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폴더/나, 그리고, 가족
빠따 70's
알 수 없는 사용자
2005. 8. 28. 03:42
남자들 치고 [빠따]라는, 몽둥이로 엉덩이를 맞는 태형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빠따는 개인의 잘잘못을 떠나 집단에 대한 단체기합 형태로도 많이 행해졌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1970년대에 내가 확실하게 빠따를 맞지 않았던 년도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미 30년도 더 된 오래 전 일이라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엔 거의 매년
맞았다고 생각해도 될 듯 싶다.
지각을 해서.. 숙제를 안해서... 성적이 떨어져서... 체육복을 안 가져와서 개인적으로 맞기도 하고,
다른 학과선생님에게서 수업분위기가 안좋다는 지적을 받았다고 학급전체가 담임선생님에게 맞고,
규율이 빠졌다고 선배들에게 맞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빠따 맞는 것이 크게 부끄러울 것도 없고, 또 교내에서도 문제될게 없었다.
맞은 당사자가 교사나 선배에게 항의할 생각도 못하고, 집에 가서 부모에게 얘기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던 때라 부모는 물론 알지도 못했다.
행여 집에서 알기라도 하면 뭘 잘못해서 맞았냐고 또 한번 혼이 나니,
오히려 맞은 표를 숨기기 바빴다.
그런 일이 일년에 한번 이상은 분명히 있었을테니,
중고등학교 시절이던 70년부터 73년도까지는 매년 맞았다고 본다.
난, 대학에 가면 맞는 일이 없을 줄 알았다. 대학은 자유분방하고 낭만만 있는 곳인줄 알았다.
그런데... 유토피아인줄 알았던 그곳도 결국은 남자의 세계였다.
74년 아직 입학의 부푼 꿈이 가시지 않던 어느 날.
고교동문회 소집이 있었는데, 제대로 모이지를 않았다고 군대까지 다녀 온 복학생 대선배가
줄줄이 빠따를 쳐대는 것이다.
그리고, 써클에서 여름방학 때 하계농촌봉사를 가서는 아침 기상시간이 늦는다는 이유로,
그런 해이한 상태로 봉사활동을 한다면 마을 주민들이 얼마나 한심하게 보겠냐며
당시 회장에게 봉사단원 전체가 빠따를 맞았다.
75년에는 써클 임원를 맡았는데, 하계농촌봉사 사전준비를 위해 수시로 모인 임원회에
한 친구가 늦는 바람에 역시 정신력강화와 솔선수범이라는 명목으로 맞은 기억이 있다.
역시 남을 위한 봉사에는 자기희생이 우선임을 알았다.
76년에는 ROTC를 하면서 2년차 선배에게 수차례 맞았다.
이유는 붙이는게 이유니, 굳이 알려고 할 필요도 없고 정당성 여부를 확인할 필요도 없다.
그걸 알려고 하는 행위 자체가 오히려 매를 버는거다.
또 여름방학 때 실시되는 ROTC 병영훈련 기간도 엉덩이의 내성을 기르는데 일조를 한다.
77년엔 대학 졸업반이고, 모든조직에서 선배이니 맞을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ROTC 하계병영훈련 기간은 나에게서 그런 신분을 박탈해 갔다.
오히려 태극기를 게양하는 3단 쇠파이프가 휘도록 맞은 기억이 난다.
78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육군소위로 임관하면서 드디어 나의 빠따생활도 마감되는 줄 알았지만,
그것도 착각이었다.
초임장교에게 필수코스인 병과학교 기간 중에는 소위는 장교가 아닌 교육생에 불과했고,
더구나 교육을 담당하는 구대장이 모두 ROTC 선배들이기에 우리는 끽소리도 못하고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간혹 끽소리를 내는 경우도 있었으나, 금강고 쓴 손오공에 불과했다.
이제 이 모든 험난한 과정을 모두 거친 79년.
이제 난 교육생도 아닌 당당한 육군중위가 되었다. 진짜 이제 나를 땅바닥에 엎드리게한 후
빠따를 칠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내가 죽을 죄를 짓기 전에는... 단체기합도 없고.
