠깐 사이에 아이가 떠내려 갈 뻔 했다는 사실에 가슴들이 철렁 했지만,
일단 놀란 가슴을 추스린 다음엔 당연 재원이의 행동이 화제였다.

동생이 갑자기 물에 휩쓸려 물 속으로 사라지는게 당연히 놀랐겠지만,
소리만 지르며 어쩔줄 몰라 하거나 어른들에게 달려와 이야기를 할 수도 있는데,
어린 나이에 겁 없이 물 속으로 뛰어들어가 동생을 구할 생각을 했다는게 참 대견했다.

"너도 아직 어려 위험하니까 그럴 때는 어른들에게 이야기하는게 올바른 행동" 이라고 일렀지만,
재원이의 그 때 그 행동은 "어려도 역시 오빠는 오빠" 라는 소리를 듣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 이야기를 하면 재원이는 어렴풋이 기억이 난단다. 
반면 전혀 기억이 안난다는 지연이의 항변.
"아니.. 그렇게 어린 딸래미를 파도치는 백사장에 혼자 놔두다니.. 도대체 딸래미에 대한 애정이 있는거야..?"



지연이가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학교 선배들에게 집단 린치를 당했던 적이 있다.
경우에 어긋나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리 선배라 할지라도 수용하지 못하는 지연이의 태도가
후배들을 괴롭히는 소위 양아치 선배들에게 못마땅해 눈 밖에 났다가 보복을 당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이를 악물고 참아내고는 집에 와서 그 사실을 이야기한 지연이가
토요일인 다음 날 집에 와서는 오빠가 학교에 왔더라는 이야기를 한다.

수업을 마치고 운동장을 걸어 나오는데, 같이 있던 친구가 "지연아.. 저기 네 오빠 아니야??" 하길래
바라보니 교문 앞에 오빠가 자전거를 탄 채 기다리고 있더라고.

- 오빠가 여기 왠 일이야?
> 너.. 괜찮아?
- 뭐가??
> 아니 그냥..  별 일 없으면 됐고..  그럼, 나 간다.

그런데, 정작 재원이는 집에 와서 지연이 학교에 갔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엄마가 슬쩍 물어봤단다.

- 너 지연이 학교 갔었다며?
> 응..
- 왜 갔었는데..?
> 아니 그냥..  어제 지연이 선배들한테 당했다메..  그래서 별 일 없나 해서..

동생이 선배들에게 몹쓸 행동을 당했다는 이야기에 몹시 신경이 쓰였나 보다.
혹시 다음 날에도 또 그런 일이 있을까 걱정이 되어 학교 다녀와서는 부랴부랴 동생의 학교로 달려가
동태를 살피고는, 별 일 없음을 확인하고 자존심 강한 동생의 성격을 아는지라 슬그머니 돌아온 것이다.

그러고도 엄마나 아빠에게는 자신의 그런 행동에 대해 내색조차 않는 재원이의 그런 행동이 대견하다.
그때도 우리는 그랬다. "재원이 저 녀석이 부실해 보여도 오빠는 오빠 맞네.."


재원이가 미국에 가기 전 중학생 시절, 가끔 지연이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오빠가 할아버지에게 용돈 받았다고 나눠 주더라."

할아버지께 다녀오면 가끔 용돈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받은 용돈을 동생과 나눴다는 말은 늘 지연이를 통해 듣게 된다.

일련의 재원이의 이런 행동들이 가끔 집사람이 지연이에게
"아빠 엄마 없으면 너 지켜줄 사람은 오빠 밖에 없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재원이가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미국으로 갔으니, 한창 사춘기 시절을 남매가 떨어져 지낸 셈이다.
한편으론 오누이의 정을 제대로 나누지 못해 서로에 대한 정이 덜 할까 우려도 했는데,
지나고 보니 오히려 이런 공백이 남매의 정을 더 돈독히 한 측면도 있는거 같다.

서로가 예민할 수 있는 나이에 부딪힐 수도 있는 많은 것들이 떨어져 있음으로써 오히려
서로에 대한 정이 되어버린 것이다.  실제 재원이는 미국에 있으면서 우리에게는 하지 않는 이야기도
지연이에게는 많이 하는거 같았다.  지연이 역시 오빠가 보고싶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했었다.
서로에 대한 애정과 믿음이 있기에 그런 것이라 생각하면서 우리 부부는 두 아이에게 늘 고맙게 생각한다.






지연이가 웃으며 이야기했던 두가지가 생각난다.

- 사실 어렸을 때 오빠를 우습게 봤거든..  근데 어느 순간 오빠를 우습게 못 보겠는거야..
   어느 순간 오빠가 갑자기 커보이는데, 어.., 이제 잘못 까불다간 맞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

- **오빠를 만났는데, 이 오빠가 왠지 멋있어 보이는거야.  그리고, 느낌이 낯설지가 않은거있지..
   그래서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해보니, **오빠가 딱 오빠 스타일이더라구.
   오빠처럼 키도 크고 행동하는 것도 그렇고..

지연이는 오빠같은 스타일이 이상형이란다.  (뭐 일단 하드웨어가 그렇다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