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려온 것들/야구이야기

대한민국 야구에는 뭔가가 있다.

江河 2009. 3. 19. 20:45

이쯤에서 오랜만에 야구이야기를 좀 해보자.
야구광인 나는 요즘 WBC 야구에 푹 빠져산다.
우리나라가 이긴 날은 인터넷의 야구기사를 뒤지고다니는게 일과일 정도다.
아마 내가 다시 다른 직업을 택한다면 야구기자도 강력한 선택사항중 하나다.
그런 나로서는 요즘 우리나라 선수들이 그렇게 이뻐보이고 자랑스러울 수가 없다.

때문에 벌써부터 야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싶었지만,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하도 정보와 의견이 많아
왠만한 글들은 내용이 다 비슷비슷해 그냥 묻어두고 있었는데, 더 이상 즐거움을 참을 수가 없어
다들 아는 뻔한 이야기들을 짜집기해본다.


어지간한 야구팬들은 다 알고있다시피 이번 야구대표팀은 팀 구성 초기부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하마평에 올랐던 감독들이 대표팀 감독을 기피하는 바람에 그나마 마음이 모질지못한(?) 김인식감독이 마지못해
중책을 떠맡았지만, 이어진 코칭스태프 구성과 선수선발에서도 감독 뜻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었다.

김인식감독이 참가를 원했던 박찬호, 이승엽는 팀내 입지가 불안한 개인 사정으로, 백차승은 국적문제로,
그리고 김병현은 여권분실이라는 황당한 사유로 불참하게 되고, 수비진에 없어서는 안된다던 박진만은
결국 부상으로 빠져 대표팀에 대한 대회 전망은 불안 그 자체였다. 

하지만, 여지껏 지켜본 바와같이 지금 대한민국 야구대표팀은 세계 야구계와 언론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고있다.
이번 WBC의 백미는 역시 한일전이다.
대한민국은 예선 1라운드 승자전에서 일본에 14 : 2 콜드게임이라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해 온 국민을 망연자실케 했다.
대회규정을 들여다보며 분석할 수 있는 야구팬들로서는 이해가 되는 사실상 전략적 패배였지만,
일반 국민들은 이해하기 힘든 수모였다.

사실 이러한 미필적 고의에 해당되는 패배는 코칭스태프로서는 내리기 힘든 결정이다.
국민정서를 생각하면 역적이 될 수도 있는 결정이었지만, 우리 대표팀의 코칭스태프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월왕 구천과 같이 치욕을 감수하며 다음을 도모하는 전략을 택했고,
그 결과는 이틀 뒤 1 : 0 이라는 짜릿한 승리의 기쁨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바로 어제 다시 한번 일본을 제압하여 일본 열도를 충격에 빠지게하고,
전 세계 언론으로부터 경이로운 팀이라는 극찬의 대상이 된다.
세계언론은 김인식감독의 신출귀몰하고 정확한 작전에 대해 경악하고,
스몰볼과 빅볼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는 대한민국의 균형잡힌 공격력에 감탄하며,
빈틈없는 수비진의 몸놀림과 빠른 발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더 놀라는 것은, 일본이나 여타 남미의 야구 강국과는 달리 대한민국 대표팀에는
소위 빅리거라고 칭하는 미국 메이저리거가 단 한명뿐이라는 사실. (그 한명도 사실 지금 절대 전력은 아니지만)

대한민국을 격찬하는 외신 중에 아주 흥미로운 기사가 눈에 띈다.
[객관적인 전력은 일본이 최강이며, 그 일본을 꺾을 수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 뿐이다]라는.
그 표현에는 대한민국 야구에는 실력만으로는 풀 수 없는 무엇이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 무엇을 그들은 집중력과 정신력, 그리고 일치된 단결심이라고 나름대로 진단한다.


