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폴더/나, 그리고, 가족
[대한민국 진화론]을 남기고 돌아간 이현정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1. 25. 02:53
내게는 여동생과 남동생이 한명씩 있다.
여동생의 키가 167cm, 남동생은 183cm이니 우리 또래로서는 무척들 큰 키다. 내가 제일 작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부럽지않다]는 말이 있지만, 여동생을 보면 정말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느낀다.
다만, 부모님껜 조금 죄송한 말씀이지만, [잘 자란 딸 하나 열 아들 부럽지않다]로 단어 하나는 바꿔도 될거 같다.
여동생은 늘 이런 말을 하곤했다. '우리 삼남매 중 머리는 내가 제일 나쁜거 같다.' 고.
하지만, 이말은 뒤집어보면 '삼남매 중 내가 가장 큰 노력을 했다.' 는 스스로의 강한 자부심이기도 하다.
현정이는 개성이 무척 강하다.
고등학교 입학과 졸업을 수석으로 하고, 대학 재학 중에 어떻게 길을 찾아 미군과 미군 가족을 위한 미국 메릴린치대학
한국분교를 다니며 유학 준비를 하더니, 4학년 종강을 하자마자 졸업식도 하기 전에 혼자 미국 유학을 떠났다.
1981년 12월에 그렇게 떠나서는 10년이 훨씬 넘어서야 한국에 처음 들어왔으니, 어찌보면 독하게 유학시절을 보낸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명절에 친지들이 모두 모였을 때 여자들은 일만 하는 것을 보고 이 땅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는
현정이의 남편은 이스라엘 사람이다.
이스라엘 공군대위 출신의 지금의 남편에게 프로포즈를 받고 현정이가 내건 조건은 하나.
'나도 한국에 들어가서 살자는 말 안할테니, 이스라엘로 들어가자는 말 하지마라.'
그러니까 중립지대에서 살자는게 옵션이었던 셈인데, 그 옵션은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AT&T]와 [Bell LAB]을 거쳐 벤쳐기업을 경영하던 현정이가 한국으로 들어온 것이 2003년.
당시 삼성그룹의 해외인력영입 프로젝트 대상으로 삼성전자에 계약직으로 영입된 것이다.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야한다는 점이 의사결정을 하는데 난제로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국내기업에 대한 호기심과, 무엇보다도 부모님과 시간을 공유할 마지막 기회라는 점이 나름대로는 고려됐던거 같다.
현정이는 근무시간의 거의 절반은 해외출장으로 보냈다.
그리고 국내에 있을 때는 거의 주말마다 혼자 차를 가지고 여행을 다녔다.
국내의 왠만한 산은 다 오르고, 차를 싣고 제주도까지 가는 등, 얘기를 들어보니 어지간한 구석구석 안가본 곳이 없다.
조용하고 멋있는 곳, 드라이브하기 좋은 지방도로를 줄줄 읊는다.
그렇게 처음 3년계약에 추가로 2년 연장계약을 마친 현정이가 지난 주 미국으로 완전히 돌아갔다.
국내에서 몇몇 기업들로 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왔지만, 더 이상 가족들과 떨어져 생활하는게 무리라는 생각도 들고,
한국의 기업문화가 정서적으로도 조금 간극이 있었던거 같다.
처음 삼성에 들어왔을 때, 삼성의 최초 여성임원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여러 언론매체로 부터 취재대상이 되었으나
불필요한 잡음을 염려해 철저히 언론과의 접촉을 기피하던 현정이가 떠나기 전 책을 하나 펴냈다.
10대 말에 한국을 떠나 2,30대의 정신적 성숙기를 미국에서 보내고 40대에 다시 한국으로 들어와 5년간 지내면서
나름대로 느낀 미국과 한국의 문화와 인식에 대한 내용이다.


그리고, 5년간 철저하게 사양하던 언론과의 인터뷰도 작년 연말부터는 여러 잡지를 통해 많이 나온거 같다.
느낀 것은 많았지만 혹시라도 구설수에 오를까 염려되었던 부담감이 떠난다고 생각하니 덜어진 모양이다.
출국하기 전 날 밤 10시에 현정이의 숙소로 찾아가 둘이서 12시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 들어가면 언제 또 만나게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남는다.