그럼 내가 70년대의 마지막 해를 빠따없이 무사히 잘 보냈을까???
79년에 나는 수송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60여대가 넘는 차량과 운전병들을 지휘 관리하는 직책이다.
부임 첫날을 지낸 다음 날 아침 일조점호를 하는데 몇명이 빠졌다.
당시에는 군대의 구타행위를 근절한다하여 구타를 하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쌍벌죄로
처벌을 한다는 조치가 취해지고 있었다.
초장에 전체 군기는 휘어 잡아야겠는데, 잘못하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해서.. 내가 생각한 것이 내가 먼저 맞고 때리는 방법이었다.
선임하사를 불러 통솔을 제대로 못한 내게 우선 책임이 있으니 먼저 나를 치라고 엎드렸다.
결국 이렇게 나는 70년대에 빠따로 부터 한해도 피해가지를 못했다.
당시야 불만도 많았고 죽을 맛이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도 하나의 회색추억이다.
빠따를 옹호하는건 아니고, 옹호할 생각도 없지만, 이런 옛 악습을 생각하며
요즘의 아이들이 너무 나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구타나 태형을 해서는 안되겠지만, 아이들은 강하게 키울 필요가 있다.
우리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엄마에게 잔매도 무수히 맞았고, 나에게 크게 한번씩 맞은 적이 있다.
그리고, 매년 아이들 담임선생님에게 필요하시면 우리 아이를 때리셔도 좋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맞으면서 자랐다고 삐딱하게 잘 못 자라지는 않았다.
그리고 엄마나 아빠와의 관계도 그 어느 집보다 좋다. 사회규범에 대한 가치관도 좋다고 본다.
아이들이 중학교 시절, 당시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맞았다고 학생이 경찰서에 신고하거나,
집에 가서 부모에게 말해 학부모가 학교로 찾아와 항의를 하는 내용의 TV 뉴스를 보며
자기들끼리 그런다.
'야~~ 우린 저런거 꿈도 못 꾸는데...'
'그럼... 학교에서 선생님한테 맞았다고 그러면 우리 엄마 아빠는 뭘 잘못했기에 맞았냐고 더 혼나지...'
빠따는 개인의 잘잘못을 떠나 집단에 대한 단체기합 형태로도 많이 행해졌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1970년대에 내가 확실하게 빠따를 맞지 않았던 년도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미 30년도 더 된 오래 전 일이라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엔 거의 매년
맞았다고 생각해도 될 듯 싶다.
지각을 해서.. 숙제를 안해서... 성적이 떨어져서... 체육복을 안 가져와서 개인적으로 맞기도 하고,
다른 학과선생님에게서 수업분위기가 안좋다는 지적을 받았다고 학급전체가 담임선생님에게 맞고,
규율이 빠졌다고 선배들에게 맞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빠따 맞는 것이 크게 부끄러울 것도 없고, 또 교내에서도 문제될게 없었다.
맞은 당사자가 교사나 선배에게 항의할 생각도 못하고, 집에 가서 부모에게 얘기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던 때라 부모는 물론 알지도 못했다.
행여 집에서 알기라도 하면 뭘 잘못해서 맞았냐고 또 한번 혼이 나니,
오히려 맞은 표를 숨기기 바빴다.
그런 일이 일년에 한번 이상은 분명히 있었을테니,
중고등학교 시절이던 70년부터 73년도까지는 매년 맞았다고 본다.
난, 대학에 가면 맞는 일이 없을 줄 알았다. 대학은 자유분방하고 낭만만 있는 곳인줄 알았다.
그런데... 유토피아인줄 알았던 그곳도 결국은 남자의 세계였다.
74년 아직 입학의 부푼 꿈이 가시지 않던 어느 날.
고교동문회 소집이 있었는데, 제대로 모이지를 않았다고 군대까지 다녀 온 복학생 대선배가
줄줄이 빠따를 쳐대는 것이다.
그리고, 써클에서 여름방학 때 하계농촌봉사를 가서는 아침 기상시간이 늦는다는 이유로,
그런 해이한 상태로 봉사활동을 한다면 마을 주민들이 얼마나 한심하게 보겠냐며
당시 회장에게 봉사단원 전체가 빠따를 맞았다.