일본에는 4650개가 넘는 고등학교 야구팀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고교야구팀이 겨우 50여개다.
이번 일본 대표선수들의 평균 연봉은 47억원 정도인데, 우리 대표선수들의 평균 연봉은 2억7천만원 정도라니
평균연봉이 우리보다 무려 17배가 넘는 엄청난 액수다.  야구 역사 역시 일본돠는 비교가 안된다.
당연히 야구인프라 역시 우리가 열등하다.  우리는 하나도 없는 돔구장이 일본에는 6개나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난 2006년 1회 WBC에서 일본에 2승1패를 거뒀고, 지난 베이징올림픽에서도 2승을 했으며,
이번 2회 WBC에서도 2승1패로 앞서나가고 있다.  일본이 느끼는 참담함이 더 클 수 밖에 없다.

어제 한일전은 정신력이 승부를 갈랐다. 
일본이 자랑하는 최고의 투수이며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가장 눈여겨보는 다르비슈는 1회부터 제구가 흔들렸으며,
수비는 에러를 범하고, 포수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조지마는 심판 판정에 항의하다 퇴장까지 당했다.
긴장했고 초조했다는 얘기다.

흐뭇한 장면도 몇개 있었는데,
2사 2루 상태에서 4번타자 김태균을 고의사구로 거르는 장면은 정말 가슴 뿌둣한 순간이었다.
또한 일본야구 최고의 스타이며 메이저리그의 타격기록을 갈아치우며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는 이치로가
봉중근의 견제모션에 놀라 연거푸 두번씩이나 혼자 슬라이딩을 하고는 머쓱한 표정을 짓는 모습은 정말 통쾌했다.
그만큼 기싸움에서 눌리고있다는 반증이다.       

어제 경기후 일본내의 반응이 재밌다.

"한국과의 만남은 헤어진 여자를 길에서 우연히 만나는 느낌이다." 라는 표현을 한 이치로가
봉중근에게 계속 내야땅볼로 물러난 것을 두고, 일본 언론은 이렇게 비꼬았다.
"이치로가 헤어진 여자 봉중근을 만나 뺨만 맞았다."

또, 쿠바와의 경기에 앞서 한 일본 네티즌은
"쿠바를 이기면 또 한국에게 질게 뻔한데 차라리 쿠바에게 지는게 나을거 같다." 고 했다.

정말 싫겠지만, 한국야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묘한 대진표 때문에 일본이 쿠바를 이겨 또 다시 일본과 1조 순위결정전을 하게됐다. 
하지만 이 경기는 마음이 편하다.  이번엔 굳이 일본을 이겨야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왕 4강까지 왔으니 결승까지 가서 우승을 노리려면 조1위보다는 2위가 경기일정이 더 편하다.
조 2위가 되면 막강한 타선의 2조 1위 베네수엘라를 만나 어렵다고도 하지만, 홈팀인 미국의 텃세가 더 걸린다.
야구는 주심의 볼 판정 하나에 전체 판도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베네수엘라와 정당한 실력대결을 하는게 나을 수도 있다.

때문에 내일 일본과의 순위 결정전에는 그동안 출전을 하지못했던 선수들을 기용해봤으면 좋겠다.
그동안 출전했던 선수들에게는 체력을 충전할 수 있는 휴식시간을 주고, 백업멤버들의 기량도 점검해보고.
선발명단을 보면 일본도 안다.  이기기위한 베스트멤버인지 아닌지.
우리야 그러고도 이기면 좋고, 져도 실속을 차릴 수 있어 좋지만, 일본의 경우는 좀 다르다.
어차피 대한민국이 필승카드가 아닌걸 아는데, 이겨도 찜찜하고 지면 3연패가 되니 더 굴욕이고.
일본과의 승부는 양팀이 같이 결승에 올라간다면, 그때 마지막 진검승부를 겨루면 된다.

그러니 내일은 편하게 한일전을 말 그대로 즐길 수 있게됐다.
그런 즐거움을 준 우리 야구대표선수들이 자랑스럽고, 그런 긍지를 심어주어 고맙다.


대.한.민.국.

우리의 DNA에는 분명한 뭔가가 있다.




(사진은 연합뉴스에서 퍼옴)

한일전이 열린 샌디에이고 펫코파크 야구장 한국응원단의 재치있는 피켓.
스포츠에는 이런 매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