- 너한테 미안한게 많다. 5년간 국내에 있는 동안 관심을 많이 못 가진거 같아서...
> 별소릴... 그럼 나는 오빠한테 미안하게 왜 없겠어...
문을 나설 때 애써 고개를 돌리며 외면하는 모습을 보며, 서로 표현은 미흡하더라도 남매의 정은 어쩔 수 없음을 느낀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런 정은 더 하는건가보다.
현정이에게 정말 미안하긴 하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몇년 있을거라는 생각에 자주 만나 같이 식사도 하고 이야기도 많이 나눌 수 있을걸로 생각했는데,
늘 그렇듯이 생각만 그럴 뿐 시간은 흘쩍 지나고 말았다.
누구보다 자기관리와 목표의식이 뚜렷한 사람이니 내가 신경쓸 일은 전혀 없겠지만,
항상 즐겁고 건강했으면 좋겠다.

지난 2007년 여름 방학을 이용해 네팔여행을 가기 전 한국을 찾은 현정이의 가족들.
내게 매제인 Amir는 성격이 참 온화하고 자상하다.
현정이는 어머니께 늘 그런다. '한국 남자하고 결혼했으면 난 벌써 소박맞았을거야. 이 사람이니까 날 이렇게 받쳐주지.'
Amir는 현정이가 한국근무에 대해 의논했을 때 아내의 경력관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권했다고 한다.
그리고 5년간 두 아들을 키웠는데, 한국적 사고로는 쉽지않은 결정이다.
큰조카 Daniel은 학구적이다. 늘 책을 끼고 산다.
반면에 작은 Jonathan은 매우 활동적이다. 운동을 좋아하고 끼도 있는 편이다.
이 가족은 거의 매년 세계 곳곳으로 여행을 다니는데, 여행을 다니면서도 아이들에게 돈에 대한 개념은 확실하게 심어준다.
예를들어, 여행을 다니다보면 식당에 따라 밖에서 먹는 요금과 실내에서 먹는 요금이 다를 경우가 있다.
이 경우 동생은 항상 밖에서 식사를 하는데, 아이들이 엄마에게 어필을 한단다.
'엄마.. 우리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안에서 대우 받아가며 먹자.' 이럴 때 동생의 대답은 단호하다.
'엄마와 아빠는 돈이 있으니 안에서 먹을 수 있다. 근데, 너희는 돈이 없지않느냐.
그렇다고 너희만 두고 아빠 엄마만 안에서 먹을 수는 없어 너희 때문에 할 수 없이 우리도 밖에서 먹는거다.'
동생의 아이들에 대한 교육은 좀 심하다 할 정도로 철저하게 자립과 독립을 지향점으로 한다.
재원이에게도 그랬다. 미국으로 들어간 재원이를 공항에서 pick-up 하면서부터 우리말을 한마디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영어 한마디 못하는 상태에서 고모를 만난 재원이의 입장에서 의사소통이 전혀 안되는 고모가 얼마나 야속했겠는가.
미국에 있는 동안 재원이가 고모에게서 한국어를 들은 것은 딱 한번 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야속함으로 인해 영어가 빨리 늘었다는 것을 재원이도 알고 있다.
또 재원이에게 자질구레한 용돈은 주지않지만 필요할 때 큰 돈은 쓴다.
가족여행을 다닐 때도 재원이가 원하면 꼭 같이 동행을 시킨다.
물론 모든 비용은 동생이 부담한다. 그렇다고 내게 비용을 청구하지도 않을 뿐 더러 아예 내색을 하지도 않는다.
작은 것에는 엄격하지만 큰 것에는 통이 크고, 잔정엔 인색하지만 큰 후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재원이와 둘은 이미 미국에서 서로 거칠 단계를 다 거쳤다.
처음 재원이가 미국으로 건너가 방학 중에 고모네 집에 있으면, 어렸던 사촌동생들이 텃세(?)를 제법 부렸던 모양이다.
당시에는 재원이도 갈등이 좀 있었던 모양인데, 싸우면서 정든다더니 그런 과정을 거쳐 성장을 하면서 정이 쌓인거 같다.