75년에는 써클 임원를 맡았는데, 하계농촌봉사 사전준비를 위해 수시로 모인 임원회에
한 친구가 늦는 바람에 역시 정신력강화와 솔선수범이라는 명목으로 맞은 기억이 있다.
역시 남을 위한 봉사에는 자기희생이 우선임을 알았다.
76년에는 ROTC를 하면서 2년차 선배에게 수차례 맞았다.
이유는 붙이는게 이유니, 굳이 알려고 할 필요도 없고 정당성 여부를 확인할 필요도 없다.
그걸 알려고 하는 행위 자체가 오히려 매를 버는거다.
또 여름방학 때 실시되는 ROTC 병영훈련 기간도 엉덩이의 내성을 기르는데 일조를 한다.
77년엔 대학 졸업반이고, 모든조직에서 선배이니 맞을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ROTC 하계병영훈련 기간은 나에게서 그런 신분을 박탈해 갔다.
오히려 태극기를 게양하는 3단 쇠파이프가 휘도록 맞은 기억이 난다.
78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육군소위로 임관하면서 드디어 나의 빠따생활도 마감되는 줄 알았지만,
그것도 착각이었다.
초임장교에게 필수코스인 병과학교 기간 중에는 소위는 장교가 아닌 교육생에 불과했고,
더구나 교육을 담당하는 구대장이 모두 ROTC 선배들이기에 우리는 끽소리도 못하고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간혹 끽소리를 내는 경우도 있었으나, 금강고 쓴 손오공에 불과했다.
이제 이 모든 험난한 과정을 모두 거친 79년.
이제 난 교육생도 아닌 당당한 육군중위가 되었다. 진짜 이제 나를 땅바닥에 엎드리게한 후
빠따를 칠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내가 죽을 죄를 짓기 전에는... 단체기합도 없고.
그럼 내가 70년대의 마지막 해를 빠따없이 무사히 잘 보냈을까???
79년에 나는 수송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60여대가 넘는 차량과 운전병들을 지휘 관리하는 직책이다.
부임 첫날을 지낸 다음 날 아침 일조점호를 하는데 몇명이 빠졌다.
당시에는 군대의 구타행위를 근절한다하여 구타를 하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쌍벌죄로
처벌을 한다는 조치가 취해지고 있었다.
초장에 전체 군기는 휘어 잡아야겠는데, 잘못하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해서.. 내가 생각한 것이 내가 먼저 맞고 때리는 방법이었다.
선임하사를 불러 통솔을 제대로 못한 내게 우선 책임이 있으니 먼저 나를 치라고 엎드렸다.
결국 이렇게 나는 70년대에 빠따로 부터 한해도 피해가지를 못했다.
당시야 불만도 많았고 죽을 맛이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도 하나의 회색추억이다.
빠따를 옹호하는건 아니고, 옹호할 생각도 없지만, 이런 옛 악습을 생각하며
요즘의 아이들이 너무 나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구타나 태형을 해서는 안되겠지만, 아이들은 강하게 키울 필요가 있다.
우리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엄마에게 잔매도 무수히 맞았고, 나에게 크게 한번씩 맞은 적이 있다.
그리고, 매년 아이들 담임선생님에게 필요하시면 우리 아이를 때리셔도 좋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맞으면서 자랐다고 삐딱하게 잘 못 자라지는 않았다.
그리고 엄마나 아빠와의 관계도 그 어느 집보다 좋다. 사회규범에 대한 가치관도 좋다고 본다.
아이들이 중학교 시절, 당시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맞았다고 학생이 경찰서에 신고하거나,
집에 가서 부모에게 말해 학부모가 학교로 찾아와 항의를 하는 내용의 TV 뉴스를 보며
자기들끼리 그런다.
'야~~ 우린 저런거 꿈도 못 꾸는데...'
'그럼... 학교에서 선생님한테 맞았다고 그러면 우리 엄마 아빠는 뭘 잘못했기에 맞았냐고 더 혼나지...'