형보다 더 재원이에게 호전적(?)이던 Jummy가 지금은 재원이를 무척 좋아한다.
여동생의 키가 167cm, 남동생은 183cm이니 우리 또래로서는 무척들 큰 키다. 내가 제일 작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부럽지않다]는 말이 있지만, 여동생을 보면 정말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느낀다.
다만, 부모님껜 조금 죄송한 말씀이지만, [잘 자란 딸 하나 열 아들 부럽지않다]로 단어 하나는 바꿔도 될거 같다.
여동생은 늘 이런 말을 하곤했다. '우리 삼남매 중 머리는 내가 제일 나쁜거 같다.' 고.
하지만, 이말은 뒤집어보면 '삼남매 중 내가 가장 큰 노력을 했다.' 는 스스로의 강한 자부심이기도 하다.
현정이는 개성이 무척 강하다.
고등학교 입학과 졸업을 수석으로 하고, 대학 재학 중에 어떻게 길을 찾아 미군과 미군 가족을 위한 미국 메릴린치대학
한국분교를 다니며 유학 준비를 하더니, 4학년 종강을 하자마자 졸업식도 하기 전에 혼자 미국 유학을 떠났다.
1981년 12월에 그렇게 떠나서는 10년이 훨씬 넘어서야 한국에 처음 들어왔으니, 어찌보면 독하게 유학시절을 보낸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명절에 친지들이 모두 모였을 때 여자들은 일만 하는 것을 보고 이 땅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는
현정이의 남편은 이스라엘 사람이다.
이스라엘 공군대위 출신의 지금의 남편에게 프로포즈를 받고 현정이가 내건 조건은 하나.
'나도 한국에 들어가서 살자는 말 안할테니, 이스라엘로 들어가자는 말 하지마라.'
그러니까 중립지대에서 살자는게 옵션이었던 셈인데, 그 옵션은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AT&T]와 [Bell LAB]을 거쳐 벤쳐기업을 경영하던 현정이가 한국으로 들어온 것이 2003년.
당시 삼성그룹의 해외인력영입 프로젝트 대상으로 삼성전자에 계약직으로 영입된 것이다.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야한다는 점이 의사결정을 하는데 난제로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국내기업에 대한 호기심과, 무엇보다도 부모님과 시간을 공유할 마지막 기회라는 점이 나름대로는 고려됐던거 같다.
현정이는 근무시간의 거의 절반은 해외출장으로 보냈다.
그리고 국내에 있을 때는 거의 주말마다 혼자 차를 가지고 여행을 다녔다.
국내의 왠만한 산은 다 오르고, 차를 싣고 제주도까지 가는 등, 얘기를 들어보니 어지간한 구석구석 안가본 곳이 없다.
조용하고 멋있는 곳, 드라이브하기 좋은 지방도로를 줄줄 읊는다.
그렇게 처음 3년계약에 추가로 2년 연장계약을 마친 현정이가 지난 주 미국으로 완전히 돌아갔다.
국내에서 몇몇 기업들로 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왔지만, 더 이상 가족들과 떨어져 생활하는게 무리라는 생각도 들고,
한국의 기업문화가 정서적으로도 조금 간극이 있었던거 같다.
처음 삼성에 들어왔을 때, 삼성의 최초 여성임원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여러 언론매체로 부터 취재대상이 되었으나
불필요한 잡음을 염려해 철저히 언론과의 접촉을 기피하던 현정이가 떠나기 전 책을 하나 펴냈다.
10대 말에 한국을 떠나 2,30대의 정신적 성숙기를 미국에서 보내고 40대에 다시 한국으로 들어와 5년간 지내면서
나름대로 느낀 미국과 한국의 문화와 인식에 대한 내용이다.

그리고, 5년간 철저하게 사양하던 언론과의 인터뷰도 작년 연말부터는 여러 잡지를 통해 많이 나온거 같다.
느낀 것은 많았지만 혹시라도 구설수에 오를까 염려되었던 부담감이 떠난다고 생각하니 덜어진 모양이다.
출국하기 전 날 밤 10시에 현정이의 숙소로 찾아가 둘이서 12시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 들어가면 언제 또 만나게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남는다.
- 너한테 미안한게 많다. 5년간 국내에 있는 동안 관심을 많이 못 가진거 같아서...
> 별소릴... 그럼 나는 오빠한테 미안하게 왜 없겠어...
문을 나설 때 애써 고개를 돌리며 외면하는 모습을 보며, 서로 표현은 미흡하더라도 남매의 정은 어쩔 수 없음을 느낀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런 정은 더 하는건가보다.
현정이에게 정말 미안하긴 하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몇년 있을거라는 생각에 자주 만나 같이 식사도 하고 이야기도 많이 나눌 수 있을걸로 생각했는데,
늘 그렇듯이 생각만 그럴 뿐 시간은 흘쩍 지나고 말았다.
누구보다 자기관리와 목표의식이 뚜렷한 사람이니 내가 신경쓸 일은 전혀 없겠지만,
항상 즐겁고 건강했으면 좋겠다.

지난 2007년 여름 방학을 이용해 네팔여행을 가기 전 한국을 찾은 현정이의 가족들.
내게 매제인 Amir는 성격이 참 온화하고 자상하다.
현정이는 어머니께 늘 그런다. '한국 남자하고 결혼했으면 난 벌써 소박맞았을거야. 이 사람이니까 날 이렇게 받쳐주지.'
Amir는 현정이가 한국근무에 대해 의논했을 때 아내의 경력관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권했다고 한다.
그리고 5년간 두 아들을 키웠는데, 한국적 사고로는 쉽지않은 결정이다.
큰조카 Daniel은 학구적이다. 늘 책을 끼고 산다.
반면에 작은 Jonathan은 매우 활동적이다. 운동을 좋아하고 끼도 있는 편이다.
이 가족은 거의 매년 세계 곳곳으로 여행을 다니는데, 여행을 다니면서도 아이들에게 돈에 대한 개념은 확실하게 심어준다.
예를들어, 여행을 다니다보면 식당에 따라 밖에서 먹는 요금과 실내에서 먹는 요금이 다를 경우가 있다.
이 경우 동생은 항상 밖에서 식사를 하는데, 아이들이 엄마에게 어필을 한단다.
'엄마.. 우리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안에서 대우 받아가며 먹자.' 이럴 때 동생의 대답은 단호하다.
'엄마와 아빠는 돈이 있으니 안에서 먹을 수 있다. 근데, 너희는 돈이 없지않느냐.
그렇다고 너희만 두고 아빠 엄마만 안에서 먹을 수는 없어 너희 때문에 할 수 없이 우리도 밖에서 먹는거다.'
동생의 아이들에 대한 교육은 좀 심하다 할 정도로 철저하게 자립과 독립을 지향점으로 한다.
재원이에게도 그랬다. 미국으로 들어간 재원이를 공항에서 pick-up 하면서부터 우리말을 한마디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영어 한마디 못하는 상태에서 고모를 만난 재원이의 입장에서 의사소통이 전혀 안되는 고모가 얼마나 야속했겠는가.
미국에 있는 동안 재원이가 고모에게서 한국어를 들은 것은 딱 한번 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야속함으로 인해 영어가 빨리 늘었다는 것을 재원이도 알고 있다.
또 재원이에게 자질구레한 용돈은 주지않지만 필요할 때 큰 돈은 쓴다.
가족여행을 다닐 때도 재원이가 원하면 꼭 같이 동행을 시킨다.
물론 모든 비용은 동생이 부담한다. 그렇다고 내게 비용을 청구하지도 않을 뿐 더러 아예 내색을 하지도 않는다.
작은 것에는 엄격하지만 큰 것에는 통이 크고, 잔정엔 인색하지만 큰 후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재원이와 둘은 이미 미국에서 서로 거칠 단계를 다 거쳤다.
처음 재원이가 미국으로 건너가 방학 중에 고모네 집에 있으면, 어렸던 사촌동생들이 텃세(?)를 제법 부렸던 모양이다.
당시에는 재원이도 갈등이 좀 있었던 모양인데, 싸우면서 정든다더니 그런 과정을 거쳐 성장을 하면서 정이 쌓인거 같다.
형보다 더 재원이에게 호전적(?)이던 Jummy가 지금은 재원이를 무척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